프로모션 로딩 중...
달빛 아래 묻은 마음
한소희는 이건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힘을 보태다가 북삭(北朔)에 끌려갔다. 그렇게 삼 년. 마침내 살아 돌아왔지만,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때는 채찍을 휘두르며 도성의 망나니 귀공자들을 죄다 혼내 주고 다니던 후부의 아가씨였다.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 없이 내뱉고, 누구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목소리만 조금 높여도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심지어 황후로 책봉되는 날조차 마찬가지였다. 의식 도중, 의례를 주관하던 태감이 돌연 곁의 사람을 향해 매섭게 꾸짖었다. “똑바로 못 하겠느냐!” 순간 한소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몸을 낮춰 바닥에 엎드렸다.
챕터 (1)
第1章
한소희는 이건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힘을 보태다가 북삭(北朔)에 끌려갔다.
그렇게 삼 년.
마침내 살아 돌아왔지만,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때는 채찍을 휘두르며 도성의 망나니 귀공자들을 죄다 혼내 주고 다니던 후부의 아가씨였다.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 없이 내뱉고, 누구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목소리만 조금 높여도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심지어 황후로 책봉되는 날조차 마찬가지였다.
의식 도중, 의례를 주관하던 태감이 돌연 곁의 사람을 향해 매섭게 꾸짖었다.
“똑바로 못 하겠느냐!”
순간 한소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몸을 낮춰 바닥에 엎드렸다.
제1화
대전 아래에서는 신하들의 수군거럼이 끊이지 않았다.
“황후 자리에 오른들 무슨 소용인가. 폐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이는 한 귀비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는가? 입궁한 지 불과 이 년 만에 귀비가 되고 황자까지 낳았지 않소. 봉인(鳳印)마저 손에 쥐었으니, 후궁에서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넘보겠는가.”
“내 말이 그 말일세. 폐하께서 황후 마마를 구할 마음이 있으셨다면 진작에 군사를 보내셨겠지. 즉위하신 지 두 해가 지나도록 모른 척하시다가 이제 와 황후로 책봉하신 걸 보면, 결국 세간의 입을 막으려고 명분만 챙겨 준 셈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쨍그랑 소리와 함께 한소희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전각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한소희가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예전의 한소희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은 가을 사냥 때, 영국공(榮國公)의 세자가 한소희를 두고 이건에게 목매는 꼴이 우습다고 비웃었다가, 그녀가 휘두른 채찍에 관끈이 단번에 잘려 나간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연회 때, 태부(太傅)의 여식이 이건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이유로 술 한 병을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에 들이붓기도 했다.
그런 한소희였으니, 사람들은 이번에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순간, 한소희는 황급히 고개부터 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여러분의 흥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이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소희의 목소리는 한층 더 작아졌다.
“허면 신첩, 잠시 물러가 의복을 갈아입고 와도 되겠습니까? 치맛자락이 더러워져서... 폐하의 체면에 누가 될까 염려되옵니다.”
이건은 한동안 말없이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이내 그는 곁을 지키던 태감을 향해 명했다.
“황후께서 의복을 갈아입도록 편전으로 모시거라.”
곧바로 한소희는 태감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한소희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건의 가슴속에서 문득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북삭에서 돌아온 뒤로 한소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한소희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봤다.
그가 상소문을 처리할 때면 곁에서 먹을 갈아 주다가도, 어느새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옷깃을 움켜쥐곤 했다. 그러고는 평생 자신만 바라봐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 냈다.
그리고 다른 여인이 그의 곁은 맴도는 것도 참지 못했다.
한 번은 시회 자리에서 태부댁의 여식이 그에게 손수건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소희는 그 자리에서 손수건을 낚아채 연못에 던져 버리고는 제 손수건을 내밀며 이것으로는 부족하냐고 따져 물었다.
그토록 그녀는 자신에게 한결같았다.
그래서 그가 황위에 오르기 전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 한소희는 후부의 호위무사 서른을 이끌고 직접 적진으로 뛰어들어 포위망을 뚫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말에 태워 탈출시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북삭에 붙잡혀 갔다.
그런데 살아 돌아온 뒤로, 한소희는 단 한 번도 먼저 자신을 찾은 적이 없었다.
반면 자신은 밤마다 한소희의 처소를 찾아 곁을 지켰다.
하지만 손끝만 닿아도 한소희는 온몸을 걷잡을 수 없이 떨었다.
그럴 때마다 그도 더는 마음이 동하지 않아 서둘러 옷을 걸치고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이건은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소희는 막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
이건은 성큼 다가가 한소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한소희. 아직도 짐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냐?”
