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 동안 나는 이방인이었다

GoodNovel new 완결

약혼을 한 뒤, 우리 여섯 명은 마지막이라는 명목으로 프리웨딩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절친 임유미가 ‘24시간 커플 체인지’ 게임을 제안했다. 같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뽑은 사람끼리 하루 동안 연인처럼 지내는 게임이었다. 반대로 빈 카드를 뽑은 이는 잡일을 전담하며 모두의 찍사이자 짐꾼이 되어야 했다. 첫 번째 라운드, 내가 집어 든 것은 서늘한 빈 카드였다. 약혼자 윤경찬과 임유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달 모양 카드를 뽑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일출을 보러 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세 사람 몫의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짊어졌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도 내가 뽑은 건 또 빈 카드였다. 이번에 두 사람이 뽑은 것은 장미 카드였고 거기에 걸린 미션은 1분간 포옹하기였다. 모두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 동안, 나는 그 곁에 서서 무덤덤하게 스톱워치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라운드... 그렇게 무려 일곱 번이나 나는 매번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군더더기 같은 사람이었다.

챕터 (1)

第1章

약혼을 한 뒤, 우리 여섯 명은 마지막이라는 명목으로 프리웨딩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절친 임유미가 ‘24시간 커플 체인지’ 게임을 제안했다. 같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뽑은 사람끼리 하루 동안 연인처럼 지내는 게임이었다. 반대로 빈 카드를 뽑은 이는 잡일을 전담하며 모두의 찍사이자 짐꾼이 되어야 했다. 첫 번째 라운드, 내가 집어 든 것은 서늘한 빈 카드였다. 약혼자 윤경찬과 임유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달 모양 카드를 뽑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일출을 보러 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세 사람 몫의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짊어졌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도 내가 뽑은 건 또 빈 카드였다. 이번에 두 사람이 뽑은 것은 장미 카드였고 거기에 걸린 미션은 1분간 포옹하기였다. 모두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 동안, 나는 그 곁에 서서 무덤덤하게 스톱워치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라운드... 그렇게 무려 일곱 번이나 나는 매번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군더더기 같은 사람이었다. 제1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똑같은 ‘웨딩드레스 카드'를 뽑았다. 룰에 따라 두 사람은 즉석에서 약식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임유미는 내가 챙겨온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윤경찬은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약혼반지를 빼내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주변에 몰려든 친구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외쳤다. “키스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윤경찬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취해 환호하는 사이, 나는 카드가 담겨 있던 랜덤 상자를 열어보았다. 내 상자에 든 건 전부 빈 카드인 반면 윤경찬과 임유미의 상자에는 똑같은 달과 장미, 웨딩드레스가 넘쳐나도록 들어차 있었다. 내 운이 나빴던 게 아니었다. 이 잔인한 게임 자체가 애초에 두 사람만을 위해 짜인 판이었던 것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모바일 청첩장을 미련 없이 전부 삭제했다. 고작 여섯 명의 여행에서조차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면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도 그들을 위해 자리를 내여줄 필요는 없었다. 청첩장을 삭제하는 순간에도 야속하게 등 뒤에서는 다시금 거대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환호 속에서 윤경찬은 임유미와 나눈 입맞춤을 끝내고 허리를 감싸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새빨갛게 상기된 임유미는 여전히 그의 어깨를 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아쉬움에 겨워 크게 소리쳤다. “한 번 더!” 