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장례길을 막은 세자

GoodNovel new 완결

온 경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영안후부 세자 이도현과 윤씨 가문의 장녀 윤서하가 둘도 없이 잘 어울리는 소꿉친구라는 것을. 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화제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 나누었던 풋풋한 정이 아니었다. 오늘은 세자와 윤서하의 이복동생 윤채원의 혼례 날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윤서하 어머니의 장례 날이기도 했다. 혼례 행렬은 동쪽 거리로 들어섰고, 장례 행렬은 서쪽 거리에서 나왔다. 대량(大樑)의 예법에 따르면 장례가 혼례보다 우선이었다. 혼례 행렬이 장례 행렬과 마주치면 길을 바꾸거나 물러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혼례 행렬로 주작 거리 전체를 막아 버렸다.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피리 소리는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결국 윤씨 가문의 장례 행렬은 그의 혼례 행렬 앞에서 밀려나 억지로 골목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상복을 입은 채 어머니의 관을 부축하며 따라가던 윤서하는 막힌 골목 앞에 발이 묶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챕터 (1)

第1章

온 경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영안후부 세자 이도현과 윤씨 가문의 장녀 윤서하가 둘도 없이 잘 어울리는 소꿉친구라는 것을. 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화제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 나누었던 풋풋한 정이 아니었다. 오늘은 세자와 윤서하의 이복동생 윤채원의 혼례 날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윤서하 어머니의 장례 날이기도 했다. 혼례 행렬은 동쪽 거리로 들어섰고, 장례 행렬은 서쪽 거리에서 나왔다. 대량(大樑)의 예법에 따르면 장례가 혼례보다 우선이었다. 혼례 행렬이 장례 행렬과 마주치면 길을 바꾸거나 물러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혼례 행렬로 주작 거리 전체를 막아 버렸다.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피리 소리는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결국 윤씨 가문의 장례 행렬은 그의 혼례 행렬 앞에서 밀려나 억지로 골목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상복을 입은 채 어머니의 관을 부축하며 따라가던 윤서하는 막힌 골목 앞에 발이 묶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제1장 이도현은 붉은 혼례복을 걸친 채 큰 말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윤서하를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입은 거친 상복으로 시선을 옮기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윤서하, 오늘은 내 혼례일이다. 상복을 입고 길을 막은 의도가 무엇이냐?" 윤서하는 관을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도현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 눈에 거슬리는 상복을 벗겨라." 호위 두 명이 명을 받고 앞으로 나섰다. 윤서하는 황급히 한 걸음 물러나 옷깃을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고?" 이도현이 차갑게 웃었다. "상복을 입고 내 혼례를 방해한 네게 불경죄를 묻지 않고 봐준 것만도 충분하다. 벗겨라!" 호위들이 양쪽에서 윤서하의 팔을 붙잡았다. 윤서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상복의 거친 천이 거센 손길에 찢겨 나갔다. 시녀 다은이 윤서하를 지키려 달려들었지만, 거칠게 밀쳐져 바닥에 쓰러졌다. 거친 상복이 강제로 벗겨지면서 안에 입은 옅은 푸른 속옷이 드러났다. 오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윤서하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떨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보다 못한 어르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곁에 있던 여인이 얼른 그를 붙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어르신, 조용히 하십시오! 윤서하 아가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십니까? 예전에 세자 저하의 친동생인 이서린 아가씨를 죽인 사람이 바로 저 여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 윤서하 아가씨를 가엾게 여겨 후부로 데려가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허나 윤서하 아가씨가 그곳에서 한 달을 지내자 후작 부인이 독에 중독됐습니다. 어의의 말로는 날마다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합니다. 후작 부인의 음식에 매일 손을 대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은 윤서하 아가씨뿐이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후작 부인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동생과 어머니, 두 사람을 죽였으니 증거도 확실합니다. 대량의 법대로라면 목을 베어도 죄를 다 갚지 못합니다." 어르신이 멍하니 물었다. "헌데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가?" 여인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모두 저 여인의 어머니 때문입니다. 