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끝에 남은 것은 서늘한 바람

GoodNovel new 완결

남편이 이혼 후 아이까지 데리고 돌아온 첫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뒤, 나는 아들에게 남편을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고열로 신음하던 깊은 밤, 첫사랑의 전화 한 통에 남편은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나는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가만히 속삭였다. “아저씨 잘 가요, 해야지.” 아들과 함께 학부모 모임에 가기로 약속했던 날에도 첫사랑이 자기 아들은 아빠가 없다며 울먹이자 남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아들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학부모 단톡방에 ‘아저씨’의 결석 사유를 직접 적어 내라고 했다. 아들은 매번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마침내 우리에게 진 빚과 죄책감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먼저 우리 세 식구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사진관 앞. 첫사랑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징징거리며 울먹였다. “도윤 씨, 지금 민준이 하원 좀 도와주면 안 돼? 유치원 애들이 아빠 없다고 놀려대서...” 남편의 얼굴에 곤란함과 안타까움이 번졌다. 그가 막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눈치를 주기도 전에 아들이 먼저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아저씨가 좋아하는 그 아이한테 가보세요. 가족사진은 엄마랑 나 둘만 찍어도 돼요.”

챕터 (1)

第1章

남편이 이혼 후 아이까지 데리고 돌아온 첫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뒤, 나는 아들에게 남편을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고열로 신음하던 깊은 밤, 첫사랑의 전화 한 통에 남편은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나는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가만히 속삭였다. “아저씨 잘 가요, 해야지.” 아들과 함께 학부모 모임에 가기로 약속했던 날에도 첫사랑이 자기 아들은 아빠가 없다며 울먹이자 남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아들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학부모 단톡방에 ‘아저씨’의 결석 사유를 직접 적어 내라고 했다. 아들은 매번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마침내 우리에게 진 빚과 죄책감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먼저 우리 세 식구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사진관 앞. 첫사랑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징징거리며 울먹였다. “도윤 씨, 지금 민준이 하원 좀 도와주면 안 돼? 유치원 애들이 아빠 없다고 놀려대서...” 남편의 얼굴에 곤란함과 안타까움이 번졌다. 그가 막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눈치를 주기도 전에 아들이 먼저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아저씨가 좋아하는 그 아이한테 가보세요. 가족사진은 엄마랑 나 둘만 찍어도 돼요.” 제1화 아들의 말이 떨어지자 강도윤과 나는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 강도윤의 마음이 더 이상 우리 가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난 28일 동안, 그가 백서윤 때문에 나와 아들을 내팽개칠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그를 ‘아저씨’라 부르게 했다. 이제 그만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상처받지 말자고, 나와 아이 스스로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제 고작 일곱 살. 한창 아빠를 의지할 나이였다. 그동안 아이는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시킬 때마다 늘 한참을 주저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막힘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마음속으로 수백 번도 넘게 연습했던 단어를 뱉어내듯이 말이다. 우리가 할 말을 잃고 서 있자 아들은 먼저 내 손을 꼭 쥐며 강도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바쁘시면 가보세요.” 그러더니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우리 빨리 가자. 예약 시간 다 돼가.” 아이는 내 손을 이끌고 묵묵히 사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가족사진 촬영은 강도윤이 아들의 학부모 모임에 불참했던 일을 만회하겠다며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아들은 그 약속 하나를 무려 보름이나 손꼽아 기다려 왔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끌려 뻣뻣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슴 위에 무거운 돌덩이라도 얹힌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강도윤의 외도를 알아챈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그가 백서윤 아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돌아온 날, 코트 주머니에 미처 버리지 못한 영수증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3인 가족 입장권. 아들은 여섯 번째 생일날, 가족이 다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 제일 좋아하는 미니언즈를 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었다. 하지만 강도윤은 유치하다며 단칼에 거절했었다. 그래 놓고 며칠 뒤, 남의 자식을 데리고 그곳에 간 것이다. 나는 강도윤의 휴대폰을 몰래 뒤져 백서윤의 SNS를 확인했다. [꿈만 같은 곳이네. 이런 곳은 당연히 최고의 아빠와 함께 가야지.] 글귀 아래에는 강도윤과 백서윤, 그리고 아이가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세 식구의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백서윤은 강도윤의 첫사랑이자 이혼 후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여자였다. 그날 밤, 나와 강도윤은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나는 당장 아이를 데리고 이혼하겠다고 악을 썼고 강도윤은 내게 억지 좀 부리지 말라며 화를 냈다. 어떻게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을 수 있냐며, 백서윤을 향한 마음은 그저 안쓰러운 동정일 뿐이라고 하늘에 대고 맹세까지 했다. 싸움 소리에 하얗게 질린 아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여기서 억지로 아이를 끌고 나간다면 아들은 평생 강도윤을 향한 미련과 상처를 지우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깟 동정심 때문에 내 아이가 평생 서러움을 겪으며 살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강도윤을 속여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숙려기간 30일. 그 30일 안에 강도윤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모든 걸 덮고 예전처럼 살아갈 생각이었다. 제2화 그게 아니면, 나는 이 30일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마음에서 강도윤을 완전히 떼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28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들이 마침내 제 입으로 강도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작게 떨리는 아들의 몸을 품에 안으며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찔린 듯 아릿했다. 