윤경찬은 피식 웃으며 툭 내뱉었다. “꺼져.”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를 선뜻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나를 발견한 임유미는 그제야 불현듯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고개를 숙여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다인아, 반지가 꽉 끼어서 안 빠지네.” 그녀는 천진한 말투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 딱 하룻밤만 끼고 있으면 안 될까?” 그 약혼반지는 내 생일날 윤경찬이 건넸던 선물이었다. 분명 내 손가락 둘레에 맞춰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 했었는데, 지금 임유미의 손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아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토록 순순히 승낙할 줄은 몰랐다는 듯, 윤경찬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서다인, 억울하다는 표정 좀 짓지 마. 다들 우리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서 온 여행인데, 고작 게임 하나로 분위기 망치지 말고.” 나는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나 분위기 안 망쳤어.” “그럼 표정 좀 풀어.” 어느새 진승현이 휴대폰을 치켜들고 있었다. “자, 일일 신랑 신부 여기 보세요!”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윤경찬과 임유미 곁으로 몰려들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서니 제법 보기 좋은 구도가 완성되었다. 그러자 진승현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휴대폰을 쓱 건넸다. “서다인, 네가 사진 제일 잘 찍으니까 여러 장 찍어 줘.” 나는 묵묵히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들은 다정하게 바싹 붙어 섰다. 정중앙에 자리한 윤경찬의 곁에서, 내 웨딩드레스를 입은 임유미가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남은 세 사람이 그 둘을 에워싼 모습은 영락없는 진짜 결혼식 단체 사진 같았다. “서다인.” 윤경찬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멍하니 서서 뭐 해?”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한 장, 두 장, 십여 장을 찍는 동안, 그 수많은 사진 속에 내 모습은 단 한 컷도 존재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두 시였다. 애초에 나는 더블 스위트룸 세 개를 예약해 두었었다. 나머지 네 명이 두 방을 나눠 쓰고, 나와 윤경찬이 남은 한 방을 함께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룸 키를 나눠 가질 때 주우빈이 갑자기 실실 웃으며 선언했다. “커플 교환 시간이 아직 12시간 남았어. 룰에 따라서 오늘 밤 경찬이는 유미랑 한방을 써야 해.” 룸 키를 쥔 내 손이 차갑게 굳었다. “같은 방을 쓰는 것도 룰이라고?” 임유미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해명했다. “단순히 한방에서 자는 것뿐이잖아. 스위트룸이라 침대도 두 개고. 우리가 딴짓을 할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윤경찬 역시 정색하며 거들었다. “다들 있는 데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나는 어디서 자?”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이내 진승현이 복도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찬이랑 유미가 배정받은 곳이 패밀리 스위트룸이잖아. 거실에 소파 베드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넌 거기서 눈을 붙이면 되겠네.” 다시 말해, 내 약혼자와 내 절친이 들어간 방문 밖에서 내가 잠을 청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방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이놈의 빌어먹을 24시간짜리 게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방을 따로 하나 잡을게.” 내가 몸을 돌리자, 주우빈이 다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에이, 깐깐하게 그러지 마. 여기 하룻밤에 수십만 원이나 하는데 뭐 하러 아깝게 돈을 낭비해? 어차피 우리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아는 사이잖아.” 제2화 나는 그들과 같이 자라지 않았다. 저 다섯 명은 유치원 시절부터 줄곧 함께였지만, 나는 대학에 와서야 윤경찬을 알게 되었고 그의 손에 이끌려 이 무리에 합류했을 뿐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나 역시 그들 틈에 동화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선생님 댁 정원에서 몰래 복숭아를 따 먹었다는 유년 시절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맥락도 모른 채 어색하게 따라 웃었고 그들끼리만 통용되는 별명이나 은어를 쓸 때면 남몰래 메모 앱에 기록해 두기도 했다. 