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GoodNovel 완결

나와 절친한 벗은 경성의 귀한 집안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성정이 정반대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혼례복을 세 번이나 찢어 버릴 만큼 혼인을 거부했고, 명문가들 사이에서는 혼인할 뜻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불문에 귀의해 평생을 보내겠다고 맹세했다. 반면 나는 몰락한 후작 가문의 세자와 팔 년째 혼약을 이어 오며, 어른들 눈에는 더없이 얌전하고 반듯한 예비 신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궁중 국화 연회에서 그녀가 술기운을 빌려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내가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구나.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수 음식을 지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이런 성정까지 이해해 주니 참으로 기쁘구나." 나는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축복했다. "네가 원한다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빌어 주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꽃가지를 마음에 둔 사내에게 건네게 했다. 그때 병풍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줄 알고, 곁채에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내가 팔 년을 기다렸고 다음 달이면 나를 부인으로 맞이할 세자였다. 늘 자유만을 바라던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줄 사람을 찾은 뒤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나니, 결국 홀로 남은 것은 나였다. 돌이켜 보니, 지난 팔 년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했다.

챕터 (1)

第1章

나와 절친한 벗은 경성의 귀한 집안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성정이 정반대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혼례복을 세 번이나 찢어 버릴 만큼 혼인을 거부했고, 명문가들 사이에서는 혼인할 뜻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불문에 귀의해 평생을 보내겠다고 맹세했다. 반면 나는 몰락한 후작 가문의 세자와 팔 년째 혼약을 이어 오며, 어른들 눈에는 더없이 얌전하고 반듯한 예비 신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궁중 국화 연회에서 그녀가 술기운을 빌려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내가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구나.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수 음식을 지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이런 성정까지 이해해 주니 참으로 기쁘구나." 나는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축복했다. "네가 원한다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빌어 주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꽃가지를 마음에 둔 사내에게 건네게 했다. 그때 병풍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줄 알고, 곁채에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내가 팔 년을 기다렸고 다음 달이면 나를 부인으로 맞이할 세자였다. 늘 자유만을 바라던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줄 사람을 찾은 뒤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나니, 결국 홀로 남은 것은 나였다. 돌이켜 보니, 지난 팔 년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했다. 제1장 김연우가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흰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고, 옷깃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단정했다. 나를 본 순간 그의 걸음이 잠시 멎었다. 하지만 이내 동요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임지헌의 손에서 꽃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술이 깬 듯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황급히 내 소매를 붙잡았다. "서윤아, 내가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렸다. 그저 너와 연우의 사이가 굳건한 게 부러워서 해서는 안 될 착각을 했을 뿐이다." 연우라는 이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었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방금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수 밥을 지어 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마음도 착각이었느냐?" 임지헌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연우가 한 걸음 옆으로 나서며 그녀를 등 뒤로 감쌌다. "지헌이가 술을 못 마시는 걸 뻔히 알면서 어찌 말리지 않았느냐?"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연회에서 술을 직접 따른 사람은 임지헌이었다. 모처럼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났으니,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즐기고 싶다고 했다. 김연우는 내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손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내가 살짝 피하자 그는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거뒀다. "사람이 많으니 일을 크게 만들지 말거라. 돌아가면 내가 설명하마." 그 말은 팔 년 전과 똑같았다. 