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GoodNovel 완결

전란을 끝내기 위해, 나는 스스로 황명을 청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수인족(獸人族) 부족의 타나오윤과 혼인했다. 혼인 첫날밤, 어느새 초원의 늑대왕이 된 그는 드넓은 초원에서 나와 깊은 정을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의 나는 타나오윤이 진심으로 나를 연모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훗날 십만 수인족 병사를 친히 이끌고 도성을 짓밟은 이 또한, 다름 아닌 타나오윤이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붙잡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끝까지 지켜보게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굶주린 늑대 떼에 물어뜯겨 돌아가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말발굽 아래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마마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자들은 어마마마의 봉관을 잡아 뜯고 예복까지 찢어 놓은 채, 사람들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가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치욕은 끝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타나오윤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눈에는 지난날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하선, 비록 네가 경국지색이라 하나, 내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느냐?” “진나라(秦國) 황실이 내 부족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아느냐? 고작 너 하나를 보내 놓고 이 피맺힌 원한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마침내 타나오윤은 천하를 손에 넣었고, 연모하는 여인을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반면 나는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이 냉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마다, 그는 황릉에서 시신을 파내 내 앞에 가져왔다. 그러고는 뼈를 산산이 부숴 가루로 만들고, 남은 재까지 모조리 흩어 버렸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죽을 생각도 마라!” 그 뒤로 나는 더는 죽으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 그를 살리려고 삼켰던 고충(蠱蟲)의 독이 발작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챕터 (1)

第1章

전란을 끝내기 위해, 나는 스스로 황명을 청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수인족(獸人族) 부족의 타나오윤과 혼인했다. 혼인 첫날밤, 어느새 초원의 늑대왕이 된 그는 드넓은 초원에서 나와 깊은 정을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의 나는 타나오윤이 진심으로 나를 연모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훗날 십만 수인족 병사를 친히 이끌고 도성을 짓밟은 이 또한, 다름 아닌 타나오윤이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붙잡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끝까지 지켜보게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굶주린 늑대 떼에 물어뜯겨 돌아가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말발굽 아래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마마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자들은 어마마마의 봉관을 잡아 뜯고 예복까지 찢어 놓은 채, 사람들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가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치욕은 끝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타나오윤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눈에는 지난날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하선, 비록 네가 경국지색이라 하나, 내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느냐?” “진나라(秦國) 황실이 내 부족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아느냐? 고작 너 하나를 보내 놓고 이 피맺힌 원한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마침내 타나오윤은 천하를 손에 넣었고, 연모하는 여인을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반면 나는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이 냉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마다, 그는 황릉에서 시신을 파내 내 앞에 가져왔다. 그러고는 뼈를 산산이 부숴 가루로 만들고, 남은 재까지 모조리 흩어 버렸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죽을 생각도 마라!” 그 뒤로 나는 더는 죽으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 그를 살리려고 삼켰던 고충(蠱蟲)의 독이 발작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제1화 황후의 생신연을 맞아, 타나오윤은 이례적으로 나를 냉궁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붉어진 눈으로 높은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은 여인의 머리에는 화려한 채익 봉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유품이었다. “무엄하구나!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고도 절을 올리지 않다니!” 그때 누군가 내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쳤고, 나는 그대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 타나오윤은 나를 내려다볼 뿐,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하선. 