모두의 생일, 알레르기나 기피하는 음식, 자잘한 버릇까지 빠짐없이 외웠다. 다 같이 회식을 할 때면 늘 1등으로 도착하는 건 나였고, 여행 때마다 차량과 호텔을 예약하고 동선을 짜는 것도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숱한 공을 들여도, 그들이 예전 추억을 꺼낼 때면 늘 똑같은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넌 그때 우리를 몰랐으니까 잘 모를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모를 거야’라는 말은 ‘굳이 알려줄 필요 없어’로 변질되어 갔다. 그들은 약속된 식당을 갑자기 바꿔도 내게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고 다 같이 단체 프로필 사진을 맞출 때도 내게 사진을 보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윤경찬과 임유미의 채팅 기록을 우연히 보고서야, 나는 그들이 이미 반년 전부터 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윤경찬은 장난스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서서 다 준비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서 항공권부터 호텔, 일정까지 전부 내 손으로 직접 짰고, 모든 비용 역시 내 돈으로 먼저 결제했다. 결국 그들 다섯 명은 그저 편하게 여행을 즐기러 온 것이었고 그 모든 걸 도맡아 준비한 나는 이제 내가 예약한 내 방마저 고스란히 내어주어야 하는 우스운 처지가 되었다. 나는 객실 카드키를 내려놓았다. “너희끼리 써. 난 아래층 로비에 있을게.” 나는 더 이상 그들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객실로 올라가 보니 방 안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단톡방에는 다섯 명이서 오붓하게 아침을 먹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딱 다섯 명분의 식사만 세팅되어 있었다. 그때 임유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인아, 자고 있길래 안 깨우고 우리 먼저 밥 먹으러 왔어.] [일어나면 알아서 챙겨 먹어.] 대충 씻고 식당으로 내려갔지만, 직원은 조식 시간이 이미 끝났다고 안내했다. 그때 마침 윤경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어디야?” “식당.” “왜 아직도 식당이야?” 그의 말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 “우린 선착장에서 20분째 널 기다리고 있잖아.” 나는 단톡방을 다시 확인했다. 몇 시에 출발하는지 내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한테는 아무도 말 안 해줬잖아.” “유미가 톡 보냈잖아.” “너희끼리 먼저 밥 먹는다는 말뿐이었어.” 윤경찬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되려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다들 밥 먹으러 갔으면 그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네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다 너 하나만 기다리고 있잖아.” 결국 나는 아침도 굶은 채 선착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가야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요트는 이미 시동을 켠 상태였다. 하지만 갑판 위에 모여 선 다섯 명 사이로, 내가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임유미는 윤경찬의 하얀 셔츠를 걸치고 있었는데, 셔츠 밑단이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가릴 정도의 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허겁지겁 셔츠 깃을 여몄다. “다인아, 오해하지 마. 내 치마 지퍼가 고장 나서 경찬이가 잠깐 빌려준 거야.” 윤경찬의 셔츠는 평소 나라면 감히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물건이었다. 예전에 빨래를 하다가 실수로 어두운색 옷과 섞여 셔츠가 옅은 회색으로 물든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남이 제 맨살에 닿는 옷을 함부로 만지는 게 끔찍하게 싫다며, 꼬박 일주일 동안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 그것을 걸치고 있는 임유미를 향해서는 그저 다정하게 챙겨줄 뿐이었다. “감기 걸리겠다. 얼른 긴 바지로 갈아입어.” 임유미는 나를 향해 장난스레 혀를 빼꼼 내밀었다. “거봐, 얜 오지랖이 너무 넓다니까.” 내가 난간을 잡고 요트에 오르기가 무섭게 주우빈이 한가득 짐을 내 품에 쑤셔 넣었다. “마침 잘됐다, 선크림이랑 카메라, 물 전부 여기 있으니까 네가 좀 맡아줘.” 나는 그들의 짐을 껴안은 채 요트 엔진에서 가장 가까운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디찬 바닷바람을 맞으니, 텅 빈 위장이 시큰거리며 옥죄어 왔다. 