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GoodNovel new 완결

장수에게 가장 걸맞은 최후는 전장에서 맞는 죽음이라 했다. 소은하는 죽었다. 천 리 밖 북방 변경의 전장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붉은 술을 단 창을 손에 쥔 소은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펄럭이는 군기와, 그 위에 새겨진 커다란 ‘소(蘇)’ 자였다. ‘나현진은 무사히 대주국으로 돌아갔겠지?’ ‘이건... 그대가 바라던 대로 제국으로 출병해 나현진을 되찾았으니...’ ‘이제 그대는... 더없이 기쁘겠구나.’

챕터 (1)

第1章

장수에게 가장 걸맞은 최후는 전장에서 맞는 죽음이라 했다. 소은하는 죽었다. 천 리 밖 북방 변경의 전장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붉은 술을 단 창을 손에 쥔 소은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펄럭이는 군기와, 그 위에 새겨진 커다란 ‘소(蘇)’ 자였다. ‘나현진은 무사히 대주국으로 돌아갔겠지?’ ‘이건... 그대가 바라던 대로 제국으로 출병해 나현진을 되찾았으니...’ ‘이제 그대는... 더없이 기쁘겠구나.’ 제1화 백전백승을 자랑하던 여장군이 끝내 전장에서 쓰러졌다. 소은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귓가를 가득 메우던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은하는 자신이 극락에 들었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뜬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황궁이었다. 소은하는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비치는 신체 너머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 책상 앞에 곤용포를 입은 이건이 보였다. ‘혹 죽기 전에 헛것이라도 보이는 건가?’ 이건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상소문을 살피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듯했다. 소은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이건이 번뜩 눈을 떴다. 매서운 시선이 곧장 소은하를 향했다. 순간 그녀는 이건이 자신을 발견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건은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급보이옵니다!” 그때 전각 밖에서 궁인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이건은 손끝으로 미간을 짚으며 낮게 말했다. “들라.” 곧이어 급보를 든 금군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사옵니다! 소 장군께서는 적의 성 세 곳을 잇달아 함락하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내셨사옵니다. 이후 군사를 붙여 현진 아씨를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내셨고, 아씨께서는 지금 궁문 밖에 당도해 계시옵니다. 다만 소 장군께서는...” 금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현진이가 돌아왔단 말이냐?!”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건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곧장 문밖을 향했다. “짐이 직접 나가 맞이하겠다.” 금군은 다급히 뒷말을 이으려 했으나, 이건은 이미 전각을 나서고 없었다. 남겨진 그는 난감한 얼굴로 멀어지는 이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은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금군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나현진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 적군의 칼을 세 번이나 맞았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런 소식은 이건에게 있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가 마음에 두는 사람은 오직 나현진뿐이었다. 이윽고 투명하게 비치던 소은하의 몸이 제 뜻과는 상관없이 이건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소은하는 깨달았다. 눈앞의 광경은 죽기 직전 본 환영이 아니었다. 자신은 정말 죽었다. 죽은 뒤 혼백이 되어 도성으로 돌아왔고, 어찌 된 영문인지 이건의 곁에 묶인 채 떠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소은하는 속절없이 그의 뒤를 따라 허공을 떠돌았다. 이것이 죽은 자신에게 내려진 보상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벌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십수 년을 이건과 얽혀 살았다. 그런데 죽어서까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소은하는 무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소씨 가문의 공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황은 그들을 경계했고, 일곱 살에 불과한 소은하를 황자의 배동이라는 명목으로 궁에 들였다. 실상은 볼모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 이건은 황궁에서 누구의 총애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황자였다. 냉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두 사람에게 의지할 이는 서로뿐이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스며드는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긴 겨울밤을 견뎠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나란히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았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면 가까스로 구한 밤떡 한 조각마저 둘이 반으로 나누어 먹었다... 그때 이건은 늘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때는 지키고 싶은 사람 하나쯤은 제 힘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약조했다. “은하야, 그날이 오면 내가 평생 너를 지켜 주마.” 소은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한낱 버려진 황자였던 이건의 곁을 지키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함께 헤쳐 나갔고, 마침내 그가 황위에 오르는 날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황위에 오른 이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에 군사를 보내 나현진을 되찾는 것이었다. 나현진은 승상의 여식이었다. 삼 년 전 화친(和親)의 명목으로 제국에 시집갔다. 다만 제국의 태자는 잔혹하기로 이름난 자였다. 해서 나현진이 그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제야 소은하는 비로소 깨달았다. 십수 년을 함께해 온 이 사내가 정작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여인은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현진이었다. 어느새 궁문이 눈앞에 다가왔다. 한 나라의 황제인 이건이 몸소 궁문 앞까지 나와 나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 한 채가 그의 앞에 멈추었다. 나현진은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려왔다. 