“네 마음에 응어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짐이 네 서출 동생을 맞아들였으니 원망스러울 테지. 허나 짐과 홍난이의 일은... 정녕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네가 북삭에 끌려간 뒤, 네 아버지는 네가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 여겼다. 해서 홍난이를 궁으로 들인 것이다. 그때 짐은 막 황위에 오른 참이었고, 네 아버지가 거느린 군사가 절실했다. 하여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네 아버지가 거듭 압박해 왔다. 후부의 피를 이은 황자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하기에, 짐은 어쩔 수 없이...”
그토록 사정을 설명했지만, 한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옵니까? 신첩은 황후입니다. 폐하께서 처하셨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한소희가 이처럼 매사에 이해해 줄수록, 이건은 오히려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그는 소매를 떨치며 돌아섰다.
“네 뜻대로 하거라.”
그 말을 남기고 이건은 성큼성큼 전각을 나섰다.
한소희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이건의 곁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는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손끝의 움직임부터 시선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마치 예전의 단정하면서도 도도했던 후부의 적녀로 돌아간 듯했다.
봉의궁(鳳儀宮)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때 태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오늘 밤 봉의궁에 드시겠다 하셨사옵니다.”
동경 앞에 앉은 한소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짧게 응했다.
“알았네.”
그로부터 향 한 자루가 타고 난 뒤, 태감이 다시 급히 들어와 아뢰었다.
“마마... 귀비마마께 태기가 동해 몸이 편찮으시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귀비마마의 처소로 향하셨사옵니다.”
태감은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폐하께서 소인더러 이 서찰을 마마께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한소희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알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예, 마마.”
태감이 물러간 뒤, 한소희는 서찰을 펼쳤다.
익숙한 이건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소희야.
짐이 네게 한 약조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짐과 이 강산을 함께 누릴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태의원에는 이미 탕약을 마련해 두었다. 홍난이가 뱃속의 아이를 낳는 대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할 것이다.
이후 짐의 자식을 낳을 사람은 오직 너뿐이니, 부디 마음 놓거라.]
지난 삼 년 동안 한소희가 간절히 바라 온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건이 천하를 평정하고 황좌를 굳힌 뒤, 만천하에 자신이야말로 그가 처음부터 정실부인으로 맞고자 했던 여인임을 밝혀 주기를.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달랐다.
그녀는 서찰의 내용을 다 읽고 난 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옆에 놓인 향로에 던져 버렸다.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한소희 역시 마음 가득 희망을 품고, 모든 일이 차츰 나아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날 밤, 그녀는 이건이 어서방(御書房)에서 국사를 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연자죽 한 그릇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창밖에 다다라 막 문을 열려던 순간, 안에서 이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일을 돌이켜 보면... 결국 짐이 그 아이를 저버린 셈이네.”
문을 열려던 한소희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
곧이어 아버지인 영원후 한석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그날의 포위전은 애초부터 소희를 폐하의 곁에서 떼어 놓으려고 꾸민 일이었지 않사옵니까. 소희를 삼 년 동안 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지요.”
“그 아이가 폐하의 곁에 있는 한, 홍난이를 궁에 들이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제2화
한소희는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이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뒤,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어린 소녀 하나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뒤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후부의 여식이라 하기에 짐은 그 아이가 소희인 줄 알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건의 목소리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나 뒤늦게 알고 보니, 그때 짐을 구한 아이는 홍난이었다.”
한소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온 도성을 제 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다.
어느 집 공자를 채찍질하고, 또 어느 집 도련님을 두들겨 패어 온 도성을 발칵 뒤집어 놓아도 상관없었다.
마지막에는 늘 이건이 나서서 뒷수습을 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에게 쏟아졌던 총애도,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 주던 너그러움도, 애초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잘못 알고 베푼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허나 홍난이는 서출이다.”
이때 문틈 너머로 이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짐이 하루아침에 혼약을 파하고 홍난이을 맞아들인다면, 조정 안팎에서 비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네. 그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오. 더구나 소희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소 난처한 기색을 담아 말을 이었다.
“소희가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금란전(金鑾殿)까지 쳐들어와 난리를 피울 게 뻔하네. 온 도성이 들썩일 만큼 일을 키우고도 성이 차지 않겠지. 그리되면 홍난이가 온갖 구설을 떠안게 될 터인데, 짐은 그 아이를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없네.”