오늘의 다이빙 코스를 위해 나는 6개월 전부터 남몰래 수영을 배웠다. 바다를 지독히도 좋아하는 윤경찬과 달리 나는 물을 끔찍이 무서워했지만, 그 몰래 다이빙 강습까지 받아 가며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것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그에게 뜻밖의 깜짝 이벤트를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이빙 스폿에 도착하자, 강사는 체험 인원을 딱 5명으로 제한했다. 기다렸다는 듯 진승현이 미소를 띤 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다인 너 물 무서워하잖아? 배에 남아서 가방이나 좀 지켜.” 나 이미 스쿠버다이빙 자격증까지 땄다고 말하려는 순간, 임유미가 윤경찬의 팔짱을 꽉 꼈다. “경찬아, 나 너무 긴장된다. 물속에 들어가면 나 꼭 먼저 챙겨줘야 해?” 윤경찬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임유미의 산소통을 세심하게 점검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옆에 딱 붙어 있을게.” 나는 혀끝까지 맴돌던 말을 끝내 속으로 삼켜 냈다. 저들 다섯 명이 차례로 바닷속으로 뛰어든 뒤, 나는 갑판에 우두커니 앉아 그들의 남겨진 옷가지와 휴대폰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강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안 들어가실 거예요?” 나는 가방에서 방금 발급받은 새 자격증을 꺼내어 오래도록 들여다보다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안 들어갈래요.” 제3화 점심 식사 자리에서 임유미가 뱃멀미를 호소하자 윤경찬은 줄곧 그녀 옆에 꼭 붙어 간호에 매달렸다. 나는 텅 빈 위장이 너무 아파 도저히 밥을 넘길 수 없었던 터라, 직원에게 부드러운 죽으로 메뉴를 바꿔 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그러자 주우빈이 실실 웃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서다인, 넌 왜 갑자기 아픈 척이야? 유미가 뱃멀미하니까 괜히 따라 하는 거 아냐?” 나머지 일행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자, 윤경찬이 눈을 치켜뜨며 나를 향해 말했다. “넌 예전에 배 탔을 땐 멀쩡했잖아.” 나는 해명했다. “아침을 굶었더니 위가 좀 아파서 그래.” 하지만 그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임유미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럼 그냥 좀 참아. 유미 아파 죽겠는데 굳이 너까지 보태야겠어?” 그때 마침, 직원이 흰죽 한 그릇을 내왔다. 내가 막 손을 뻗으려던 순간, 윤경찬이 먼저 그 죽 그릇을 가로채어 임유미 앞으로 쓱 밀어주며 말했다. “일단 이거라도 좀 먹어 봐.” 나는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멈춰 섰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명백히 내가 시킨 죽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임유미는 억지로 두어 숟갈을 뜨더니, 이내 아무 맛도 안 난다며 남은 죽 그릇을 내 쪽으로 툭 밀어냈다. “나 안 먹을래. 다인아, 너 위 아프다며? 이거 네가 먹어.” 죽은 그녀가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헤집어 놓은 탓에 볼품없이 흩어져 있었고, 그릇에 걸쳐진 숟가락에는 그녀의 붉은 립스틱 자국마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아마 아무 내색 없이 그 죽을 떠먹었을 것이다. 임유미가 으레 이렇게 말하며 웃었을 테니까. “우린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니까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그리고 윤경찬 역시 그런 나를 기특하다며 칭찬해 주었을 터였다. “다인은 역시 속이 깊어. 다른 애들처럼 유난 떨지도 않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는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이것 좀 버려주세요.” 임유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 몇 입 안 먹었는데, 혹시 내가 먹던 거라 꺼림칙해서 그래?”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남이 먹다 남긴 건 안 먹거든.” 윤경찬은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냈다. “서다인, 얜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너 생각해서 죽 남겨준 건데, 꼭 이 상황에서 애를 무안하게 만들어야겠어?” 