이건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소,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이건은 나현진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주위의 신하와 궁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 아무도 감히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소은하만은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문득 오래전, 이건이 처음 나현진을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런 눈빛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힘없는 황자였기에, 나현진을 바라보면서도 애써 마음을 감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제가 된 이건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돌이켜 보니 그때 그가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것도, 나현진이 놀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소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은 나현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다. 짐이 직접 데려다주마.” 이건이 손을 내밀어 나현진을 부축하자, 나현진조차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은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현진을 되찾으려다 내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건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2화 아무리 급한 전갈이라 해도 북방 변경에서 도성까지 닿으려면 보름은 족히 걸렸다. 소은하가 죽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녀의 죽음이 도성에 전해지려면 적어도 보름은 더 걸릴 터였다. ‘그때가 되면... 이건도 조금은 마음 아파할까? 자신을 그렇게 보낸 것을 후회할까?’ 두 달 전, 갓 황위에 오른 이건은 제국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 삼 년 전 화친으로 떠난 나현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은하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까지 모두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선황이 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황권이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 하지만 이건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소은하가 끝까지 강하게 반대하자,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그녀에게 군장 서른 대를 내리기까지 했다. 그 뒤로는 조정에서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건은 그토록 나현진을 연모했다. 힘겹게 손에 넣은 황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결국 황명이 내려졌고, 소은하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길에 올랐다. 소은하는 천하에 이름난 여장수였다. 아흔 번이 넘는 전장을 누비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건을 위해 그가 연모하는 여인을 되찾아 주는 싸움이라 해도,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나현진을 무사히 구해 낸 뒤, 소은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호위 병력을 넉넉히 붙여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소은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현진을 호송할 군사를 떠나보낸 그날 밤, 적군이 기습해 왔다. 소은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병력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 전투에서 그녀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소은하는 허공을 떠돌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나현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건이 어찌하여 저토록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현진은 본디 대주의 절세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단아한 이마에 고운 눈썹, 아리따운 얼굴을 지녔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명문가 규수다운 기품이 배어 있었다. 저런 여인이라면 세상 어느 사내라도 좋아할 만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소은하는 두 손을 펼쳐 보았다.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빈 탓에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몸에는 늘 갑옷 아니면 검은 옷뿐이었고, 어디를 보아도 무인의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 같은 여인을 어느 사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겠는가?’ 소은하는 씁쓸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그제야 제 몸에 아직도 피 묻은 화살이 빼곡히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죽었으니 고통을 느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가슴만은 저릿하게 아파 왔다. 이건은 나현진을 더없이 귀히 여기며 궁으로 맞아들였다. 혹여 조금이라도 불편할까 염려해 궁녀도 스무 명 넘게 붙여 주었다. 나현진은 전각 안으로 들어서고서야 사방에 걸린 그림들을 발견했다. 모두 자신의 초상이었다. 하나같이 이건이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으로나마 그리움을 달래 온 것이었다. 나현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이것들은...” 사실 두 사람이 지금껏 만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현진으로서도 이건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토록 깊은 마음을 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내가 자신을 이토록 귀히 여기니,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현진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살며시 웃었다. “폐하께서는 그림 솜씨도 참으로 뛰어나시옵니다.” 그런데 이건은 뜻밖에도 전각 안의 그림을 모두 거두게 했다. 이건은 나현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짐의 곁에 있으니, 이런 것들로 그리움을 달랠 일도 없겠지.” 나현진은 수줍은 듯 귓불을 붉히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그녀의 처소에는 온갖 진귀한 보물과 비단, 패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불과 이틀 만에 황궁 안에서 이건이 나현진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교지까지 내렸다. 나현진을 황후로 맞아 보름 뒤 국혼을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황명이 내려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나현진은 이미 삼 년 전 제국으로 시집간 몸이었다. 