그녀의 어머니 김씨가 후부 문 앞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가 날 때까지 빌었다고 합니다. 윤씨 집안이 대대로 충성스러운 가문이라는 점과 딸이 세자 저하와 십삼 년 동안 함께 자란 사이라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했답니다. 나중에는 시녀 하나를 끌어와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고서야 사건이 끝났습니다." 이도현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다은은 바닥에 눌린 채 입가에 피를 묻힌 채,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윤채원, 그 못된 여인이 우리 아가씨에게 누명을 씌운 겁니다." 그러자 이도현이 차갑게 명령했다. "입을 막아라." 이도현은 말에서 내렸다. 붉은 혼례복 자락이 바닥을 스쳤고 그는 윤서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앞에 멈춰 서서 내려다보자, 그림자가 윤서하의 온몸을 뒤덮었다. "윤서하. 할 말이 없느냐?" 이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윤서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입을 열었다. "수백 번, 수천 번 결백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한 번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도현은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었고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는 곧 소매 안에서 누렇게 바랜 서류 한 묶음을 꺼내 윤서하의 얼굴에 세게 내던졌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는 당시 호수에서 벌어진 사건과 후작 부인 독살 사건의 판결문이었다. 이도현은 증오로 가득한 두 눈으로 윤서하를 바라보며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믿지 않았다고? 증거가 확실한데도 네 어머니가 사흘 밤낮을 무릎 꿇어 겨우 살려 두었건만, 끝까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구나." 윤서하는 바닥에 흩어진 판결문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도현은 몸을 바로 세우고 그녀 뒤의 관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오늘이 네 어머니의 장례일이라고? 잘됐군. 이 관 안에 정말 시신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그는 거침없이 관으로 다가갔다. 윤서하는 황급히 달려들어 온몸으로 관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관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고인의 안식을 방해하면 편히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관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빛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제2장 가마의 휘장이 갑자기 안쪽에서 걷혔다. 윤채원이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봉황관의 장식 술이 옆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윤채원은 옅은 푸른빛 속옷 차림으로 바닥에 무릎 꿇은 윤서하를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부군, 언니께서 오늘 저런 모습으로 계시니 가마 안에 앉아 있는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도현은 윤채원을 돌아보며 한결 부드럽게 말했다. "편히 앉아 있거라. 밖의 일은 내가 처리하마." 윤채원은 입술을 깨물고 윤서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집을 나오기 전에 부인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허나 부인께서는 제가 예법도 모르고 혼인한 뒤에도 몸가짐을 삼갈 줄 모른다며 꾸짖으셨습니다. 집에 있을 때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으니, 이제 관 앞에서라도 작별 인사와 오랫동안 길러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윤서하는 무릎을 꿇은 채 홱 고개를 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흘 전 어머니는 윤서하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윤서하는 직접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힌 뒤 관 뚜껑까지 닫았다. 윤채원은 말을 마치고 정말 가마 밖으로 나오려 했다. 윤서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이도현은 윤서하를 바라보며 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역시 그랬군. 윤서하, 방금 네 거짓말을 또 믿을 뻔했다." 그는 가마 쪽을 가리키며 매섭게 명령했다. "채원은 귀한 몸이라 땅을 밟게 할 수 없다. 윤서하, 엎드려 채원이 네 등을 밟고 내려오게 하거라." 윤서하는 홱 고개를 돌려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오늘 네가 거부하면 이 장례 행렬은 주작 거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순순히 엎드려 시키는 대로 하든지, 아니면..." 윤서하는 뒤에 놓인 어머니의 관을 돌아보았다. 아직 어머니를 편히 모셔 드리지 못했다. 윤서하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몸을 낮춘 채 등을 낮게 숙였다. 윤채원이 가마 밖으로 몸을 내밀자 붉은 혼례복 치맛자락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엎드린 윤서하를 내려다보았고,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언니, 미안합니다." 