이때 한석주가 곧장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 깊이 헤아려 내리신 결정이옵니다. 소희도 북삭에서 몇 해 지내다 보면 그 드센 성정 또한 한결 누그러지겠지요. 소희에게도, 홍난이에게도 그편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이건은 그 말을 듣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북삭이 비록 거칠고 척박한 곳이기는 하나, 짐이 이미 남몰래 일러 두었다. 소희가 그곳에서 박대받는 일은 없을 것이네.”
“또한 며칠 뒤 한가해지면 짐이 직접 그 아이를 데리고 사냥터에나 다녀올 생각이다. 소희는 예전부터 말 타는 것을 좋아했으니... 달래 주면 곧 괜찮아지겠지.”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연신 뒷걸음질 쳤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번지더니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발을 옮겼다. 어느새 침궁에 돌아와 있었지만,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 그저 다른 사람을 나로 잘못 안 덕에, 잠시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했을 뿐이라니.’
‘이건은 내 불같은 성정을 못마땅해했고, 내가 한홍난의 앞길을 막는다고 여겼어. 그래서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를 북삭으로 내칠 계략까지 꾸민 거야.’
‘허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내가 지난 삼 년을 어떤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북삭에 끌려간 첫날부터 그녀는 그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북삭의 귀한 집 자제들은 그녀를 백 보 밖에 세워 놓고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올리게 했다.
곧바로 화살 하나가 머리칼을 스치며 날아갔다.
퍽!
화살은 뒤편의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혔고, 산산이 터진 과육이 얼굴에 튀었다.
미처 몸을 피할 새도 없이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목덜미를 스쳤다.
베인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깃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자락이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대주(大周) 황제의 여인이 겁에 질려 오줌을 지렸구나!”
그날 이후로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 위를 맨발로 걷게 했다.
발바닥에는 화상으로 인한 물집이 줄줄이 잡혔고, 터진 자리마다 피가 배어 나왔다.
또한 말꼬리에 몸을 묶어 자갈밭을 내달리게 한 적도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가 갈려 나가 살점이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한겨울 가장 추운 날에는 천막 밖에 내던져 밤을 지새우게 했다.
그녀는 얼어 죽지 않으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밤을 버텼다.
이튿날 끌려 들어왔을 때는 입술마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버텼다.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 살아남았다.
이건이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조정 일에 발이 묶여 자신을 구하러 오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황위를 굳힌 뒤에는 반드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그녀는 삼 년을 버텼다.
그런데 모두 거짓이었다...
그때, 밖에서 태감과 궁녀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새어 들어왔다.
“귀비마마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폐하께서 곧바로 달려가셨잖아. 황후마마께서 돌아오신 지도 한참인데, 폐하께서 언제 저리 마음을 쓰신 적이 있었나?”
“두고 보게. 황후 자리도 결국 귀비마마께 돌아갈 테니.”
한소희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뒤 바깥에서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창을 열어 청명한 휘파람 소리를 흘려보냈다.
잠시 후, 잿빛 매 한 마리가 어둠을 가르며 내려와 한소희의 손목 위에 내려앉았다.
한소희는 곧바로 목에 걸고 있던 옥패를 뜯어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었다.
강호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전, 오랫동안 자신을 따르던 수하들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 옥패가 그들을 부르는 증표였다.
북삭에서 삼 년을 견디는 동안에도 한소희는 단 한 번도 옥패를 쓰지 않았다.
이건때문이었다.
자신을 구하려고 그들을 움직였다가 자칫 대주와 북삭 사이에 분란이라도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끝내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소희는 옥패를 잿빛 매의 다리에 단단히 매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밤하늘로 날려 보냈다.
매는 힘차게 날개를 펼치더니 이내 짙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곧 어머니가 남겨 주신 이들이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다.
제3화
그 뒤 며칠 동안 이건은 아침 조회가 끝나기 무섭게 봉의궁을 찾았다.
첫날에는 갓 수확한 여지 한 광주리를 가져왔다.
영남에서 역마를 재촉해 급히 올려 보낸 것이라며, 그가 손수 껍질까지 벗겨 한소희의 입가에 내밀었다.
이튿날에는 옥으로 만든 바둑판을 들여왔다.
전왕조 때부터 내려온 귀한 물건이라며, 흑돌을 한소희 앞으로 밀어 놓고는 예전에 그녀가 틈만 나면 바둑을 두자고 자신을 졸라 대던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건이 자리에 앉은 지 차 한 잔 마실 새도 되지 않아 장춘궁(長春宮)의 태감이 황급히 달려와, 귀비마마께서 아침부터 속이 메슥거리고 구토가 심하니 폐하께서 가서 살펴 주십사 아뢰었다.