나는 내 앞에 있는 다섯 사람을 보며 문득 멍해졌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은 늘 먹다 남은 음식을 내게 넘겨주었고 식당 자리가 모자라면 나만 덜렁 다른 테이블로 보냈으며 차에 자리가 하나 부족하면 알아서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그들은 그저 여행지에서 자신들을 찍어 줄 사진사가 필요해질 때쯤에야 비로소 내 존재를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금세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겉도는 사람, 속이 좁아 가벼운 장난조차 받아주지 못하는 팍팍한 사람이 되어 버리곤 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러자 예상대로 모두의 굳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고, 진승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야지. 기왕 놀러 온 건데 기분 좋게 놀아야 할 거 아냐.” 나도 따라 웃었다. 다만, 이번 사과는 내가 정말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느껴서 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더는 어떤 말도 덧붙이고 싶지 않을 만큼, 모든 게 허무하고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어김없이 테라스에 모여 술판을 벌였지만, 나는 혼자 방으로 들어와 차분히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원래 일주일로 예정되어 있던 이번 여행은 이제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더 이상 그들의 장단에 맞춰 놀아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다음 날 아침 가장 일찍 출발하는 돌아가는 표를 예매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휴대폰 충전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낮에 임유미가 슬쩍 빌려 갔던 게 생각나 그녀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태블릿 화면이 환하게 켜지며 새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단톡방 이름은 ‘다섯이서 영원히'였다. 진승현이 영상 하나를 올렸는데, 정확히 어제 윤경찬과 임유미가 키스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아래로는 온통 장난스럽게 낄낄거리는 이모티콘들이 가득 도배되어 있었다. [드디어 키스했네.] [거봐 내 작전 통한다고 했잖아.] [서다인 얼굴 하얗게 질렸던데 그걸 또 참고 있더라.] [진짜 가식 쩐다.] 제4화 침대 머리맡에 서 있던 내 손끝이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갔다. 오직 나만 쏙 빠져 있는, 그들만의 단체 채팅방이었다. 화면을 터치해 대화 내역을 가장 위로 끌어올리자, 3개월 전 작성된 첫 기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유미가 올린 ‘커플 체인지 게임’ 캡처 사진이었다. [서다인은 항상 우리 무리에 어울릴 수 있다고 장담하잖아?] [그럼 과연 몇 라운드까지 견디나 테스트나 해보자.] 바로 밑에는 주우빈이 보낸 답장이 이어져 있었다. [다인이 카드는 전부 꽝으로 채워놓자.] 뒤이어 진승현도 신이 난 듯 거들었다. [경찬이랑 유미 카드는 똑같이 맞추고.] [손잡기, 안아주기부터 키스까지 가버리면 아주 자극적이겠는데.] 대화 내역을 차례로 내려 읽는 동안, 윤경찬은 초반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짧은 메시지 하나를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너무 선 넘진 마.] 나는 화면 속 그 글자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적어도 그가 이 잔인한 장난을 말리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잠시 품었다. 하지만 윤경찬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다인 걔, 쓸데없이 진지하잖아.] [당장 결혼식 준비도 걔가 다 해야 하는데 진짜로 빈정 상해서 떠나게 만들진 말고.] 진승현이 빵 터진 이모티콘을 보냈다. [걱정 마, 걔 너 절대 못 떠나.] [하긴.] 윤경찬의 그 짧은 대답 하나에, 마치 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이 덮쳐왔다. 그 역시 이 모든 판이 나 한 사람을 철저히 바보로 만들기 위한 연극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상자 속 카드가 모조리 빈 카드였다는 사실도, 일행 모두가 코너에 몰린 나를 구경하려고 기다렸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미련스러울 정도로 이 모든 걸 참아낼 것이라는 사실까지 싹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 유일한 걱정은, 친구들이 너무 선을 넘는 바람에 내가 삐쳐서 제 결혼식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봐, 오직 그뿐이었다. 대화 내역을 계속 아래로 내려 보자, 그 뒤로 이어진 건 이번 여행 일정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정성껏 짜서 공유한 스케줄 표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더니, 이 다섯 명만 모인 단톡방은 마치 잔칫집이라도 된 양 시끌벅적했다. [다인이 짠 다이빙 코스 진짜 노잼이다.] [유미 물 무서워하잖아, 요트 파티로 바꾸자.] 그때 윤경찬이 말했다. [다인한테 미리 말해줄 필요 없어. 현장에서 바꿔도 걔는 꼼짝없이 따를 테니까.] 