이건이 그녀를 억지로 되찾아 온 것만으로도 논란이 클 터인데, 이미 한 차례 혼인한 여인을 대주의 국모로 세우겠다니, 천하의 금기를 거스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조정의 반대가 거셀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조회. 백발이 성성한 몇몇 원로 대신이 앞으로 나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서 정녕 나현진을 황후로 맞으시겠다면, 차라리 먼저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고서야 훗날 무슨 낯으로 선황을 뵙겠사옵니까!” “부디 어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윽고 대전에는 반대하는 대신들이 줄지어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건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교지는 이미 내려졌다. 군주가 한 번 내린 말을 어찌 거두겠느냐. 짐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은 완강히 반대하는 대신들과 한참 동안 설전을 벌였다. 그 탓에 조회가 끝난 것도 평소보다 늦었다. 건곤전(乾坤殿)으로 돌아왔을 때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피로가 얼굴에 어려 있었다. 이건은 황리목(黃梨木)으로 만든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습관처럼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은하야, 머리가 아프구나. 좀 눌러 다오.” 그의 뒤를 떠돌고 있던 소은하가 순간 멈칫했다. 제3화 소은하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예전부터 이건은 자주 두통을 앓았다. 소은하는 그의 통증을 덜어 주려고 따로 지압하는 법까지 익혔다. ‘결국 이럴 때야 만이 나를 떠올리는 건가?’ 전각 안은 고요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건도 뒤늦게 정신이 든 듯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잠시 멍한 기색이 스쳤다. 곁에 있던 어린 태감이 방금 그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소 장군께서는 아직 북방 변경에 계시옵니다.” 이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낮게 물었다. “언제 돌아오느냐?” 태감은 날짜를 헤아려 보고 아뢰었다. “별다른 변고가 없다면 대군이 개선해 도성에 이르기까지 보름쯤 더 걸릴 듯하옵니다. 혹 소 장군이 염려되시옵니까?” ‘염려?’ 소은하는 그 말을 듣고 허탈한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 ‘정녕 자신을 염려했다면, 어찌 마음에 둔 여인을 되찾겠다고 상처도 채 아물지 않은 자신을 전장으로 내몰았겠는가.’ ‘심지어 전쟁에서 패하면 구족을 멸하겠다는 어명까지 내렸으니.’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오만 가까이 소가군(蘇家軍)이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안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든 희생이 고작 나현진 한 사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은 차갑게 말했다. “그 아이는 무예가 출중하니, 굳이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그가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만 은하가 돌아올 무렵이면, 마침 짐과 현진의 혼례날이겠구나.” 그 말과 함께 이건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태감은 곧바로 눈치를 챘다. 이건이 황위에 오른 뒤 단 한 명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다. 궁 안에 머문 여인은 소은하뿐이었다. 한때는 궁녀가 이건이 온천에서 소은하를 품에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건은 거리낌 없이 밤마다 소은하의 처소를 찾았다. 소은하에게 후궁의 품계가 없었을 뿐,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궁 안에서는 이미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제야 소은하는 이건이 무엇을 꺼리는지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명분도 주지 않는 것이 혹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나현진이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황후로 맞겠다고 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착각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이건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자신은 그가 황위에 오르는 데 필요한 말에 불과했다. 나현진을 곁에 둘 수 없을 때는 외로움을 달래는 상대였고, 전쟁이 필요할 때는 가장 먼저 휘두르는 칼이었다. 어쩌면 이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진심을 내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냉궁에서 서로 의지하며 보낸 그 시절도 결국 혼자만의 헛된 꿈에 불과했다.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견딜 수 없이 쓰려 왔다. 소은하는 낮게 중얼거렸다. “해서... 그동안 내게 한 말은 전부 거짓이었던 거구나.” 물론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은 또다시 나현진의 처소를 찾았다. 오후 내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저녁 수라를 든 뒤에는 그대로 자신의 침전으로 돌아왔다. 연모하는 여인에게는 정식으로 황후의 자리를 내리기 전까지 손끝 하나 대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소은하는 문득 지난날 이건과 함께했던 수많은 밤을 떠올렸다. 아무런 명분도, 약조도 없이 그와 함께 보냈던 날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건, 살면서 수도 없이 상처를 입었지만, 가장 아프게 나를 찌른 사람은 언제나 너였어.’ 밤이 깊었다. 차가운 달빛이 건곤전 침전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이건은 한밤중이 지나도록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낮에 소은하의 이야기를 꺼낸 탓인지 자꾸만 그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등불을 들고 침전을 나섰다. 소은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한밤중에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런데 이건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자신이 지내던 경옥궁(瓊玉宮)이었다. 인적이 끊긴 전각 안에는 홀로 늦은 시각까지 청소를 하고 궁녀 하나만 남아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건을 보고,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소인, 폐하를 뵈옵나이다.” 소월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장군께서 출정한 뒤로,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경옥궁에발을 들인 적이 없거늘... 헌데 어찌하여 이 한밤중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소은하 역시 소월이를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소월이는 유일하게 곁을 지켜 온 시녀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떠나기 전에 소월이의 앞날부터 마련해 주었을 텐데...’ 소은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결국 이번 생에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것이 없구나.’ 