그 어디에도 기쁨 따위는 없었다. 길을 건너갈 무렵, 강도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몇 걸음 쫓아왔다. 아이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지만 때마침 백서윤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여전히 애교 섞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윤 씨, 어디까지 왔어? 민준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계속 울어서. 아무리 달래도 그치질 않네.” 강도윤의 발걸음이 딱 멈춰 섰다. 그는 손에 전화기를 쥔 채 나와 아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응수했다. “응, 알았어.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친 그는 나에게 저녁에 이야기하자는 문자 한 통을 툭 던져놓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요란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리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아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내 옷깃을 적셨다. “엄마, 우리... 이제 아빠 없어도 살 수 있지?” ... 가족사진은 결국 찍지 못했고 나는 아들을 데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해성에 있는 친정으로 갈 비행기표를 예매하는데 백서윤이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시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스튜디오였다. 강도윤과 백서윤은 시밀러룩을 차려입고 다섯 살배기 아이를 안은 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영상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나를 향한 백서윤의 도발이 적혀 있었다. [가족사진이 별건가? 도윤 씨랑 나는 언제든 찍을 수 있는데.] 예전 같았으면 이런 도발을 보자마자 곧바로 받아치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방구석에서 얌전히 장난감을 정리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사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는 대화창을 끄고 모레 해성으로 떠나는 비행기표 두 장을 예매했다. 결제를 마치자마자 강도윤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딸기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나와 아들은 동시에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의 강도윤은 딸기 케이크라면 질색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아들이 나를 닮아 딸기에 미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일 때면 늘 강도윤이 좋아하는 말차 무스 케이크를 골라야만 했다. 그런 그가 대체 왜 느닷없이 딸기 케이크를 사 들고 온 걸까. 나와 아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강도윤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다가 거실에 펼쳐진 캐리어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민준이가 너무 울어서 조금 더 놀아주다 왔어. 오는 길에 너랑 도하가 딸기 케이크 좋아하는 거 생각나서 하나 사 왔고. 짐은 왜 싸?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 “비슷해.” 이혼 숙려 기간이 겨우 이틀 남은 시점이라 괜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을 들은 강도윤은 어째서인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사진관에서 연락 왔어. 둘이 안 왔다고 하길래 내가 내일로 미뤄 놨어. 내일 가는 거 어때? 이번에는 절대로 약속 어기지 않을게.” 그가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감을 정돈하던 아들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이는 강도윤을 보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감히 기대조차 품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들의 미세한 흔들림을 읽어낸 순간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어차피 이게 정말 마지막일 테니까.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들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는 장난감을 끌어안고 종종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가 사라진 뒤 내가 다시 짐을 싸기 시작하자 강도윤이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참, 아까 도하가 나보고 아저씨라고 부른 거 말인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강도윤은 내 곁에 쪼그려 앉아 딸기 케이크를 내 손이 닿는 곳에 놓아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난처함 섞인 다정함이 묻어났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내가 서윤이한테 너무 잘해줘서 너랑 우리 아들을 뒷전으로 미뤘다고 서운해서 그러는 거잖아.” 제3화 “맹세하는데 서윤이한테는 진짜 동정심뿐이야. 홀몸으로 애 키우는 게 안쓰러워서 마음 쓰인 것뿐이라고.”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제 가슴 위에 얹었다. “나한테 시간 조금만 더 줘. 서윤이를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까. 너랑 우리 도하 절대로 상처받는 일 없게 할게.”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게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아마 우리의 결혼식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순백의 성당에서 그는 내 손가락을 꼭 쥔 채 평생 나 하나만을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선서했다. 아니면 아들이 태어나던 날이었거나. 분만실 안에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던 그때. “지아야, 앞으로 너랑 우리 도하 절대 서운하게 안 할게. 눈에 흙이 들어가도 상처 주는 일 없게 할게.” 까마득한 옛일을 떠올리며 나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이혼 합의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참, 지난번에 애 사준 한정판 레고 어디 뒀지? 서재에 있나? 서윤이가 그러는데 요즘 민준이도 레고 좋아한다더라고. 며칠 가져가서 놀게 해주려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강도윤은 서재로 들어가 레고 상자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차 키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강도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 나는 닫힌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긴 정적 끝에, 끝내 맺지 못했던 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실... 나와 도하는 이미 당신을 버렸어.” 우리가 떠나기까지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 ... 새벽 12시, 마침내 모든 짐 정리를 마친 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였다. 폰 화면이 반짝였다. 강도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레고 민준이가 너무 좋아하네. 밤새 같이 놀아줬어. 서윤이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네.] 