오늘이 누구의 생신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헌데도 이리 늦은 것은 혹 황후를 욕보리려는 뜻이냐?”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 다리가 성치 않아 냉궁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려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타나오윤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이제는 제법 고분고분해졌구나.” 문득 지난번 타나오윤의 뜻을 거슬렀다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그는 나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고 피를 절반 가까이 뽑아 짐승들에게 먹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나서야 진귀한 약재와 영약을 모조리 구해 오게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만 붙여 놓았다. “이보게, 어서 일어나시게. 그래도 한때는 귀한 공주마마가 아니더냐. 아무리 진나라가 망했다 한들, 어찌 스스로를 천한 몸종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말하며 신은수는 몸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말투는 더없이 다정했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후벼 팠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내 손목에 감긴 늑대 송곳니 팔찌에 멎었다. 눈빛에 순간 감탄이 어렸다. 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생신 선물로 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타나오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팔찌는 오래전 타나오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수인족 부족에서 대대로 전해 온 보물로, 꿰어 놓은 송곳니는 하나같이 귀한 약재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옅어지지 않는 묘한 향이 배어 있었다. 오래 지니고 있으면 통증을 가라앉히고 수명을 늘리는 효험까지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내게 이것을 건네며, 타나오윤은 평생 무탈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마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꺼이 드려야지요.” 나는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 신은수의 손에 건넸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단상 쪽에서 술잔이 엎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은수는 팔찌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매만지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네가 춤 한 번으로 도성을 들썩이게 했다지? 모처럼 자리도 마련되었으니, 오늘 모두에게 솜씨를 한번 보여 주는 것이 어떤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 있었다. 하나같이 비웃음과 악의가 서린 눈빛이었다. 그중에는 수인족 장수들도 있었고, 적과 내통해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반역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그때 놋솥에서 갓 떠낸 뜨거운 국물이 그대로 내 몸을 덮쳤다. 살갗이 익어 버릴 듯한 화끈한 통증이 순식간에 번졌다.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망국의 핏줄 주제에 아직도 공주 행세를 하려 들어? 목숨 하나 붙여 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분수도 모르고!” 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발끝을 세웠다. 한때 공주였던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한낱 무희가 되었다. 초원의 풍속은 본래 분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이번에는 겉옷까지 벗으라며 소리 높여 부추겼다. 멀찍이서 내게 닿은 타나오윤의 눈빛은 싸늘하고 깊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허리끈을 풀었다. 뜨거운 국물에 덴 살과 옷자락이 엉겨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옷을 잡아당기는 순간 살점까지 뜯겨 나가며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회가 끝난 뒤에야 타나오윤은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차가운 손끝이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스치더니,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없이 매정했다. “진하선, 지금 짐 앞에서 일부러 가련한 척이라도 하는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래된 지병이 또다시 도졌다. 나는 타나오윤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연신 기침을 쏟아 냈다. 기침이 터질 때마다 속이 뒤집히고 오장육부까지 쏟아질 듯했다. 타나오윤은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듯 옆으로 비켜섰다. 눈가에 어린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 골골대는 꼴을 십 년이나 보아 왔다. 아직도 병든 시늉이 지겹지도 않으냐?” 나는 한때 그가 그저 진나라의 여인들을 못마땅해하는 줄 알았다. 나처럼 병약하고 유약한 여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타나오윤은 신은수에게만큼은 더없이 세심하고 다정했다. 그녀가 미간을 조금만 찌푸려도 태의가 곧장 문밖에 무릎을 꿇고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몸속의 고충이 내 살과 장부를 갉아먹듯 날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타나오윤의 눈빛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진하선, 너를 그리 쉽게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끝까지 네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그 죗값을 다 치르기엔 너무 짧았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제2화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몸의 화상은 이미 말끔히 처치되어 있었다. 