당시 후작가가 죄에 연루되자 찾아오던 손님들의 발길이 모두 끊겼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파혼하라고 권했다. 열다섯 살의 김연우는 박씨 가문 저택 앞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은 뒤, 오래되어 닳은 옥 장식 하나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금 아무도 나를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를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이 혼약으로 평생 네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게 하겠다." 나는 팔 년을 기다렸다. 그가 다시 세자의 옷을 입는 날까지 기다렸고, 점점 내 체면을 내세워 다른 여인을 감싸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임지헌이 김연우의 뒤에서 손을 뻗어 다시 나를 붙잡으려 했다. "네가 마음에 걸린다면 앞으로는 연우를 만나지 않을게. 부디 나 때문에 혼사를 망치지는 말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김연우는 곧바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부축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사람을 불러 술을 깨는 탕약을 가져오라 했다. 임지헌이 제대로 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에는 이미 짜증이 묻어 있었다. "지헌이는 본래 자유분방한 성정이라 서러운 일을 잘 견디지 못한다. 넌 앞으로 정실이 될 사람이니 사람을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지헌이.' 나는 그가 나를 서윤이라 부르는 것도 들어 봤고, 병으로 정신이 흐릿할 때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들어 봤다. 그때는 호칭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길도 오래 걷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닿는구나.' "알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꽃가지를 주워 탁자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김연우는 골치 아픈 일이 마침내 무사히 정리된 듯 미간을 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임지헌을 연회 자리로 돌려보낸 뒤 직접 나와 함께 궁을 나섰다. 마차 안에서 그가 비단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며칠 전 네 생일에 밖에서 볼일을 보느라 돌아오지 못했다. 이 비녀는 선물이다." 상자 안에는 백옥으로 만든 매화 비녀가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비단함에서 은은한 침향 냄새가 풍겼다. 임지헌이 평소 침향이 든 연지와 분을 즐겨 쓴다는 사실은 경성의 귀한 집안 아가씨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상자를 닫아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직접 고르신 것입니까?" 김연우는 비단 상자를 힐끗 보았다. "마침 지헌이가 상점에 있었다. 이런 것은 나보다 보는 눈이 좋으니 말이다." 마차 바퀴가 궁궐 길을 지날 때마다 상자 속의 옥비녀가 가볍게 부딪혔다. 그는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것을 기억해 선물을 준비했지만, 그것을 고르는 일조차 다른 여인의 손을 빌렸다. "혼례 전 한 달 동안은 지헌이와 단둘이 만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가 그에게 내어 준 마지막 기회였다. 김연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바람에 들린 마차 휘장을 여며 주었다. "알아서 잘 처신할 테니 너도 지헌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거라." 나는 비단 상자를 자리에 남겨 둔 채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김연우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서윤아, 비녀 하나 가지고 어찌 그리 따지는 것이냐?"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자께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면, 소중히 여길 사람에게 주십시오." 제2장 혼례까지는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후작가의 살림을 맡은 곳에서 지출 목록 세 권을 보내왔다. 혼례용 초와 연회 음식, 비단은 물론 사당을 새로 칠하는 비용까지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는 여느 때처럼 박씨 가문의 사재로 지불한다고 적혀 있었다. 지난 팔 년 동안 이 문구를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날 나는 혼례복 치수를 적은 종이를 들고 포목점으로 향했다. 주인이 막 나를 맞으려던 순간, 위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어 한다면 값은 더 따지지 말거라." 별실에는 화려한 선홍빛 옷 한 벌이 펼쳐져 있었다. 금실로 수많은 새가 봉황을 향해 날아드는 문양을 수놓아, 촛불이 비치자 온 방이 눈부시게 빛났다. 황실 여인만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었다. 임지헌은 옷걸이 옆에 서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저는 평생 혼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저 혼례복 한 벌을 간직하며 위안으로 삼고 싶을 뿐입니다. 서윤이가 알게 되면 제가 분수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김연우가 나의 상단 패를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 "서윤이는 이 정도 돈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밖에 잠시 서 있다가 문을 열었다. 김연우가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상단 패를 쥐고 있었다. "마침 잘 왔구나. 지헌이가 이 옷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우선 네 장부에 외상으로 올려 두었다. 나중에 갚으마." 임지헌은 황급히 겉옷을 가져와 화려한 옷을 가리려 했다. 