이건은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멈춰 서서 한소희를 돌아보았다.
“소희야, 홍난이가 아이를 가진 몸이라 짐이...”
한편 한소희는 바둑판에 남은 백돌 몇 알을 가지런히 모아 바둑통에 담았다.
“황실의 후사가 중하니, 폐하께서는 다녀오십시오. 신첩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은 한동안 말없이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잔잔한 그 눈빛을 마주하자 도리어 가슴이 꽉 막히는 듯 답답해졌다.
무언가 말하려던 이건은 결국 한마디만 남겼다.
“금방 다녀오마.”
그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전각을 나섰다.
한소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금방 다녀오마.
예전에도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마음 한구석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푸드덕.
창밖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잿빛 매 한 마리가 창틀에 내려앉았다.
다리에는 손가락만 한 대나무 통이 매달려 있었다.
한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나무 통을 풀어 안에 든 쪽지를 꺼냈다.
어머니의 옛 수하들이 보내온 답신이었다.
짤막한 한 줄뿐이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보름 뒤 자시, 서화문에서 모시겠습니다.]
한소희는 한동안 쪽지를 내려다보다 촛불에 가져다 댔다.
불길이 종이를 삼키고 재만 남겼다.
앞으로 보름만 더 지나면,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사흘 뒤, 여러 나라의 사절이 대주를 찾아 조현했다.
전각은 눈부실 만큼 화려했고, 악공들이 울리는 풍악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한소희는 이건의 곁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떨지 않는 법을 익히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때 전각 밖에서 예관이 목청껏 외쳤다.
“북삭의 사신이 폐하를 뵙고자 하옵니다!”
그러자 한소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앞장서 들어오는 사내는 검은 호복을 입고 허리에 휘어진 칼을 차고 있었다.
한소희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북삭의 대장군, 야율무진이었다.
그녀가 말 뒤에 묶인 채 자갈밭을 질질 끌려다니던 그날, 야율무진은 곁에서 술을 마시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몰던 자에게 금구슬 한 주머니를 던져 주며 더 빨리 달리라 했었다.
그 목소리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야율무진은 예를 갖춰 이건에게 절한 뒤 북삭에서 가져온 진상품을 바쳤다.
의례가 끝나자 대전의 신하들은 그가 물러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야율무진은 그 자리에 선 채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소신이 삼 년 전 군막에서 대주의 귀한 손님을 대접한 적이 있사온데, 그때 우연히 보았는데 그분의 허리 뒤편에 매화꽃을 닮은 붉은 점 하나가 있더군요.”
말을 멈춘 야율무진의 시선이 언뜻 이건의 곁을 스쳤다.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그분께서는 지금도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순식간에 대전이 술렁였다.
아래에 늘어선 신하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삼 년 전 북삭에 끌려갔던 ‘귀한 손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대 한홍난은 이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이던 한홍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이 듣기로 북삭은 풍속이 거칠고 예법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찌 감히 폐하 앞에서 저런 망발을 입에 담는단 말입니까?”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언니께서 그토록 큰 고초를 겪으셨는데, 어찌 감히 저런 말까지...”
이건의 낯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다.
단 한마디라도.
저자의 말은 거짓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부정해 주기를.
하지만 한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야율무진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소신은 그저 옛 인연이 생각나 안부를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다른 뜻은 없사옵니다. 혹여 말이 지나쳤다면 폐하께서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야율무진은 한소희의 얼굴에 머물던 시선을 느릿하게 거두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려 북삭 사신들 사이로 돌아갔다.
마치 조금 전의 말이 그저 오랜 벗의 안부를 물은 것에 불과하다는 듯 태연했다.
잠시 뒤 풍악이 다시 울리고 춤이 이어졌다.
연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되었다.
이건의 얼굴에서도 별다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신들이 올리는 축하의 말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고, 한홍난이 몸을 기울여 술을 따라 줄 때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까지 띠었다.
하지만 술잔만은 쉴 새가 없었다.
비면 다시 채웠고, 채워지면 곧바로 비웠다.
한 잔.
또 한 잔.
연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악기 소리마저 그치자, 화려하던 대전에는 적막만 남았다.
이건은 직접 한소희를 봉의궁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봉의궁에 들어서자 전각의 문이 닫혔다.
그 순간이었다.
이건이 돌연 한소희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소희를 문짝에 밀어붙였다.
술 냄새를 머금은 숨결이 가까이 쏟아졌다.