흐릿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곳이 냉궁이 아니라 황제의 침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아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바마마께서는 자주 나와 태자 오라버니를 품에 안고 이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가르쳐 주셨다. 그때마다 어마마마께서는 손수 만든 계화떡을 들고 오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맛이 어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깨어났군.” 그때 타나오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내 턱을 거칠게 붙잡더니, 기혈을 보하는 쓰디쓴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입에 들이부었다. 그러자 나는 곧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고,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어렸다. “진하선, 그런 가엾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타나오윤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네 손에 직접 우리 부족의 피를 묻힌 적이 없다 한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너 역시 죄가 없지는 않다.” 진나라가 멸망하던 날, 타나오윤은 황실의 핏줄을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내 뱃속에서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아이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친자식이었지만, 그는 살려 두지 않았다. 유독 나만 살려두었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이었을까?’ ‘아마 증오였을 것이다.’ ‘해서 그 뒤로 밤마다 나를 사향을 풀어 놓은 차디찬 못에 담가 두었겠지.’ ‘다시는 아이를 품지 못하게 하려고.’ ‘내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그는 나를 혐오하고, 내 핏줄을 불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가에 묻은 약물을 닦아 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태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 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황후가 회임을 했다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처음 아비가 된 기쁨이 선명하게 번지고 있었다. 고충이 또다시 몸속을 갉아먹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아팠다. 나는 처음에 고독이 발작하면, 냉궁에서 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나오윤은 하필 이때 나를 신은수의 곁으로 보내 시중들게 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목숨만 끊으면 그만일 터, 하지만 그는 기어이 내 두 눈으로 다른 여인이 그의 아이를 품고 낳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려 했다. 정작 우리 아이는 그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 그 아이는 지금도 뒷산에 홀로 묻혀 있었다. 비석 하나조차 세워지지 않은 채 홀로 외로이. 한편 신은수는 나를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동생은 본디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던가. 폐하께서 내 시중을 들라 하셨다 해도 차마 험한 일을 시킬 수야 없지.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나 깨끗이 쓸어 주게.” 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 가득 떨어진 복사꽃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궁녀들은 내 처지가 우스운 듯 거리낌 없이 흘겨보며 저마다 조롱을 늘어놓았다. “망국의 공주를 냉궁에 가둬 두는 데 그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황후마마께서 워낙 어지시니 아직도 친하게 대하는 것이지?” “금지옥엽은 무슨. 이제는 가장 천한 첩실보다도 못한 신세면서. 폐하께 진작 버림받고도 저리 악착같이 살아 있는 걸 보면 참 낯도 두껍지.” 그 말을 듣는 동안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하나둘 돋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코끝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무심코 손을 들어 훔쳐 본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악!” 신은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타나오윤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은 채 내 뺨부터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몸이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흩어진 복사꽃잎이 허공으로 와르르 날아올랐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지금 피 냄새조차 맡아서는 아니 되거늘, 네년은 지금 일부러 황후를 해치려는 것이냐?!” 타나오윤의 눈빛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네년이 아이를 잃었다고 그 한을 남에게 풀려는 것이냐? 진하선, 짐의 명을 거역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벌써 잊었느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가려움과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모두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모두 이 미천한 것의 잘못이오니,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마마마의 유해는 이미 채찍에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아바마마와 태자 오라버니의 무덤 또한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았사옵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폐하... 