새벽 12시, 내 남편은 딴여자를 대신해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낼 기운조차 아까웠다. 어차피 끝난 사이니까. 나는 대화창을 열어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내가 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 레고, 도하가 제일 좋아하던 생일 선물이야. 당신 시간 날 때 같이 놀아주길 내내 기다리던 거였고.] 문자를 보낸 뒤, 나는 휴대폰을 완전히 꺼버리고 눈을 감았다. 문자를 본 강도윤의 표정이 어떻게 썩어 들어갈지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강도윤이 웬일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외투를 벗던 그는 거실 한쪽에 줄지어 서 있는 캐리어들을 보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행 가는데 짐을 이렇게나 많이 싸?” 그는 외투를 벗어 둘 생각도 못 한 채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안방으로 들어와 물었다. 나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주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먼 데로 가니까.” 내 말에 그는 즉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외투를 내려놓은 그는 주머니에서 유니버설 스튜디오 티켓 세 장을 꺼내 들었다. “내가 도하 데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안 갔다고 내내 서운해했잖아. 오늘 표 끊어 왔어. 우리 세 식구 같이 다녀오자.” 그는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 내밀며 다정한 척을 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일이 터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생각났다고? 하지만 오늘 아침 켜본 폰에 찍혀 있던 수많은 안 읽은 문자들을 떠올리자 이내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아, 병 주고 약 주기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아들 옷을 다듬어주는 데만 집중했다. 반면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엄마, 나 가고 싶어!” 아이가 좋아하길래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려던 찰나, 강도윤이 망설이며 밑밥을 깔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서윤이가 오늘 우리 가족사진 찍는 걸 알고 있거든. 혹시라도 민준이가 알면 상처받을까 봐 신경 쓰여 하더라고. 그러니까... 가족사진은 다음에 찍는 걸로 해.” 제4화 그 말을 내뱉는 강도윤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들이 굳어 버렸다. 눈가에 감돌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그렇구나.”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강도윤은 그것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지껄였다. “서윤이가 부탁한 건 그거 하나뿐인데 뭐 어때. 별 영향 없잖아. 이번에만 안 찍는 거야, 다음에 찍으면 되지. 응? 그렇지, 도하야?” 그는 몰랐다. 내일이면 나와 아들이 떠난다는 것을.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나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강도윤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입꼬리를 올리더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나 지금 서윤이한테 말하고 올게. 오후 3시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보자.” 말을 마친 그가 돌아서 나가려다가 현관문 앞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보, 도하야. 내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아서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었지? 너무 좋다.” 나와 아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가자마자 아들은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가방을 꺼냈다. “엄마. 나 이제 그 아저씨 얼굴 안 보고 싶어. 우리 그냥 지금 가면 안 돼?” ... 나는 곧바로 비행기표를 오늘 오후 3시로 변경했다. 예약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떠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오전 9시, 이 집에서 만드는 마지막 아침을 차렸다. 강도윤이 어젯밤 사 온 딸기 케이크가 냉장고에 남아 있었다. 아들은 그걸 꺼내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전 10시, 변호사에게서 강도윤의 도장이 찍힌 이혼 합의서를 전달받았다. 맨 첫 줄에 적힌 것은 바로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이 나에게 있다는 조항이었다. 그사이 백서윤의 SNS에 새 글이 올라왔다. [드디어 나온 가족사진! 민준이도 그이도 너무 좋아해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둬야지.] 옆에서 종이비행기를 접던 아들은 그 글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재촉할 뿐이었다. “엄마, 그냥 빨리 서명해 버려.” 오후 1시, 나와 아들은 점심을 챙겨 먹고 짐을 가득 실은 채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강도윤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아들은 손에 쥔 태블릿을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엔 강도윤과 찍은 옛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다. 백일잔치 때, 강도윤이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람들에게 제 아들이라며 자랑하던 사진. 세 살 때, 강도윤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함께 미니언즈 영화를 보며 브이를 그리던 사진. 그리고 백서윤이 나타나기 전, 일곱 살의 아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다정하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던 동영상까지. 아들은 몇 번이고 그 영상들을 돌려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차 안에는 조용한 슬픔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아이의 곁에 앉아 그저 가만히 있어 줄 뿐이었다. 오후 2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려던 찰나 강도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아야, 너한테 부탁 좀 할게. 도하한테 미안하다고 좀 전해줘. 민준이가 다쳐서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3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기다리다 지치면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도하한테 미안하다고 꼭 말해줘!”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공항 로비에 울려 퍼지는 탑승 안내 방송조차 듣지 못한 채 말이다. “가자.”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앨범 속 사진을 전체 선택해 망설임 없이 삭제해 버렸다. 정각 3시,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랐다. 나는 아들에게 헤드셋을 씌워주고 창밖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안녕, 강도윤. 같은 시각, 강도윤은 붙잡고 애원하는 백서윤을 뿌리치고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향해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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