한편 이건은 경옥궁 안의 익숙한 물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볼수록 마음이 이상하게 어수선해졌다.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진 그는 무심코 물었다. “이 밤중에 무얼 그리 치우고 있느냐?” 제4화 소월이는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조금 전 참새 한 마리가 담장에 부딪혀 죽는 바람에 피가 묻었사옵니다. 며칠 뒤면 장군께서 돌아오신다고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피 보는 것을 싫어하시기에 미리 깨끗이 치워 두려 했사옵니다.” ‘은하가 피를 싫어한다고?’ 이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은하는 무장이다. 전장을 수도 없이 누빈 사람이 어찌 피를 무서워한단 말이냐?” 소월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까지는 소인도 모르옵니다. 허나 장군께서 피를 무서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피를 보신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셨고, 악몽을 꾸고 나면 꼭 열이 올라 며칠씩 앓으셨사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월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장군께서 잠결에 우시는 소리도 들었사옵니다. 자신이 너무 많은 사람을 해쳤다며... 주승원, 강태오, 최민석을 부르시면서 무섭다고 하셨사옵니다.” 그 이름들을 듣는 순간, 이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들은 몰라도 이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지난 세월 자신이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소은하의 손을 빌려 제거했던 자들이었다. 소은하는 무예가 출중했다. 황위를 둘러싼 다툼이 한창이던 시절, 이건의 즉위를 반대하는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소은하는 이건의 칼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하나씩 베어 냈다. 이건은 소은하에게 사람을 베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가가 피로 물든 악몽에 시달리며 홀로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북방 변경에서 죽음을 맞던 순간, 소은하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왔으니, 자신에게 이런 끝이 닥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여겼다. 소월이는 이건의 굳어진 얼굴을 살피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서려 했다. 툭. 순간 품에서 옥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월이는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이건이 옥패를 집어 들었다. 옥패를 확인한 순간, 이건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돌연 얼굴을 굳히더니, 소월이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방자한 것!” 싸늘한 목소리가 경옥궁 안을 울렸다. “어디서 이 옥폐를 훔쳤느냐!” 소월이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폐, 폐하... 이것은... 장군께서 주신 것이옵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건의 눈빛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소월이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거짓말하지 마라! 은하가 어찌 이것을 네게 준단 말이냐!” 간신히 숨통이 트인 소월이는 몇 번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을 아뢰겠사옵니까. 정녕 장군께서 출정하시기 전에 내려 주신 것이옵니다. 장군께서... 이제 필요 없다 하셨사옵니다.” 그 순간 이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소은하는 그저 멍하니 옥패를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소월이에게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이 어째서 저토록 분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옥패는 오래전 이건이 소은하에게 건넨 정표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이어져 온 정과 의리를 상징하던 물건이기도 했다. 칠 년 전, 그녀의 탄생일. 이건은 직접 옥패를 그녀의 허리에 달아 주며 말했다. “은하야, 이 옥패는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구한 것이다. 평생 너를 지켜 줄 게다.” 그날 이후 소은하는 그 옥패를 두 사람의 정표라 여기며 무엇보다 소중히 간직했다. 한 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옥패를 몸에 지니고 있는 한, 어디에 있든 자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그의 곁으로 달려가겠다고. 그 뒤로 소은하는 단 한 번도 옥패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이건과 한 약조도 어긴 적이 없었다. 황위를 두고 싸우던 시절, 소은하는 이건을 도와 앞을 막는 자들을 모조리 베고 그를 궁문 밖까지 지켜 냈다. 온몸에 칼자국을 새긴 끝에 그의 태자 자리를 지켜 냈다. 이건이 황위에 오르던 날에는 빗발치는 화살을 몸으로 막아 내며 반군 수장의 목을 베어 그의 황좌를 지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위해 다시 갑옷을 입고 변방으로 나가, 그가 연모하는 여인까지 되찾아 주었다. 이건은 이번에도 지난날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은하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명을 따르고, 모든 일을 끝낸 뒤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소은하가 그 옥패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그 뜻을 이건이 어찌 모르겠는가. 소은하는 옥패를 버렸다. 더는 필요 없다 했다. 그 말은 곧... 이제부터는 자신도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제5화 그 사실을 깨닫자 이건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 치솟았다. 터뜨릴 곳 없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는 옥패를 챙겨 들고 소매를 떨치며 경옥궁을 나섰다. 침전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남지 않았던 잠기운마저 말끔히 달아난 뒤였다. 이건은 손에 든 옥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속이 뒤틀렸다. 평생 이 옥패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겠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고작 시녀 하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다니! 끝내 이건은 옥패를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옥패가 산산조각 났다. 소은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이건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나현진까지 되찾아 주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이용할 가치조차 없을 터였다. ‘헌데 어째서 고작 옥패 하나 때문에 저리도 노여워하는 것일까?’ “소은하, 그래. 아주 좋구나! 기어이 짐과 연을 끊고 싶다 이거지? 좋다. 네 뜻대로 해 주마!” 