윤채원의 무게가 등에 실리자 윤서하의 몸이 조금 더 낮아졌다. 윤서하는 이를 악물고 무릎을 끌며 조금씩 어머니의 관 쪽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관 앞에 도착했다. 윤채원은 갑자기 소매에서 사탕 몇 알을 꺼내 태연한 얼굴로 관 뚜껑 위에 뿌렸다. "혼례 사탕입니다. 경사의 기운이나마 나누시지요." "너..." 윤서하는 일어서려 했지만 다친 무릎 때문에 휘청하며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 "어머!" 윤채원도 함께 휘청이자 붉은 혼례복을 입은 이도현이 말에서 재빨리 뛰어내려 그녀를 받아 안았다. 이도현은 윤채원의 허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윤서하, 오늘은 채원을 봐서 이만 용서해 주겠다." 그는 윤채원을 안고 가마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안에 내려놓았다. 이도현은 다시 말에 올라탔다. "이제 내 행렬 뒤를 따라오며 아흔아홉 번 절을 하거라. 모두 마치면 호위들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징과 북이 다시 울리고 붉은 비단이 휘날렸다. 폭죽이 터지면서 붉은 종잇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윤서하는 엎드린 채 돌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거리 위로 거듭 울렸다. 마지막 절을 마친 윤서하는 이마를 바닥에 댄 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마에서 배어 나온 피가 돌바닥 위로 번졌다. 다은이 울며 달려와 윤서하를 부축했다. "아가씨! 아가씨, 갑시다. 부인을 모시고 가야죠." 윤서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옅은 푸른빛 속옷에는 먼지와 핏자국이 가득했고, 무릎 부분은 크게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온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콧등을 타고 내려와 돌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모습으로 어머니를 어떻게 배웅하지?' 윤서하는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다은아, 먼저 가거라." 다은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런 모습으로 따라가면 저승에 계신 어머니께서 더 마음 아파하실 거다." 윤서하는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깨끗한 물과 천을 찾아 상처를 감싼 뒤 따라가마." 다은은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몸을 돌려 장례 행렬을 따라 천천히 떠났다. 윤서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밟혀 부서진 사탕 몇 알을 주워 손에 쥐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사탕 몇 알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제3장 윤서하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나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밧줄이 파고들어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호위 두 명이 양쪽에서 윤서하를 붙들었다. 거친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얼음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에 세게 처박았다. 윤서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의자가 삐걱거리고 수면 위로 물거품이 연이어 올라왔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가 깜깜해졌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윤서하는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 냈지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물속에 처박혔다. 몇 번이나 물속에 처박혔는지 알 수 없었다. 호위 한 명이 손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 세자 저하께서 아시면 벌을 내리실지도 몰라." 다른 호위는 그를 흘겨보며 창밖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창밖에서는 마침 불꽃 하나가 솟아올라 밤하늘을 밝혔다. 여러 겹의 담장 너머로 징과 북, 폭죽 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후부 전체가 혼례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호위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늘은 세자 저하께서 혼인하시는 날 아니냐. 앞으로 이 집안에서는 안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느냐?" 처음 말했던 호위는 잠시 멈칫하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윤서하의 머리를 다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뼛속까지 시린 얼음물에 잠긴 채 의식이 흐려지자, 윤서하는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불꽃이 터지는 밤이었다. 정월 대보름날, 윤서하는 이도현과 몰래 집을 빠져나와 경성(京城)에서 가장 높은 성루에 올라 온 경성을 수놓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푸른 도포를 입은 소년은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밤하늘의 불꽃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서하야, 내가 성인식을 치르면 윤씨 집안에 가서 청혼하마. 