나는 옷걸이 앞으로 다가가 촘촘하게 놓인 금실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삼천 냥, 평범한 집안이라면 몇 대에 걸쳐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고, 후작가의 반년 치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주인장, 드리거라." 임지헌이 굳어 버렸다. 나는 사람을 시켜 붉은 종이를 가져오게 한 뒤 직접 선물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 "임지헌 아가씨께서 혼례복을 갖고 싶으시다니, 이 삼천 냥은 제가 미리 드리는 혼례 선물로 하겠습니다. 훗날 정말 혼인하고 싶은 분을 만나더라도 남의 부군과 함께 혼례복을 고를 필요는 없겠지요." 임지헌의 창백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연우가 장부를 덮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만해라." 그는 겉옷을 들어 그 옷을 덮었다. 내가 장부만이 아니라 임지헌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상처까지 들춰낸 셈이었다. "지헌이는 어려서부터 온갖 규율에 얽매여 살았다. 이제야 겨우 자유롭게 살게 되었는데 어찌 돈으로 모욕하는 것이냐?"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상단 패를 바라보았다. "제 돈입니다." "우리는 다음 달이면 혼인할 사이인데, 어찌 네 것과 내 것을 따지는 것이냐?" 김연우가 상단 패를 내게 돌려주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가의 사정이 나아지면 내가 갚으마. 오늘은 사람들도 보고 있으니 지헌이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거라." "후작가에서 지난 삼 년간 지출한 내역을 모두 박씨 가문으로 보내거라. 오늘부터 내 인장이 없으면 상단 장부에 그 어떤 외상도 올리지 못하게 하거라." 김연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혼례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장부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냐? 온 경성 사람들이 후작가를 비웃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나는 상단 패를 소매 안에 넣었다. "그저 지난 팔 년 동안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먹여 살렸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임지헌은 입술을 깨물고 병풍 뒤로 들어갔다. 김연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박서윤, 너는 돈밖에 모르니 지헌이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고충을 이해할 리 없겠지." 창밖에서는 사람들이 비단을 나르고 있었고,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김연우가 몰락했을 때 박씨 가문의 상점에서 장부 보는 법을 배웠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주판을 잘못 튕겼던 날,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한 항목씩 손익을 가려 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그는 계산할 줄 알게 되었다. 다만 내가 베푼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임지헌이 쓴 돈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듯 여길 뿐이었다. 나는 돌아서기 전 탁자 위에 놓인 혼례복 치수표를 챙겼다. "세자의 혼례복은 더 이상 맡지 않겠습니다." 그는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박씨 가문을 따라 경성으로 올라온 세 명의 나이 든 상인을 불러, 그동안 후작가에 들어간 은전과 증서를 모두 펼쳐 놓았다. 당장 모든 돈을 거둬들이지는 않았고 먼저 아직 지급되지 않은 자금부터 끊었다. 상단 패를 회수하고, 후작가의 이름으로 외상 거래한 장부도 따로 정리해 봉해 두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혼례복 도안은 여전히 탁자 한쪽에 놓여 있었다. 일곱 번이나 고쳐 만든 도안이었다. 김연우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옷깃에는 구름무늬만 수놓기로 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 장부 가장 아래에 넣어 두었다. 그때 한 주인장 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후작가에서 겨울에 쓸 은전을 받으러 오면 어찌 합니까?" 나는 내 인장을 힘주어 찍었다. "박씨 가문은 후작가의 곳간이 아니라고 전하거라." 선명한 붉은 인주가 종이 위에 찍혔다. 팔 년이나 늦게서야 지출을 막은 셈이다. 제3장 첫눈이 내리던 날, 노부인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졌다. 노부인은 평소 나를 무척 아껴 주셨다. 나는 꼬박 사흘 동안 침상 곁을 지켰고 탕약을 몇 번이나 새로 달여 올리면서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사흘째 되는 밤, 김연우가 마침내 후작 가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침상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나는 것을 본 그는 손을 뻗어 내 팔을 받쳐 주었다. 손길은 따뜻하고 든든했다. "두 시진이라도 가서 쉬거라. 오늘 밤은 내가 할머니 곁을 지키마."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의께서 오늘 밤이 고비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김연우가 내 겉옷을 여며 주었다. "알고 있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에 있으마." 내가 막 바깥방으로 나왔을 때, 성 밖 산장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채 나타난 사내가 흠뻑 젖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임지헌이 홀로 산에 설경을 보러 갔다가 수행원들과 헤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쪽지 끝에는 임지헌이 직접 쓴 문장이 있었다. "이 설경도 세자와 함께 보지 못한다면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김연우는 쪽지를 읽자마자 벽에 걸린 두꺼운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나는 문 앞을 막아섰다. "후작 가문에는 호위도 있고 산길을 잘 아는 사냥꾼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내십시오." "지헌이는 어둠을 무서워하고, 일이 생기면 쉽게 당황한다." 