이건은 이를 악문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이윽고 전각 밖을 향해 버럭 외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 궁인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붓과 먹을 들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교지를 써 내려갔다. 붓을 놓자마자 그는 교지를 집어들어, 이를 전할 태감에게 던져 주었다. “소은하가 도성으로 돌아오면 이 교지를 전하거라.” 교지에 적힌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대장군 소은하가 성심을 거슬렀으니, 평생 변경에 주둔하라. 또한 별도의 명이 있기 전에는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느니라!] 태감은 내용을 훑어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간언했다. “폐하, 소 장군은 그간 수많은 전공을 세웠사옵니다. 오랫동안 폐하께 충성을 다해 왔으며, 이번에도 적군을 크게 무찌르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냈사옵니다. 헌데 이런 교지를 내리시면 조정 대신들의 마음마저 돌아설까 염려되옵나이다.” 이건은 서늘한 눈빛으로 태감을 내려다보았다. “짐의 결정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냐?” 태감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다만 폐하를 모시는 동안 소 장군께서 어떤 마음으로 폐하 곁을 지켜 왔는지 직접 보았기에 감히 한 말씀 올리는 것이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삼 년 전 폐하께서 고열로 사경을 헤매실 때, 소 장군께서는 눈밭에 누워 온몸을 얼음장처럼 식힌 뒤 돌아와 폐하를 끌어안아 열을 내려 드렸사옵니다. 이 년 전 봄 사냥터에서 미쳐 날뛰던 표범이 폐하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을 때도, 장군님께서는 몸을 던져 막으셨고, 일 년 전, 칠황자가 자객을 보내 폐하를 시해하려 했을 때도 소 장군이 대신 칼을 맞았습니다.” “소 장군께서는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분이옵니다. 게다가 그 오랜 세월 폐하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오셨사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는 이건을 가장 오래 모셔 온 태감이었기에 그나마 이런 말까지 올릴 수 있었다. 지난 일들이 하나둘 씩 떠오르자, 이건의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시선이 바닥에 산산이 부서진 옥패로 향했다. 이건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은하가 예전에 짐의 처소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현진이가 알게 된다면, 괜한 오해를 할 것이다. 해서 짐과 소은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다!” 곁에 떠 있던 소은하가 그 말을 듣고 소리 없이 웃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시 볼 일이 없다니...’ ‘이건, 그대의 말대로 앞으로의 우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느니라...’ 그 뒤로 이건은 조회가 끝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나현진의 처소를 찾았다. 나현진에게만큼은 끝도 없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처럼 굴었다. 평소 그토록 냉담하던 이가 혼례에 쓸 봉관과 예복을 함께 골라 주고, 마주 앉아 수라를 들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절에 가서 복을 빌고 싶다고 하자 기꺼이 동행하기까지 했다. 그날도 이건은 일부러 정사까지 미뤄 두고 나현진과 함께 궁을 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도성에서 가장 이름난 난인사(蘭因寺)였다. 황제와 장차 황후가 될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절에서는 미리 다른 향객들을 모두 물렸다. 주지스님은 여러 승려를 거느리고 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난인사에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가지에 소원을 적은 비단띠를 매달면 연인은 평생 해로하고, 가난한 이는 부귀를 누리며, 선비는 과거에 급제해 장원에 오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건은 본디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현진이 가고 싶다 하자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비단띠를 받아 소원을 적었다. 이건은 나현진의 손을 감싸 쥐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와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하고, 해마다 오늘처럼 기쁜 날만 이어지기를 바라오.” 제6화 소은하는 두 사람의 뒤에 떠돌며,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소은하도 몇 번이나 함께 난인사에 가서 복을 빌자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건은 괴이한 미신 따위는 믿을 것이 못 된다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함께 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소은하는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지려 몸을 돌리던 순간, 난인사의 주지스님인 허공대사(虛空大師)가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은하가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곧 그럴 리 없다고 마음을 놓았다. 지금의 자신은 몸도 형체도 없는 혼령이기에, 아무에게도 보일 리가 없었다. 소은하는 그대로 허공대사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허공대사가 돌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은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스님... 혹 제가 보이십니까?” 허공대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살님의 시신도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올 터이니, 부디 미련을 내려놓고 하루빨리 극락왕생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은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시선은 저절로 소원나무 곁에 선 이건과 나현진에게 향했다. 어쩌면 혼백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날이 와야 비로소 모든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공대사는 더 말하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이건과 나현진은 이미 소원을 적은 비단띠를 나무에 매달고 있었다. 나현진은 무심코 이건이 적은 글귀를 보았다. [한평생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놀라운 약조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자신에게 평생 오직 한 사람만을 두겠다고 약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현진은 놀란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나현진 역시 이건이 자신을 얼마나 연모하는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되찾겠다고 제국에 군사를 일으켜 수만의 병사를 잃었고, 예법과 명분을 거스른다는 반대까지 무릅쓰고 자신을 황후로 세우려 했다. 