우리가 혼인하는 날에는 모두가 주목할 만큼 화려한 불꽃을 터뜨려 온 경성 사람에게 네가 나의 부인이라는 걸 알리겠다." 윤서하는 기쁜 마음으로 이도현이 붉은 혼례복을 입고 큰 말을 탄 채 성대한 의식으로 자신을 후부에 데려갈 날과 두 사람을 위한 불꽃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 이도현은 윤서하에게 약속했던 불꽃으로 다른 여인과의 혼인을 축하하고 있었다. 윤서하는 차가운 별채에 갇힌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눈물이 더욱 거세게 흘렀다. 윤서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입술을 세게 깨물어 울음소리를 참았다. 그러자 입가에 피 맛이 번졌다. 오해는 이미 너무 깊어졌고, 사람의 목숨까지 얽힌 원한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이도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걸음도 조금 비틀거렸다. 이도현은 의자에 묶여 있는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의자 다리를 따라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서하에게 다가와 쪼그려 앉은 뒤, 턱을 움켜쥐고 뼈가 으스러질 듯 세게 힘을 주었다. "예전에 내 동생이 죽을 때도 이렇게 고통스러웠겠지?" 이도현의 낮고 잠긴 목소리와 함께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눈물이 윤서하의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려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때 호위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마당에 뛰어들어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저하! 큰일 났습니다! 오늘 밤 터뜨린 불꽃에 화약을 너무 많이 넣어, 그중 하나가 낮에 윤씨 집안의 장례 행렬이 머물렀던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불길이 번져 장례 물품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서하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곳은 어머니의 장례 행렬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윤서하는 온몸을 떨며 이도현에게 달려들어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가게 해 주십시오! 제발 어서 보내 주십시오! 그곳에 어머니의 관이 있습니다!" 이도현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윤서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제법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군. 채원은 네 어머니가 무사히 방 안에 계셨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도현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현장까지 함께 가 주마. 윤서하. 네 말이 사실이라면 더는 묻지 않겠다. 거짓이라면 남은 평생 내 곁에 갇혀 한 걸음도 떠날 생각 하지 마라." ... 현장은 엉망이었다. 불은 꺼졌지만 사방에 탄 냄새가 가득했다. 뒤따르던 하인들과 관을 메던 일꾼들은 모두 다친 채 신음하고 있었다. 윤서하는 다은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한가운데 불에 타 새까맣게 변한 관에 멈춰 섰다. "어머니!" 윤서하는 정신없이 달려가 두 손으로 뜨거운 관 뚜껑을 밀어 올리려 했다. 잔열에 손바닥이 데어 붉게 달아올랐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온 힘을 다해 관 뚜껑을 열려 했다. 이도현은 그녀의 필사적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그는 뒤따라온 호위들에게 손짓했다. "가서 관 뚜껑을 열어라." 호위 두 명이 다가가 힘을 합쳤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탄 관 뚜껑이 완전히 열렸다. 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윤서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관 안을 더듬었지만, 밑바닥에는 불에 타버린 나뭇조각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도현은 천천히 다가와 텅 빈 관 안을 훑어본 뒤, 넋을 잃은 윤서하를 바라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윤서하, 한 번도 아니고 너를 믿으려 했던 내가 한심하군." 제4장 호위 두 명이 윤서하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운 뒤 영안후부로 끌고 갔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윤서하는 잠시 기다려 밖에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빈 관에서 꺼낸 쪽지는 땀에 젖어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윤서하는 쪽지를 등잔불 가까이 가져가 펼쳐 보았다. "부인의 관은 안전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다은과 윤씨 집안의 옛 하인들도 모두 무사합니다. 이레 뒤 아버지께서 사건 기록을 가지고 경성으로 돌아오시면 당시의 억울한 일도 진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만 견디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데리러 가겠습니다. 박시헌 올림." 윤서하는 쪽지를 등잔불에 가져다 댔다. 종이가 오그라들며 타들어 가자, 윤서하는 손바닥에 남은 재를 꽉 움켜쥐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마흔 남짓한 어멈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윤서하의 팔을 움켜쥐고 침상에서 끌어내렸다. "일어나거라! 