이건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조금 전 저자가 한 말에 대해... 짐에게 할 말이 없느냐?”
제4화
이건이 손목을 세게 움켜쥔 탓에 뼈마디가 저릴 만큼 아팠지만, 한소희는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다?”
이건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북삭의 장군이라는 자가 네 허리 뒤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훤히 알고 있는데, 헌데도 짐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돌아온 뒤로 짐이 손끝 하나 대는 것조차 그리도 질색하더니... 북삭에서 남들에게 실컷 보이고 만져진 탓이었나 보구나.”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은 손을 뻗어 한소희의 머리에 꽂힌 봉황 비녀를 뽑아냈다.
눈에는 차가운 조소만 가득했다.
“한 나라의 국모가 될 몸이라고?”
그는 비녀를 내려다보다 비웃듯 덧붙였다.
“네가 가당키나 하느냐?”
이건은 손에 들고 있던 봉황 비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밖을 지키던 태감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건은 등을 돌린 채 차갑게 명했다.
“짐의 명을 전하라. 황후가 몸이 편찮으니 봉의궁에 머물며 몸을 돌볼 것이다. 또한 짐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궁문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하라.”
궁궐 안의 사람들은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 누구보다 빨랐다.
이건의 명이 내려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봉의궁의 궁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올라오는 음식도 날이 갈수록 형편없었다.
처음 며칠은 그래도 따뜻한 죽과 찬반 몇 가지가 올라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 빠진 죽에 쉰 냄새 나는 만두가 전부였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제대로 닦지도 않은 기름때까지 눌어붙어 있었다.
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한여름에 얼음 공급까지 끊기니 묵은 상처가 땀에 젖어 가렵고 아리기를 거듭했다.
한소희는 밤새 몸을 뒤척이다 결국 차가운 돗자리 위에 옆으로 누워 뜬눈으로 날을 새우곤 했다.
불과 며칠 사이 몸이 눈에 띄게 야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굳게 닫혀 있던 궁문이 열렸다.
이건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짐이 너를 박대하라 명한 적도 없거늘, 대체 어찌하여 제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냐?”
한소희는 흐트러짐 없이 예를 올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건은 한층 가늘어진 한소희의 턱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국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건만 꺼냈다.
“어마마마께서 불공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셨다. 너를 꼭 보겠다 하시니, 어서 옷을 갈아입거라. 이 몰골로 가서 어마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고.”
한소희는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수안궁(壽安宮) 안에는 은은한 단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석에 단정히 앉아 있던 태후는 한소희가 들어오자 곧장 손짓했다.
“황후가 왔구나. 어서 이리 와 곁에 앉거라.”
태후는 한소희의 손을 잡아 곁에 앉히고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내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어찌 이리 야위었느냐?”
말을 마친 태후의 낯빛이 금세 싸늘해졌다.
곧바로 그녀의 시선은 이건에게 향했다.
“내가 궁을 비운 것이 고작 반년인데, 헌데 황후는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 주상은 대체 황후를 어찌 보살핀 것이냐?”
이때 한홍난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들었다.
“어마마마,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조정의 일로 하루도 편히 쉬실 날이 없으십니다. 신첩이 미처 살피지 못하여 황후마마의 처소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탓이옵니다.”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태후의 시선이 차갑게 한홍난에게 꽂혔다.
“난 지금 주상와 말을 나누고 있거는, 네가 어디 감히 끼어드느냐? 요즘 들어 갈수록 법도를 잊는구나.”
순간 한홍난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반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신첩이 경솔하였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소희의 눈시울이 잠시 뜨거워졌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새 부인을 들인 뒤부터 그녀에게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이 넓은 도성 안에서 한소희의 손을 잡아 주고, 자수를 놓는 법을 가르쳐 주며, 귀부인들의 온갖 뒷말을 막아 준 이는 오직 태후뿐이었다.
태후는 이건을 몇 마디 더 꾸짖고 나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되었다. 주상은 우선 가서 조정의 일을 보거라. 황후는 남아서 나와 이야기나 좀 나누자꾸나.”
이건은 한소희를 바라본 뒤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태후는 한소희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몸부터 추스르고, 황제에게 너무 마음을 두지 말며, 괜한 일로 속을 태우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네. 이 나이에 더 바랄 것이 무엇 있겠느냐. 그저 후궁이 조용하고 평안하기만 하면 된다. 너도 돌아왔으니, 지나간 일은 너무 마음에 품고 있지 말거라.”
그러다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소희야, 내가 듣기로 네 어머니가 생전에 따르던 이들을 네게 남겼다지?”