그는 손목 보호대를 단단히 동여매며 사람을 불러 말을 준비하라 명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힘이 너무 약해 옷자락에는 옅은 주름 하나만 잡혔다. "할머니께서 조금 전에도 세자를 찾으셨습니다. 오늘 밤 이곳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김연우는 고개를 숙여 밤샘으로 붉어진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내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사람만 찾으면 곧 돌아오마. 약이 식기 전에는 반드시 돌아오겠다." 약그릇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차가운 눈바람이 함께 밀려들었다. 문이 닫히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사라졌다. 나는 세 무리의 사람을 보내 그를 뒤쫓게 하고, 집사에게 밤새 성 밖 역참으로 이어지는 길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노부인은 두 번이나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고 그때마다 문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노부인의 손이 내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약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김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다. 목이 꽉 막혀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집사가 어찌해야 할지 묻기에 나는 하나씩 지시했다. 가문의 어른들을 모시고, 저택의 문을 닫고, 수의를 준비하고, 흰 깃발을 내걸게 했다. 대청이 온통 흰 천으로 덮이고 나서야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김연우가 임지헌을 안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임지헌은 발목에 천을 감고 있었고, 김연우의 두꺼운 외투에 빈틈없이 싸여 있어 창백한 얼굴만 드러나 있었다. 김연우의 미간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고, 어깨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있었다. 임지헌은 상을 알리는 흰 깃발을 보자 몸을 떨었다. 김연우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나는 그가 적어도 먼저 들어가 노부인을 뵐 줄 알았다. 그러나 가문의 어른들이 가득 모인 대청을 본 김연우는 내게 먼저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셨는데 어찌 아무도 내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나는 소매에서 후작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적어 보낸 세 개의 패를 꺼내 영전에 올려놓았다. "세 무리의 사람을 보냈습니다. 한 무리는 성문 밖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고, 두 무리는 산에 들어가 세자를 찾았습니다. 너무 멀리 가셔서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김연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더 보냈어야 하지 않느냐.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조차 뵙지 못했으니 남들이 나를 어찌 보겠느냐?" 그의 품에 안긴 임지헌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저를 찾으러 오지만 않으셨다면 세자께서 불효자라는 오명을 쓰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김연우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네 탓이 아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영전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고 눈앞마저 캄캄해졌다. 김연우가 나를 부축하려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임지헌이 발을 땅에 딛자마자 아픈 듯 낮게 신음했고, 그의 걸음은 그대로 멈췄다. 팔 년을 서로 의지하며 버텨 온 세월도 한 번의 눈보라를 이기지 못했다. 노부인은 임종을 앞두고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문만 바라보며 몇 번이고 김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몸을 돌려 집사에게 명했다. "혼례에 쓰려던 붉은 비단은 모두 걷고 혼사는 법도에 따라 삼 년 뒤로 미루겠다. 그리고 노부인의 장례는 모두 검소하게 치르거라." 김연우는 그제야 임지헌을 시녀에게 맡기고 성큼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섰다. "후작 가문은 지금 삼 년을 버틸 형편이 아니다. 혼사를 어찌할지는 장례가 끝난 뒤 다시 논하자." 나는 그의 옷깃에 남은 임지헌의 눈물 자국을 바라보았다. "세자께서는 먼저 노부인을 뵈러 가십시오. 노부인께서는 이제 더는 세자를 기다리실 수 없습니다." 제4장 노부인을 장지에 모신 지 이레째 되던 날, 후작 가문의 채권자들이 측문까지 몰려왔다. 박씨 가문에서 대 주던 자금이 끊기자, 그동안 감춰져 있던 후작 가문의 문제들을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연우는 며칠째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나를 찾아왔을 때도 옷매무새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상중에 백일 안으로 혼례를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네가 시집오기를 가장 바라셨다. 백일 안에 혼례를 올린다면 할머니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후작 가문이 삼 년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김연우는 잠시 침묵하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 "둘 다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솔직한 대답이었다. "서윤아, 후작 가문에 네 혼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내가 너와 혼인하려는 것이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팔 년 동안 혼약을 이어 오면서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삼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임지헌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헌이는 후작 가문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김연우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지헌이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니 명분을 줄 수는 없다. 