작은 마님께서는 묘시면 아침상을 받으시는데, 혼인 때 따라온 시녀 주제에 감히 이때까지 자고 있느냐?" 어멈은 윤서하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네가 아직도 윤씨 집안의 큰아가씨인 줄 아느냐? 세자 저하께서 오늘부터 너를 작은 마님의 시녀로 삼으라 하셨다. 주방은 동쪽 별채에 있으니 썩 가거라!" 윤서하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주방에 들어서자 그곳을 맡은 어멈이 그릇을 한 무더기 떠안겼다. "씻거라. 작은 마님의 점심상에 쓸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러워서는 안 된다." 찬물에 손을 담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서하의 손이 벌겋게 변했다. 점심때가 되자 윤채원의 시녀 소희가 남은 밥 한 그릇을 들고 와 부뚜막에 내려놓았다. "작은 마님께서 오전 내내 고생한 언니를 굶기지는 말라 하셨다." 소희는 문틀에 기대어 웃으며 말했다. "먹지 않을 것이냐? 그러다 오후 일은 어찌 하려고?" 윤서하는 그릇을 들고 주방 한쪽에 놓인 통 앞으로 갔다. "이런 음식은 버리는 것이 낫겠구나." 윤서하는 밥을 버리고 빈 그릇을 부뚜막에 돌려놓았다. 웃고 있던 소희의 표정이 굳었다. 다음 날 아침, 어멈이 윤서하를 윤채원의 방으로 데려갔다. 윤채원은 화장대 앞에 앉아 구리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고 있었다. 윤서하가 들어오자 윤채원은 옅게 웃으며 곁에 있던 시녀들을 물렸다. "언니, 오셨습니까? 이리 와 제 머리를 빗어 주십시오." 윤서하는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윤채원은 화를 내지 않았다. 눈썹을 그리던 붓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고개를 기울인 채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으십니까? 예전에 윤씨 집안에서 언니는 머리를 가장 잘 빗지 않았습니까? 부인께서도 언니의 손재주를 칭찬하셨습니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윤서하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그녀는 윤채원에게 다가가 빗을 들었다. "언니의 손재주는 여전하군요." 윤채원은 거울을 보며 웃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손재주가 좋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니의 어머니도 손재주가 좋았고 평생 현숙한 여인으로 살았지만, 결국 비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윤서하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이냐?" 윤채원은 시선을 들어 거울 속 윤서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언니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했습니다. 살아서는 첩들에게 눌려 지냈고, 죽어서는 제대로 된 관 하나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니." 윤서하가 이성을 잃고 손을 들어 윤채원의 뺨을 후려치자 방 안에 짝 소리가 울렸다. 이도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윤채원은 눈물이 고인 채 이도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떨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부군. 언니께서 그저 심기가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윤채원은 일어나 이도현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언니를 탓하지 마십시오. 제가 언니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도현은 윤채원의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명령했다. "곤장 스무 대. 바로 여기서 때리거라." 호위들은 긴 나무 의자를 가져와 윤서하를 그 위에 눌렀다. 첫 곤장이 떨어지자 윤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번째 곤장이 이어지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윤서하가 열네 살이던 때였다. 윤씨 집안 뒷마당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다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고 상처에 입김을 불어 주며 말했다. "서하야, 겁내지 마라. 내가 불어 주면 아프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누구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마." 제5장 윤서하는 의식이 흐려지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옛집 마루에 앉아 수틀을 든 채 한 줄기에서 나란히 피어난 연꽃을 한 땀 한 땀 수놓고 있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어머니를 감쌌다. "어머니." 윤서하가 부르자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하야, 이리 오렴." 윤서하는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여기에 남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여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이내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얼굴도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찬물 한 대야가 윤서하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윤서하는 거칠게 기침하며 깨어났다. 바닥에 엎드린 채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등의 상처에 찬물이 닿자 심한 통증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향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방이었다. 