그토록 극진히 총애하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여인은 두지 않겠다는 뜻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순간 나현진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먼저 손을 뻗어 이건의 옷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폐하...” 이건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현진아, 짐이 한 말은 모두 진심이다. 이 세상에 여인이 아무리 많다 한들 짐이 택할 이는 오직 너 하나뿐이다. 짐은 평생 너 하나만을 곁에 둘 것이다.” 소은하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거렸다. 자신은 모든 것을 바치고도 끝내 받아 보지 못했던 약조였다. 그런데 나현진에게는 저토록 쉽게 주어지다니... 나현진이 막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몸이 약한 나현진이 찬바람을 맞을까 염려한 이건은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절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거센 바람에 소원나무에 매달려 있던 비단띠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건은 처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본 순간,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떨어진 비단띠 하나에 너무도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건이 늘 강녕하고, 오래도록 무탈하기를.] 소은하의 필체였다. 수없이 보아 온 필체가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이건의 가슴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비단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익숙한 필체가 자꾸 눈에 밟혔다. 한 장도 아니고, 두 장도 아니었다. 소은하가 남긴 소원 띠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저마다 다른 바람이 적혀 있었다. [이건이 뜻한 바를 이루고 큰 뜻을 펼치기를.] [이건이 오래도록 무탈하고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아가기를.] [이건이 하는 일마다 뜻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탄하기를.] ... 한 자 한 자, 한마디 한마디. 모두 자신을 위한 소원이었다. 이건은 비단띠를 하나씩 주워 들었다. 그럴수록 눈빛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러다 마지막 비단띠를 집어 든 순간, 그 위에 적힌 글귀를 본 이건의 등이 돌연 굳었다. [이건과 소은하가 평생 서로를 아끼며, 백년해로하기를.] 제7화 소은하도 그 글귀를 보고 잠시 굳었다. 그러다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그때의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이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역시 자신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일이 끝나면, 두 사람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은하는 몰랐다. 자신이 그저 이건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 쓰던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사랑도, 백년해로도. 이제 와 생각하면 모두 우스운 꿈이었다. 이건은 손에 든 비단띠를 꽉 움켜쥐었다. 지난날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예전에는 소은하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함께 난인사에 가서 복을 빌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매번 거절했다. 소은하는 한 번 거절당하면 집요하게 매달리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건은 그녀가 난인사에 오는 것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소은하는 해마다 이곳에 찾아왔다. 그리고 비단띠마다 온통 자신을 위한 소원을 적어 놓았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건은 손에 가득 쥔 비단띠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챙겼다. 궁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은하가 순간 멈칫했다. 나현진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비단띠 아래 적힌 이름이 누구인지 이미 보아 버렸다. 대주에서 소은하가 이건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품어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은 소은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익히 들었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세월이었다. 나현진은 천천히 손을 말아 쥐었다. 마음속에 문득 위기감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도 이건이 어째서 자신을 이토록 총애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총애가 있었기에 자신은 제국의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대주의 황후 자리까지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폐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사옵니다.” 나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에 이건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향했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다가갔다. “현진아, 어디가 불편하느냐?” “바람을 좀 맞아서 그런가 봅니다. 폐하, 이제 궁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사옵니까?” 이건은 두말없이 그녀의 뜻을 따랐다. 소원 띠에도 더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손에 든 것들을 뒤따르던 태감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나현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나현진은 이건의 마음을 확실히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밤 바로 행동에 옮겼다. 직접 음식을 장만해 상을 차린 뒤, 배꽃술 한 단지를 꺼내 이건을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그날 밤 나현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월백색 비단 치마에 먹빛처럼 검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은 달빛 아래 선 선녀를 방불케 했다. 나현진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얼굴에는 짙은 단장 대신 연하게 연지만 발랐다. 가녀리고 여린 자태는 어느 사내라도 마음을 빼앗길 만했다. 뒤늦게 전각 안으로 따라 들어온 소은하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역시 타고난 미인이었다. 그날 밤의 나현진을 본 이건도 잠시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가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밤바람이 차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궁녀에게 겉옷을 가져오라 하거라.” 