내가 세자빈으로 정한 사람은 너다. 그것만큼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붓을 들어 혼례 날짜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 김연우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이내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혼인하고 나면 우리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빼지 않고 그의 손목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바라보았다. 그가 열아홉 살이던 해, 날뛰는 말을 막아 나를 지키다가 생긴 흉터였다. 상처가 가장 깊었을 때 그는 밤새 고통에 떨면서도 내게 알리지 못하게 했다. 과거의 김연우도 진심이었다. 내 남은 생을 바쳐 후작 가문의 빚을 메우게 하고, 다른 여인과의 관계마저 받아들이게 하려는 지금의 김연우 역시 그의 진심이었다. 혼례일은 섣달 초엿새로 정해졌다. 혼례 당일, 박씨 가문의 혼수 행렬이 십 리에 걸쳐 이어지자 온 경성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내 혼수는 거리에서부터 후작 가문 대문 앞까지 끝없이 늘어섰고, 사람들은 모두 팔 년의 혼약이 마침내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도 혼수 상자 밑에 박씨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관아의 인장이 찍힌 파혼 문서가 내 소매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혼례청에서 김연우는 붉은 비단의 한쪽 끝을 잡고 있었다. 주렴에 가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붉은 비단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만 느껴졌다. 팔 년 전, 그는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내 손을 잡고 빠져나오면서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하늘과 땅에 절을 올리고 합근주까지 따랐을 때, 별원의 시녀가 갑자기 뛰어 들어와 유서 한 통을 내밀었다. 임지헌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편지에 남의 혼인을 망칠 수 없으니 이제부터 절에 들어가 불도를 닦으며, 다시는 우리와 만나지 않겠다고 적었다. 김연우는 편지를 다 읽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편지지를 구겼다. 나는 술잔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술잔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가서 지헌이를 데려오겠다. 서윤아, 너는 늘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혼례청을 가득 메운 하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나는 주렴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붉은 비단을 힘껏 움켜쥐었다. "이 문을 나가신다면 오늘 혼례는 더 이상 이어 가지 않겠습니다." 김연우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내가 이토록 분명하게 결단을 요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돌려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지헌이는 지금 홀로 있다. 네 곁에는 가족도, 친우도, 하객들도 있지 않느냐. 어찌 하필 이런 때에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냐?" 붉은 비단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결국 그는 혼례복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 문턱을 넘어갔다. 혼례청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용과 봉황이 새겨진 혼례 초는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잡고 있지 않은 붉은 비단의 한쪽 끝을 바라보다 웃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봉황관을 벗어 합근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에서 관아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꺼내 펼쳐 혼례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자께서 다른 여인을 위해 혼례를 멈추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 혼례는 끝까지 치러지지 않았으니 부부의 연 또한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부로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후작 가문의 어른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혼수 행렬을 막으려 했다. 내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이미 저택 안으로 들어온 혼수 상자를 들고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박씨 가문의 호위들이 양옆을 지키자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후작 가문에 넘겼던 전답 문서와 은전 증서, 상점 문서까지 그날 밤 모두 거둬들였다. 내가 김연우에게서 되찾은 것은 십 리에 달하는 혼수만이 아니었다. 팔 년 동안 쏟아부은 기다림과 이해, 그가 당연하게 여겼던 수많은 양보까지 모두 거두어들였다.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팔 년 동안 손목에 차고 있던 붉은 끈을 잘라 후작 가문 문턱 위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세자께서 누구와 혼인하시든, 제가 누구와 혼인하든 서로 아무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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