윤채원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검푸른 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침상 앞에는 어의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이도현은 침상 발치에 서 있었다. 어의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하, 작은 마님의 독은 예전에 노부인의 독과 같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도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윤서하만 바라보았다. 어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무능하여 당시 후작 부인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해독약을 찾지 못하면 작은 마님은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도현은 윤서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몸을 낮춘 뒤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해독약은 어디 있느냐?" 윤서하는 그의 눈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도현은 한참 윤서하를 바라보다가 손을 놓고 일어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다른 어의가 약사발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세자 저하, 작은 마님께서 어제 드신 탕약에서 같은 독이 나왔습니다." "그 약은 누가 끓인 것이냐?" 그가 덤덤하게 묻자 어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세자 저하, 어제 작은 마님의 음식은 주방에서 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어제 윤서하 아가씨가..." 이도현이 고개를 기울여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네가 하지 않았다고, 독을 넣지 않았다고, 누명을 쓴 것이라고 하겠지?" 이도현은 혼잣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린이가 죽었을 때도, 내 어머니가 중독되셨을 때도 그랬지. 그때마다 네가 한 짓이 아니라며 너를 믿어 달라고 했었지."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너를 믿었다! 윤서하, 너를 믿었다고! 허나 매번 증언과 물증, 검시한 결과 모두 너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내가 어찌 너를 믿겠느냐?" 이도현은 몸을 돌려 더는 윤서하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람을 보내 성안에서 반드시 해독법을 찾거라. 이 독을 풀 수 있는 자에게 황금 천 냥을 내리겠다." 그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하가 안주인을 해치려 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 불당 앞에 사금파리를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리고, 채원을 위해 복을 빌고 경전을 베끼게 하라. 채원이 깨어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 호위들은 윤서하를 불당 앞으로 끌고 가 양쪽 어깨를 눌러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렸다. 사기 조각이 무릎을 파고들자 윤서하는 온몸을 크게 떨었고 입술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아랫입술을 악물었고 이가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누군가 종이와 붓을 윤서하 앞에 던졌다. "베끼거라." 윤서하는 경전을 한 글자씩 베껴 나갔다. 무릎에서 흐른 피가 치맛자락을 적시고 돌바닥 위로 검붉게 번졌다. 시간이 한참 흘러 불당 문이 열리고 이도현이 들어왔다. 그는 윤서하의 무릎 아래 고인 피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호위 두 명이 윤서하의 팔을 붙잡고 사기 조각 위에서 일으켰다. 무릎에 박힌 조각이 빠져나오며 살이 찢어졌다. 윤서하는 몸을 크게 떨었고 눈앞이 흐려졌다. "목에 칼을 씌워 주작 거리를 따라 일보일배로 채원의 회복을 빌게 하라." 호위가 윤서하의 등을 밀며 밖으로 데려갔다. 이도현의 곁을 지나던 윤서하가 비틀거리자 옷깃 한쪽이 벌어지며 옥패 하나가 빠져나와 가슴 앞에서 흔들렸다. 이도현은 그 옥패를 보고 시선을 멈추었다. 예전에 이도현의 어머니가 직접 두 사람에게 준 옥패였다. 이도현의 것은 청옥이고 윤서하의 것은 백옥으로, 두 개를 합치면 한 쌍의 원앙이 되었다. 이도현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차갑게 식은 이서린의 시신과 중독된 뒤 누렇게 변한 어머니의 얼굴, 지금 침상에서 숨이 끊어져 가는 윤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이도현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는 성큼 다가가 윤서하 가슴 앞의 옥패를 잡아당겼다. "안 됩니다!" 윤서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도현은 돌아보지 않은 채 옥패를 움켜쥐고 연못이 보이는 창가로 걸어갔다. "너는 더 이상 이것을 지닐 자격이 없다." 이도현이 백옥을 던지자 옥패는 달빛을 받으며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윤서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이 굳었다. 이도현은 윤서하에게 등을 보인 채 창가에 서 있었다. "데려가라." 목에 씌운 칼형틀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점점 멀어졌다. 이도현은 여전히 창가에 서서 연못을 바라보았다. 