나현진은 그의 첫 반응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일 줄은 몰랐는지 잠시 멈칫했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이 음식들은 모두 제가 직접 만든 것이옵니다. 한번 맛보시옵소서.” 그녀는 젓가락으로 죽순 한 점을 집어 이건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그런데 이건은 한입 맛보자마자 문득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현진의 얼굴에 금세 서운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혹 폐하의 입맛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이건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넋이 나가 있었다. 그제야 나현진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옅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니다. 맛이 좋구나.” 그 뒤에 떠 있던 소은하는 상 위의 죽순을 바라보다 이건이 방금 왜 넋을 놓았는지 곧 알아차렸다. 어쩌면... 자신을 떠올린 것인지도 몰랐다. 제8화 소은하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얼마 남지 않은 여린 마음은 모두 이건에게 향해 있었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그녀는 칼과 창밖에는 다룰 줄 모르던 손으로 처음 음식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다가, 하마터면 부엌을 태울 뻔하고서야 겨우 죽순 요리 하나를 완성했다. 모양새도 썩 그럴듯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건은 아무 말 없이 한입 먹었다. “어떠시옵니까?” 소은하는 첫 출전을 앞뒀을 때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입에 맞지 않으시면 뱉으셔도 되옵니다.” 그런데 이건은 뱉기는커녕 웃으며 소은하에게 입을 맞췄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소은하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귓가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솜씨가 썩 좋지는 않구나. 단것으로 입가심이라도 해야겠다.” 그 말에 소은하의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두 사람에게 가장 달콤했던 시절인지도 몰랐다. 소은하는 쓸쓸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이건과 나현진이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라를 마칠 무렵 이건은 평소보다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나현진은 몸소 그를 부축해 침전으로 데려갔다. 그제야 소은하는 나현진이 오늘 밤 마련한 자리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넓은 침전에는 어느새 궁인들이 모두 물러가고 없었다. 나현진은 이건을 침상으로 데려간 뒤 겉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폐하, 오늘 밤은 제가 폐하를 모시게 해 주시옵소서.” 얼굴을 붉힌 나현진이 이건의 허리띠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나현진은 흠칫했다. 고작 술 몇 잔으로 이건이 취할 리 없었다. 그는 맑은 눈으로 나현진을 바라보더니, 뜻밖에도 그녀가 벗어 둔 겉옷을 도로 입혀 주었다. 나현진에게는 그 행동이 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 폐하께서는... 제가 싫으신 것이옵니까?” 나현진은 자신이 이미 다른 사내에게 시집갔던 여인이라는 사실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이건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나현진을 품에 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현진아, 너는 짐에게 무엇보다 귀한 사람이다. 허니 가장 좋은 것만 내주고 싶다.” 그는 나현진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이리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된다. 이런 일은 국혼을 치르고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현진은 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이 자신을 이토록 귀하게 여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건의 깊은 눈을 마주하다가 끝내 오래 품었던 의문을 입에 올렸다. “폐하...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마음에 두시는 것이옵니까?” 두 사람은 예전에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건은 마치 오랜 세월 자신만을 사랑해 온 사람처럼 굴었다. 나현진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답은 소은하도 알고 싶었다. 이건은 옅게 웃으며 나현진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다. “십 년 전, 짐은 아무 힘도 없는 황자였다. 어느 날 덕비(德妃)의 노여움을 사 눈밭에서 꼬박 하루 밤낮을 무릎 꿇고 있었지.” “그날은 눈이 몹시도 많이 내렸다. 궁인들마저 짐이 이튿날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누구 하나 감히 덕비 앞에 나서 짐을 살려 달라 빌지 못했다.” “온몸에 눈이 수북이 쌓이고 살갗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 짐은 희미하게 보았다.” 이건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흰 여우털 갖옷을 두르고 짐을 향해 달려오던 너를.” “네가 짐을 살렸다. 게다가 이튿날 탁자 위에는 옥령고(玉靈膏)까지 놓여 있었으니, 더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지. 그 귀한 약을 짐에게 아낌없이 내줄 사람이 궁 안에 또 누가 있었겠느냐.” 이건은 나현진을 깊이 바라보았다. “현진아. 그날부터 짐은 맹세했다. 이 생에서만큼은 반드시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그 말을 다 들은 순간, 나현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건의 기억 속에서 흰 여우털 외투를 입고 그에게 달려갔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튿날 옥령고를 가져다 놓은 사람도 자신이 아니었다. 소은하 역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설마 이런 엇갈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밤이었다. 소은하는 이건을 살리기 위해 덕비에게 찾아가 사정했고, 무려 아흔아홉 대의 매를 맞고서야 겨우 허락을 받아 냈다. 하지만 매질을 당한 뒤라 옷은 찢어지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밖으로 나설 수조차 없는 몰골이었다. 마침 그때 그곳을 지나던 나현진과 마주쳤다. 나현진은 그런 소은하가 딱해 보였는지 자신이 더는 입지 않는 흰 여우털 갖옷을 내주었다. 소은하는 그 갖옷을 걸치고 곧장 궁 안의 호숫가로 달려가 이미 정신을 잃어 가던 이건을 구해 냈다. 그러니 그날 밤... 이건이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사실 소은하였다. 이튿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옥령고 역시 소은하가 태의원(太醫院)을 찾아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린 끝에 간신히 얻어 온 것이었다. 이건 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매를 맞고, 다시 머리를 조아려 빌었다. 소은하 역시 반쯤 죽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며칠 동안 이건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가 자신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일 때문에 이건이 나현진을 연모하게 되었을 줄이야. 