한소희의 눈빛이 미세하게 굳었다.
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조정 안팎이 어수선하다. 주상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 군사를 써야 할 일이 많고. 네가 황후인 이상, 마땅히 황제의 근심을 덜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네 어머니께서 남긴 사람들을 조정에 맡기거라. 조정에서 직접 거느리고 부리게 한다면 나라에도 이롭고 황제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네.”
그리고 마치 한소희를 위한다는 듯 부드럽게 한소희의 손등을 토닥였다.
“네가 황제를 위해 이만한 공을 세워 두면, 앞으로 이 후궁에서 누가 감히 너를 업신여기겠느냐.”
한소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태후의 손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어마마마, 그것은 어머니께서 신첩에게 남기신 유일한 사람들이옵니다.”
태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
“네 어머니는 따지고 보면 네 아버지가 예전에 들인 강호 출신 여인에 불과하네. 애초에 명문가의 안주인으로 내세울 만한 신분도 아니었지.”
태후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 여인이 남긴 자들을 고이 내놓으면 후부의 세력이고, 조정의 병력이 되는 것이니, 명분 또한 떳떳하네.”
“허나 네가 숨겨 두고 내놓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사로이 병력을 거느린 것이 되고, 황실을 거스를 뜻을 품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지.”
태후는 한소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 죄를 철저히 캐묻는다면, 후부 일가가 참형을 당하고도 남을 중죄니라.”
한소희는 멍하니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일찍이 어머니의 영전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앞으로는 내가 너를 아껴 주마.”
또 언젠가는 웃으며 이런 말도 했었다.
“이 아이는 성정이 불같으니 이건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 따뜻한 손길도.
자신을 감싸 주던 말도.
처음부터 그녀가 가진 것을 얻기 위해 베푼 호의였을 뿐이었다.
한소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마마마께서 신첩에게 죄가 있다 여기신다면... 신첩은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자 태후는 얼굴을 굳혔다.
“그래. 네 뜻 알았네!”
차가운 목소리가 수안궁 안에 울렸다.
“그리 나오겠다면 황후는 당분간 이 수안궁에 머물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제5화
한소희는 상궁이 자신을 법당 안으로 끌고 가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마께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릴 뜻이 없으시다면,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아보시지요. 마음을 돌리실 때까지 일어나실 수 없습니다.”
쾅!
문이 닫히고 곧이어 자물쇠까지 채워졌다.
그렇게 한소희는 그 자리에서 꼬박 하루 동안 무릎을 꿇었다.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밤늦도록 버티던 그녀는 한밤중이 훌쩍 지나서야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방석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몽롱한 정신 사이로 매캐한 탄내가 스며들었다.
한소희는 번쩍 눈을 떴다.
뒤편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들보의 단청은 이미 검게 그을렸고, 불티가 후두둑 떨어졌다.
한소희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꿇고 있던 무릎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불이야...!”
연기에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외치자, 그제야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와 비명이 뒤엉켰다.
잠시 뒤 태감 둘이 불에 뒤틀린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소희의 양팔을 붙잡아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바닥에 내려놓이자 한소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쏟아냈다.
그때 겉옷만 급히 걸친 태후가 황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도 여러 궁인을 거느리고 성큼성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불길이 완전히 잡혔을 무렵에는 법당의 절반이 이미 무너져 내린 뒤였다.
태후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멀쩡하던 법당에 어찌 불이 났단 말이냐?”
태후는 마당 아래 엎드려 있는 궁인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샅샅이 조사하라.”
태후 곁을 모시는 태감은 이미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안팎을 모조리 뒤졌다.
한참 뒤, 태감 둘이 어린 궁녀 하나를 끌고 와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궁녀는 땅에 엎드리자마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귀, 귀비마마께서 소인에게 불을 지르라 하셨사옵니다!”
마당 안이 삽시간에 술렁였다.
한홍난은 순간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며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물러섰다.
궁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마마께서 일이 끝나면 은자를 두둑이 주고 궁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 하셨사옵니다. 소인이 잠시 욕심에 눈이 멀어 그만... 태후마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옵소서!”
“무엄하다!”
한홍난이 날 선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고는 곧장 이건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붉어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폐하, 신첩과 황후마마는 비록 한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이 궁 안에서 신첩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황후마마뿐이옵니다. 신첩이 어찌 마마를 해하려 이런 짓을 꾸미겠사옵니까?”
한홍난은 배 위에 손을 얹으며 울먹였다.