백옥은 이미 연못 밑으로 가라앉았고, 열네 살에 복숭아나무 아래서 청혼하러 와 달라던 윤서하도 함께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옷 안쪽에 감춰 둔 청옥을 만졌다. 호위 한 명이 문밖에서 급히 뛰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자 저하, 성 북쪽 흑수관(黑水關)에 서역 상단이 왔습니다. 파사에서 온 상단 주인이 어떤 독도 풀 수 있는 특별한 해독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도현이 돌아서며 물었다. "어디 있느냐?" 호위가 고개를 숙였다. "상단의 주인은 약을 내줄 수 있지만 금은도 벼슬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윤서하 아가씨를 달라고 합니다." 제6장 윤서하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이도현은 서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들이 윤서하의 양팔을 붙들고 데려오는 모습을 본 이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윤서하는 고개를 떨군 채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피가 번져 있었다. 이도현은 잠시 놀란 듯했다. 그는 한참 윤서하를 바라보다가 소매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성 북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청운관(青雲觀)이 있다. 그곳에 해독약이 있다. 내일 아침 사람을 붙여 줄 테니 약을 얻으면 비밀 호위들이 돌아오는 길을 지켜 줄 것이다." 이도현은 몸을 낮춰 종이를 윤서하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동안 벌은 충분히 받았다. 해독약을 가져와 채원의 독을 풀면 내게 진 빚도 조금은 갚은 셈으로 치마." 그는 일어서 윤서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부터는 다른 신분을 마련해 줄 테니 내 곁에 남아라." 윤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이도현은 눈을 돌리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잊지 마라. 네가 내게 진 빚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것이다." 이도현은 윤서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했다. "데려가 쉬게 하라. 내일 묘시에 가마를 준비해 청운관으로 보내거라." 다음 날 묘시, 날이 희미하게 밝아 왔다. 푸른 휘장을 친 작은 가마가 후부의 뒷문에 멈춰 있었다. 이도현은 문 앞에 서서 가마의 휘장이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해독약을 얻는 즉시 돌아오거라. 내 비밀 호위들이 뒤따를 것이니, 무사히 다녀오거라." 이른 아침이라 경성 거리에는 아직 행인이 많지 않았다. 가마가 주작 거리를 돌아 나가다 말을 급히 몰고 가던 관원 일행과 스쳐 지나갔다. 앞장선 중년 관원은 먼 길을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가마 안에 앉은 윤서하가 휘장을 살짝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데...' 하지만 너무 지친 탓에 윤서하는 더 생각하지 않고 휘장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저녁 무렵,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약 한 병을 가져와 이도현에게 건넸다. 반 시진 뒤 윤채원의 얼굴에 차츰 혈색이 돌고 입술의 검푸른 빛도 사라졌다. 맥을 짚은 어의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세자 저하, 독이 풀렸습니다. 작은 마님은 이제 괜찮습니다." 이도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에서도 마침내 힘이 풀렸다. 호위 한 명이 급히 뛰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자 저하! 형부시랑 박정환 대감이 경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정환 대감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궁에 들어가 폐하를 알현한 뒤 곧장 형부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서린 아가씨 익사 사건과 후부의 노부인 중독 사건의 기록을 모두 꺼내 보았습니다." 이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라?" 호위는 이도현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형부에서 전해 온 말로는 박정환 대감이 두 사건을 다시 조사한다고 합니다. 당시 사건에 숨겨진 사정이 있어 이틀 뒤 재판을 열어 다시 판결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두 사건은 확실한 증거와 증인, 물증까지 모두 갖춰져 이미 결론이 난 일인데 어찌 갑자기 다시 판결한다는 말인가?’ 이도현은 제자리에 선 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이도현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윤서하는 어디 있느냐?" 그제야 윤서하를 지키라고 보낸 비밀 호위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놀라 외쳤다. "세자 저하! 작은 마님께서..." 이도현은 놀라 급히 돌아섰다. 윤채원은 침상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 검은 피를 토했고, 곧장 베개를 적셨다. 얼굴은 중독되기 전보다 더 창백했다. 이도현은 침상으로 성큼 달려갔다. "어찌 된 일이냐? 독은 풀리지 않았느냐?" 어의가 황급히 맥을 짚어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이... 이상합니다. 작은 마님의 독은 풀리기는커녕, 또 다른 독까지 퍼져 있습니다!" 이도현은 곧장 침상 머리맡의 약병을 집어 들어 뒤집었다. 병 바닥에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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