이제 제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사옵니다.” 타나오윤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손끝으로 내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 “누가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느냐?” “뒷산에 아직 하나 묻혀 있지 않느냐?” 제3화 나는 타나오윤의 손을 죽을힘을 다해 붙잡았다. 그러고는 핏발 선 두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폐하...” “제발 그러지 마시옵소서. 그 아이에게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 아이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이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태자 오라버니의 유해는 진작부터 몇 번이고 그의 손에 능욕당하며 나를 옥죄어 왔다. 너무 오래 아프다 보면 고통에도 무뎌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뒷산에 홀로 놓인 작은 무덤만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졌다. 세상 구경 한번 하지 못하고 죽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친아비의 손에 다시 무덤 밖으로 끌려 나와 죽어서까지 짓밟힐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목소리마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타나오윤, 저를 미워하신다면 저를 벌하주십시오.” “그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옵니다.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지어 주지 못했사옵니다.” 그의 이름을 이렇게 직접 부른 것이 얼마 만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타나오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쿵! 쿵! 쿵!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바닥에는 어느새 복사꽃보다 더 붉은 피가 넓게 번져 있었다. 코에서는 피가 흘렀고, 기침할 때마다 입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급기야 눈에서는 핏빛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그제야 타나오윤도 지난 이틀 동안 내가 흘린 피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곁에 있던 궁인들에게 물었다. “이 아이에게 무슨 험한 일이라도 시켰느냐? 어찌하여 이리 된 것이냐?” “폐하, 황후마마께서 한때 공주였던 이 아이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저 마당에 떨어진 꽃잎을 쓸게 하셨을 뿐이옵니다. 저희 모두 보았사옵니다.” 이때 한 어린 궁녀가 곧장 무릎을 꿇고 말을 보탰다. “소인도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이 아이는 몇 번 쓸지도 않고 빗자루를 내려놓은 채 가만히 서 있었사옵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가엾은 모습을 보이려는 듯하였사옵니다.” 다른 궁녀도 낮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이 아이는 예전부터 가련한 모습을 보이는 데 능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속지 마시옵소서.”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입에서 쏟아진 것은 더 많은 피뿐이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조차 저들의 눈에는 총애를 얻으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타나오윤은 곧바로 나를 놓아 버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진하선, 또 그 병이 도진 것이냐?” “그 괴이한 병도 벌써 여러 해째구나. 어차피 죽을 병도 아니니, 아프면 그대로 견뎌라!” 말을 마친 그는 내 몸을 그대로 넘어 지나갔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가느다란 숨을 한 번 토해 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기운이 서늘해질 무렵에는 복사꽃잎이 온몸 위로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각 안에는 촛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신은수의 애교 어린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신첩은 지금 회임 중이 아니옵니까.” 창가 너머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밤이 새도록 서로 정을 나누었다. 문득 타나오윤과 혼례를 올리던 첫날밤이 떠올랐다. 붉은 초도, 신부의 얼굴을 가리던 붉은 너울도 모두 그의 손에 내팽개쳐졌고, 합근례 따위는 초원 위의 우스갯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는 그대로 나를 풀밭 위에 눕혔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자리 삼은 채, 거칠고 사납게 나를 취했다. 나는 그저 수인족 부족의 풍속이 그러한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서러움과 억울함을 말없이 삼켰다. 하지만 훗날 황후 책봉식을 보고서야 알았다. 타나오윤이 신은수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아끼며 존중하는지를. 차가운 바람이 텅 빈 가슴을 그대로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곧 날이 밝아 온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타나오윤, 나 곧 죽네. 네가 그토록 증오했던 진나라 황실이 곧 세상에서 사라지네. 이제야 네 뜻을 이루었으니, 축하한다.’ 제4화 갑자기 전각 문이 열렸다. 타나오윤이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황후를 시중들라 했더니, 이런 식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느냐?” 조금 전 사람이 와서 전갈을 전했다. 타나오윤은 아마 정사를 보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당장 들어가 신은수의 목욕과 환복을 시중들라 명했다.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신은수의 얼굴에는 혈색이 곱게 돌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나무 대야는 몹시 무거웠다. 손목에는 늑대 송곳니 팔찌에 짓눌린 자국이 아직 선명했고, 대야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한편 신은수는 내 앞에 발을 내밀어 길을 막으며 방긋 웃었다. “이봐, 조심하시게. 