“더구나 신첩은 폐하의 아이를 품고 있사옵니다. 밤낮으로 이 아이의 복을 빌기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천벌 받을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겠사옵니까?”
그때 어린 궁녀는 쿵쿵 소리가 나도록 두 번 더 머리를 조아리더니, 황급히 소매 속에서 비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인은 거짓을 고한 것이 아니옵니다! 이 비녀가 바로 귀비마마께서 소인에게 내려 주신 것이옵니다!”
궁녀는 떨리는 손으로 비녀를 높이 받쳐 들었다.
“마마께서 직접 몸에 지니시던 물건이라 하셨사옵니다. 점당포에 가져가면 은자를 제법 받을 수 있으니, 증표로 잘 간직하고 있으라 하셨사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비녀로 향했다.
그것은 해당화 무늬를 새긴 옥비녀였다.
옥은 맑고 윤기가 돌았으며, 비녀 몸체에는 금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다.
그 순간, 이건의 눈빛이 굳었다.
그는 눈앞에 놓인 비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한소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삼 년 전 상원절, 이건은 손수 그 비녀를 한소희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때 한소희는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예쁩니까?”
그러자 그는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너는 무엇을 해도 예쁘네.”
그 뒤로 한소희는 매일 그 비녀를 꽂고 다녔고,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이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굳은 시선이 한소희에게 꽂혔다.
“한소희.”
이건은 한소희 이름 석 자를 또렷이 내뱉었다. 목소리에는 살얼음 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사람을 사주해 불을 지르게 하고, 그 죄를 홍난이에게 씌우려 하다니! 짐이 눈이 멀어 친히 내린 물건도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느냐?”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신첩이 한 일이 아니옵니다. 저 비녀는 이미 오래전에...”
“아직도 발뺌을 하는구나.”
그때 태후가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그녀는 한소희를 차갑게 훑어본 뒤 이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상, 황후는 황후로서의 본분을 저버렸고, 불당에 불을 놓은 것도 모자라 귀비에게 죄까지 뒤집어씌우려 했다. 어느 죄목 하나 가볍지 않다. 이 어미가 보기에는 황후의 자리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한 뒤 냉궁에 가두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해야 마땅하다.”
이건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홍난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어마마마, 폐하. 언니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 그래도 신첩의 친언니이옵니다.”
한홍난은 애처로운 얼굴로 이건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신첩과 뱃속의 아이를 보아서라도 한 번만 선처해 주시옵소서. 언니도 순간의 어리석음에 그릇된 짓을 저질렀을 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한홍난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더욱 부드럽게 덧붙였다.
“차라리 고된 일을 시켜 제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면 족하옵니다. 굳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세우실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이건은 무릎을 꿇고 한소희를 위해 선처를 구하는 한홍난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끝까지 대의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다 다시 한소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그을음투성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마침내 이건이 입을 열었다.
“귀비가 너를 위해 이토록 청하니, 짐도 중히 벌하지 않겠네. 대신 너에게 내린 봉인을 거두고, 오늘부터 장춘궁에 가서 귀비의 곁에서 몸소 시중을 들거라.”
이건은 서늘한 눈빛으로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귀비는 만삭에 가까워 곧 해산을 앞두고 있네. 네가 곁에서 정성껏 보필하여 모자가 무사하다면 이번 일은 더는 묻지 않겠다.”
잠시 뒤, 이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냉랭해졌다.
“허나 홍난이나 아이에게 털끝만 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짐은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제6화
이튿날,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상궁이 한소희를 딱딱한 침상에서 잡아끌어 일으켰다.
“아직도 스스로 마마인 줄 아느냐? 서두르게, 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한소희가 장춘궁에 들어서자, 한홍난은 부드러운 평상에 기대어 한가로이 인삼탕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사발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꼬리를 천천히 훔쳤다.
“방 안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언니가 마당에 나가 부채질이나 좀 해 주시게.”
칠월의 뙤약볕은 살갗을 태울 듯 작열했다.
한소희는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등허리의 옷자락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부채를 든 팔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으며,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한홍난은 처마 밑의 긴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 말했다.
“언니, 부채질을 멈추면 아니 되지요. 부채질이 그치면 금세 더워지잖아요.”
그러고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예전 후부에서는 언니가 적녀였고, 나는 서출에 불과했지요. 명절만 되면 언니 눈치부터 살피기 바빴는데... 헌데 세상일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언니가 내게 부채질을 해 주고 있네요.”
한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술은 핏기마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한홍난은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언니 어머니께서 저승에서 지금의 언니를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을 낳은 걸 후회하시려나?”