심지어 그들은 호텔 방 배정까지 이미 자기들끼리 완벽하게 작당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경찬이랑 유미는 패밀리 스위트룸 쓰게 하자.] [서다인은?] [소파 베드에서 재우면 되지.] [걔가 안 눕겠다고 버티면 어쩌지?] 윤경찬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살짝 달래면 다 들을 거야.] 임유미의 방 안에 홀로 선 채, 나는 순간 턱 끝이 턱 막혀 오는 듯한 호흡 곤란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내가 그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이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그들에게 잘해 주려 애썼다. 각자의 취향을 하나하나 외우고, 선을 넘는 짓궂은 장난도 꾹 참으며 웃어넘겼고, 피곤하고 궂은 뒤치다꺼리는 모조리 자처해서 떠안았다. 하지만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부족해서 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저들은 처음부터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문 안쪽에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문밖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을 구경하며 멍청해서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고 킥킥거리면서 말이다. 그때, 잠잠하던 단톡방에 불쑥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우빈이 물었다. [서다인 지금 어디 있냐?] 진승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장을 보내왔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찔찔 짜고 있겠지. 뭐.] [다음 라운드 진도 마저 뺄까?] 그러자 임유미가 곧바로 음성 메시지 하나를 전송해 왔다. “이제 그만하자. 다인이 진짜 화난 것 같아.” 그러자 윤경찬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화났으면 혼자서 삭히라고 해. 매번 누군가 기분 맞춰줘야 하는 것도 골치 아파.” 귓가를 때리는 그의 무심한 목소리에,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차갑게 식어 내렸다. 태블릿 화면을 꺼 버리려던 바로 그 찰나, 채팅방에 새로운 동영상 하나가 툭 떠올랐다. 진승현이 몰래 촬영한 영상이었다. 화면 속 테라스에는 윤경찬과 임유미 단둘만 남아 있었는데 술에 취한 임유미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나지막이 묻고 있었다. “경찬아, 만약에 그때 내가 너한테 거절 안 했다면 말이야. 너, 그래도 다인이랑 사귀었을까?” 내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밤바람이 귓가를 찢을 듯 매섭게 불어왔고 영상 속의 윤경찬은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낮게 깔린 목소리로 툭 뱉어냈다. “아니.” 임유미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가에서는 눈물 한줄기가 툭 떨어졌다. “그럼 너 지금 후회 안 해?” 윤경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임유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미 수많은 것을 대답해 주고 있었다. 몰래 찍힌 영상은 거기서 뚝 끊겼다. 대화방엔 몇 초간 짧은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진승현이 메시지 하나를 툭 던졌다. [내가 뭐랬어, 너희 둘이 진짜 짝이라니까.] 주우빈도 덩달아 거들었다. [서다인 걔가 원래 중간에 끼어든 거잖아.] [유미 자리를 그렇게 오래 차지했으면 이제 돌려줄 때도 됐지.] 순간, 귓속이 이명이라도 들리는 것처럼 먹먹하게 웅웅거렸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윤경찬과 무려 7년을 사귀고 결혼까지 약속한 내가 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뻔뻔하게 비집고 들어온 제3자였던 것이다. 나는 태블릿을 끄고 충전기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았다. 하지만 굳이 따져 묻지도 않았고, 당장 테라스로 뛰쳐나가지도 않았다. 내가 확인해야 할 대답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분명했으니까.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예약해 둔 항공권을 당일 밤 마지막 비행기로 앞당겨 변경했다. 아직 두 시간이 남았으니 내가 떠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애초에 이 여섯 명의 여행 속에 나 하나 온전히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거라면,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두 번 다시 저들을 위한 자리는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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