본궁은 지금 폐하의 아이를 품고 있네. 행여 넘어지거나 데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네 목숨 하나로도 모자랄 것이야.” 나는 가까스로 대야를 바로잡았다. 그 순간 뜨거운 물이 손등에 튀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참 가엾기도 하지. 예전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일 없이 귀하게 살더니, 이제는 물 한 대야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다니.” 주위에 아무도 없자 신은수는 더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소리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반역자.” 신은수는 노여워하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린 채, 처참해진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진하선, 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복사꽃가루만 닿으면 어김없이 몸이 붉게 돋고 괴로워했지.” 신은수는 본래 나와 허물없이 지내던 벗이었다. 무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바마마께서도 신 장군을 늘 믿고 중히 여기셨다. 그런데 나라가 무너지던 날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이 바로 신씨 가문이었다. 내가 처음 냉궁에 갇혔을 무렵, 신은수가 남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신은수는 내게 말했다. “점쟁이가 그러더구나. 우리 신씨 가문의 딸은 타고난 귀한 운명을 지녔으니, 마땅히 황후가 될 팔자라고.” “누가 네 아버지와와 태자 오라버니더러 그리도 분수를 모르라 했겠느냐.” 그제야 알았다. 그것이 신씨 집안이 나라를 팔아넘긴 이유였다. 신은수는 다시 늑대 송곳니 팔찌를 꺼내 내 눈앞에서 자랑하듯 흔들었다. “고충이 심장을 갉아먹는 고통이 제법 견디기 힘들지?” “참 하선아, 너는 아직 모르고 있나 보구나. 십 년 전 현유림(玄幽林)에서 타나오윤을 구한 이는 분명 너였는데... 헌데 그가 돌아오신 뒤에는 어째서 그토록 너를 차갑게 대하는지 아느냐?” “그분은 자신을 구한 사람이 나인 줄 알고 있거든.” 신은수는 말을 마친 뒤, 내가 놀라 괴로워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와 타나오윤 사이에는 망국의 원한과 가족의 피맺힌 한이 가로놓여 있었다. 고작 목숨 한 번 구해 준 은혜로 그 모든 것을 어찌 덮을 수 있겠는가.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현유림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인데.” 이때 등 뒤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러자 타나오윤은 곧장 손을 뻗어 내 목을 틀어쥐었다. 서늘한 눈빛에는 한 점 온기도 없었다. “진하선, 짐이 그토록 원망스럽더냐?” “설마 짐이 차마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한때는 내 몸을 다정히 어루만지던 손이, 이제는 숨을 끊어 놓을 기세로 목을 죄어 왔다. 말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나 타나오윤은 깊이 가라앉은 내 눈빛만으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죽일 수 있으면, 정말 죽여 보라고. 제5화 타나오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 “죽는 것은 네게 너무 쉬운 벌이다. 진하선, 짐은 네가 살아서 평생 고통받기를 바란다!” 그는 다시 달여 온 탕약 한 사발을 내밀었다. 지독하게 쓰고 비린내까지 나는 약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약을 대체 몇 사발이나 마셨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타나오윤은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말 죽어 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히 살게 둘 생각도 없었다. 나는 약사발을 받아 들고 그의 앞에서 단숨에 들이켰다. 타나오윤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예전의 나는 쓴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가 처음 이 약을 가져왔을 때도 마시기 싫다며 사발을 엎어 버릴 만큼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그 뒤로는 매번 타나오윤이 억지로 내 입을 벌려 약을 들이부어야 했다. “진하선, 네가 앞으로도 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군다면 짐도 어디 한번 생각해 보마...” 타나오윤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에게 비석 하나쯤은 세워 주는 것을.” 그 말에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 아이는 분명 타나오윤의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이의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는 일조차 마지못해 베푸는 은혜인 듯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마당에 꿇어앉아 네 잘못을 뉘우치거라. 네 탓에 황후가 놀라고 뱃속 아이까지 위험해졌으니, 그에 대한 벌이다.” 오후의 햇살은 살갗을 태울 듯 독했다. 햇볕을 고스란히 받은 청석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어느새 치맛자락까지 피에 젖어 살갗에 들러붙었다. 지나가던 궁녀들은 일부러 빗자루질을 하며 먼지를 내 쪽으로 쓸어 보냈다. 이때 누군가 낮게 비웃었다. “저 꼴 좀 보아라. 지금 저 모습을 보고 누가 한때 도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인이라 믿겠어?” 다른 궁녀도 곧장 맞장구쳤다. “미색도 총애를 잃으면 다 소용없는 법이지. 폐하께서는 이제 눈길 한 번 주는 것조차 싫어하신다잖아.” 한낮이 깊어갈 즈음, 밖에서 별안간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신은수의 생일 연회에서 한 수인족 장수가 서주(西洲)의 새끼 늑대를 선물로 바친 일이 있었다. 늑대는 본디 피 냄새를 좋아한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날렵한 그림자 하나가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 늑대였지만, 이빨만큼은 벌써 날카로웠다. 