소은하는 평생을 매달리고도 끝내 얻지 못했던 마음이 원래는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저 운명이 얄궂게 두 사람을 엇갈리게 해 버렸을 뿐이었다. 가슴 깊은 곳이 시리도록 아팠다. 소은하는 문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건, 그대와 나는 결국 인연은 있었으나 연분은 없었던 모양이구나!’ 제9화 이야기를 마친 이건은 나현진의 안색이 오히려 더 창백해진 것을 눈치챘다. “현진아, 왜 그러느냐?” 나현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날... 제가 조금만 더 일찍 폐하를 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눈빛에 스친 당혹감과 불안한 기색을 감췄다. ‘이건이 사람을 잘못 알고 있다 해도 이제 와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어.’ ‘다시는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눈앞에 다가온 황후의 자리도 놓치기 싫어!’ ‘다만 소은하는... 자신이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황후가 되기만 하면 돼.’ ‘허면 소은하는 황명대로 평생 변경을 지켜야 하니,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이건은 그런 나현진을 달래듯 품에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네가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현진은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댔다. 소은하는 담담한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됐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운명이 이리 엇갈린 것을.’ 소은하는 더는 이렇게 이건의 곁을 떠돌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고 멀어져 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건과 나현진의 국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혼례날이 다가오자 황궁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전각마다 등불과 비단이 걸렸고, 곳곳이 혼례를 축하하는 장식으로 가득했다. 공교롭게도 소은하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질 날 역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 황제가 황후를 맞는 날이니만큼, 온나라가 경사에 들썩였다. 금란전(金鑾殿) 밖에는 만백성이 모여 황제와 황후에게 하례를 올렸다. 이건은 나현진을 부축해 한 걸음씩 제단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대주의 예법에 따라 황제와 황후가 함께 선대 황실에 제를 올리고 나면 모든 혼례 의식이 끝난다. 나현진은 봉관을 쓰고 화려한 황후의 예복을 갖춰 입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제단 앞에 나란히 섰다. 그런데 이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아직 북방 변경에 있을 소은하였다.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건은 좀처럼 제단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대제관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폐하, 길시가 되었사옵니다. 이제 불을 밝히셔야 하옵니다.” 하지만 이건은 듣지 못한 듯 궁문 쪽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뒤에 선 태감에게 물었다. “소은하는 아직도 개선하지 않은 것이냐?” 이미 보름이 지났다. 예정대로라면 소은하는 진작 도성에 돌아왔어야 했다. 태감 역시 이유을 알지 못해 조심스럽게 답했다. “소 장군께서 오는 길에 잠시 지체되신 듯하옵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하지만 이건은 이상하리만치 고집스럽게 소은하를 기다렸다. 어쩐지 그녀라면 오늘 이 순간만큼은 반드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궁문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이제는 누구도 감히 이건을 재촉하지 못했다. 그의 뒤에 떠 있던 소은하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이제 와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 ‘오늘은 네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아니더냐. 헌데 어째서 이 순간에 나를 떠올리는 거지?’ 소은하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투명하던 몸이 전보다 한층 가벼워진 듯했다. 길시가 거의 지나가려 하자, 대제관이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불을...” “폐하.” 곁에 나현진도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불을 밝히셔야 하옵니다.” 이건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서야 끝내 손을 뻗었다. 그가 횃불을 들어 제단에 불을 붙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궁문 쪽이 돌연 소란스러워졌다. 금군 하나가 숨이 차도록 달려오며 목청껏 외쳤다. “급보이옵니다! 소가군이 개선하였습니다!” “소가군이 개선하였습니다!” “소가군이 도성으로 돌아왔사옵니다! 대군이 지금 성문을 지나 궁으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이건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궁문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에 희미한 기대가 번졌다. 조정 대신들 또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소가군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직 알지 못했다. 도성으로 들어선 소가군의 장병들은 모두 갑옷을 벗고 흰 상복을 입고 있었다.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행렬은 흰 비단을 두른 수천 개의 관을 앞세운 채 묵묵히 황궁을 향해 나아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다른 관들보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검은 관 하나가 있었다. 관 위에는 큼지막한 ‘소’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안에 누운 시신에는 소가군의 군기가 덮여 있었다. 온몸은 피로 물들었고, 수많은 화살이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흰 상복을 갖춰 입은 군사들 사이로 구슬픈 장송의 곡조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수많은 군사가 부르는 애달픈 노랫소리가 도성 가득 낮고 길게 번져 갔다. 소은하는 갑자기 가슴을 찢는 듯한 통증에 휩싸였다. 아득하던 장송곡이 점점 가까워지고, 대군이 곧 궁문에 다다르려는 순간이었다. 소은하의 눈가에서 문득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구나...’ ‘장병들아, 우리... 집으로 돌아왔구나...’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궁문이 장례 행렬 앞에서 활짝 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소은하의 몸도 한순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되어 사라지고, 마침내 마지막 흔적마저 천지 사이로 흩어졌다. 소은하의 혼백은 그렇게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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