한소희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아, 참.”
한홍난은 비단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나직이 웃었다.
“내가 잊었네.”
“언니의 어머니는 원래 강호를 떠돌던, 출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여인이었지. 살아생전에도 이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더니, 죽어서조차 번듯한 위패 하나 남기지 못했다면서? 허나 내 어머니는 다르잖아요. 지금은 어엿한 후부의 정실부인인 데다 조정에서 품계까지 받은 몸이지 않습니까. 밖에만 나서면 누구 하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깍듯이 예를 갖추잖아요.”
이어지는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어미 팔자가 천했으니, 딸의 팔자도 천할 수밖에.”
“그만!”
한소희가 홱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빛이 서늘하게 벼려졌다.
칼날 같은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한홍난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그대로 막혔다.
하지만 이내 모욕감이 치밀었는지 낯빛을 굳혔다.
곧바로 그녀는 곁의 상궁을 향해 싸늘하게 명했다.
“언니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성정 하나는 여전하네요.”
“가서 내가 언니를 위해 마련해 둔 탕약을 가져오너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잘 들게 해 드리거라.”
상궁은 금세 탕약 한 사발을 가져왔다.
그러더니 한소희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고 억지로 입을 벌린 뒤, 탕약을 그대로 들이부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탕약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려 옷깃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소희는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쏟아 냈다
상궁은 탕약을 들이붓는 내내 비웃음을 흘렸다.
“황후마마, 이게 얼마나 귀한 약인지 아십니까?”
“우리 마마께서 특별히 사람을 성 밖으로 보내, 마마 어머니의 초라한 관을 파내게 하셨지요.”
상궁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유골을 사흘 동안 불사르고 곱게 갈아서야 겨우 이 한 사발이 나왔답니다. 허니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깨끗이 드십시오. 귀비마마의 정성을 헛되이 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한소희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속이 뒤집힐 듯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홍난은 긴 의자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언니, 맛이 어떠하신가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소희는 갑자기 상궁의 손을 뿌리치고 한홍난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한홍난의 목을 조였다.
“이 요망한 것!”
한홍난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한소희의 팔을 할퀴었다.
주변의 태감과 궁녀들은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우르르 달려들었다.
여럿이 힘을 합쳐 겨우 한소희를 억지로 떼어 냈다.
한소희는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졌고, 이마가 돌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이내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한소희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두 태감이 달려들어 꼼짝도 못 하게 짓눌렀다.
한홍난은 평상 위에 축 늘어진 채 목을 감싸 쥐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 냈다.
그때 한 궁녀가 갑자기 한홍난의 아래쪽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마마! 피, 피가 나옵니다!”
새빨간 피가 한홍난의 치맛자락을 흠뻑 적시고, 평상 끝을 따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장춘궁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이건이 달려왔을 때, 한홍난은 이미 내전으로 옮겨진 뒤였다.
굳게 닫힌 문 앞으로 지나가던 이건은 한소희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음 순간.
짝!
거센 손바닥이 한소희의 뺨을 후려쳤다.
“독한 년!”
이건의 눈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홍난이와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야!”
이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이년을 문 앞에 꿇려라. 귀비와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하거라!”
금군 둘이 곧장 달려들어 한소희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전각 돌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렸다.
잠시 뒤 전각 문이 굳게 닫혔다.
산파들은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나올 때마다 손에는 붉은 물이 가득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
전각 안에서 들려오던 한홍난의 비명은 처음에는 찢어질 듯 높았다.
그러다 점차 쉰 소리로 변했고, 마침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약해졌다.
얼마 후.
응애―!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태어나셨습니다!”
“황자마마이십니다!”
전각 안이 순식간에 축하의 소리로 가득 찼다.
곧이어 문틈 너머로 이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을 내려라!”
“모두에게 후히 상을 내리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전각 문밖에 아직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한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궁문을 향해 걸었다.
서화문 쪽에서 자시를 알리는 경쇠 소리가 막 울려 퍼졌다.
성벽 위로 사람 그림자가 희미하게 스쳤다. 이윽고 줄사다리 하나가 성벽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졌다.
한소희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줄을 붙잡고 성벽을 타고 올랐다.
거친 삼줄이 손바닥을 쓸어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한소희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아가씨.”
성벽 위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손을 뻗어 한소희를 끌어올렸다.
목소리는 낮고 신중했다.
“수레와 말은 이미 성 밖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한소희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겹겹이 이어진 궁궐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불빛이 환했다.
갓 태어난 황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등불이었다.
한소희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사람을 따라 성벽 너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