마치 작은 칼날이 촘촘히 박힌 듯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놈이 내 팔뚝을 덥석 물더니, 살점 한 조각을 그대로 뜯어 냈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복사꽃잎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주변의 궁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늑대를 떼어 놓으려 하지 않았다. 신은수가 뒤늦게 놀란 척 달려와 말렸을 때는 이미 내 몸 곳곳에서 살점이 뜯겨 나간 뒤였다. 신은수는 늑대를 불러들인 뒤, 짐짓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 이제 막 짐승 다루는 법을 배운 터라 아직 손에 익지 않았네. 그만 동생을 다치게 했으니 이를 어쩌나. 참 미안하게 되었네.” “마마, 마마께서는 지체 높으신 황후이시옵니다. 어찌 저런 천한 계집에게 사과까지 하시옵니까? 설령 저 계집이 짐승에게 물어뜯겨 죽는다 한들, 폐하께서는 마마를 나무라실 리가 없사옵니다.” 신은수의 곁에 있던 궁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거들었다.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데도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눈앞은 온통 핏빛으로 흐려져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소리마저 희미하게 멀어졌다. 문득 아바마마께서도 늑대에게 물려 돌아가셨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아바마마를 덮친 늑대는 몸집이 워낙 커서 사람의 머리쯤은 단숨에 물어뜯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진하선?” “영안아, 영안아...” 제6화 귓가에서 누군가가 쉼 없이 내 아명(兒名)을 불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 이름으로 불려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검은 곤룡포가 보였다. 나는 그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쥔 채,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 “아바마마...” 정말로 오래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서방에 앉아 웃으며 나를 무릎 위에 앉히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곁에서 일부러 글을 틀리게 읽어 나를 허리가 꺾이도록 웃게 하곤 했다. 한편 어마마마께서 손수 만드신 계화떡을 들고 들어오셔서는, 두 분 모두 체통이라곤 없다며 타박하셨다. 그때의 도성은 참으로 활기찼다. 궁궐 담장 밖에는 설탕 공예를 파는 장수가 있었고, 봄만 되면 해자(垓子) 곁 버드나무에서 날린 솜털이 온 하늘을 하얗게 뒤덮었다. 나에게도 한때는 그토록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훗날 타나오윤의 말발굽 아래 산산이 짓밟혔다. 귓가의 목소리가 멎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입안에는 또다시 익숙한 쓴맛이 감돌고 있었다.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타나오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약을 입에 머금어 내게 직접 넘겨주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는 순간, 나는 거부하듯 얼굴을 돌렸다. 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했다. 이내 약사발을 든 손가락이 서서히 굳어졌다. “진하선, 정신이 돌아왔으니, 이제 스스로 약을 들거라!” 그의 입술에는 아직 탕약이 조금 묻어 있었고, 미간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짐이 몸소 약까지 먹여 주었거늘, 감히 거부하는 것이냐?” 나는 그런 타나오윤을 바라보다 문득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한때는 나도 그가 이만큼 가까이 다가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픈 내 이마에 손 한번 얹어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한마디 물어 주기를 그토록 바랐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그가 직접 내게 약을 먹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내가 너무 빨리 죽어 더는 그의 손에 고통받지 못할까 두려워서였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가 시키는 대로 약을 남김없이 마셨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마신 것을 모조리 토해 냈다. 검붉은 피가 함께 쏟아졌고, 그 안에는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작은 유충 몇 마리가 뒤섞여 있었다. 타나오윤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타나오윤의 낯빛이 삽시간에 변했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했고, 이내 눈빛에 당혹과 두려움이 번졌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감정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진하선,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에게 남은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폐하... 저 이제 곧 죽사옵니다.” “짐이 허락하지 않는다!” 타나오윤은 또다시 아이의 유골을 들먹여 나를 협박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눈과 코, 입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와 어느새 이부자리까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열린 창으로 복사꽃잎 몇 장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그제야 타나오윤은 내 옷깃과 소매 아래까지 번진 붉은 반점도 보았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반점은 어느새 가슴께까지 빽빽하게 번져 있었다. 타나오윤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게 닿기 직전,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쉰 목소리로 불렀다. “영안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타나오윤의 떨리는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그제야 그는 내 두 눈이 이미 영영 감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작별 인사 한마디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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