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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스며든 아픔
셋째 황자 강도현이 유배되던 해, 아버지는 나와 함께 시체 더미에서 그를 업어 데려왔다. 그제야 아버지가 한때 그의 태부(太傅)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격을 피하고자 강도현과 나는 시골에 숨어서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갔다. 닭과 물고기를 키우며, 해가 뜨면 함께 밭일했다. 그는 허름한 사철의 보살님 앞에서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서라는 내 유일한 부인이다." "권세도 부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셋이 평안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선황이 승하하시고 나라에 주인이 사라지자, 그는 역심을 품어서 검을 들고 경성으로 쳐들어갔다. 떠나기 전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나를 경성으로 데려가 함께 천하를 누리겠다고 약속했다. 두 해가 지나자, 우리 아들 지민도 옹알이를 시작했다. 마침내 나를 경성으로 데려갈 마차가 왔다. 하지만 경성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재상의 딸 백유리가 이미 중궁의 주인이 되어 황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가장 낮은 품계인 답응(答應)에 봉해졌을 뿐이었다.
챕터 (1)
第1章
셋째 황자 강도현이 유배되던 해, 아버지는 나와 함께 시체 더미에서 그를 업어 데려왔다.
그제야 아버지가 한때 그의 태부(太傅)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격을 피하고자 강도현과 나는 시골에 숨어서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갔다.
닭과 물고기를 키우며, 해가 뜨면 함께 밭일했다.
그는 허름한 사철의 보살님 앞에서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서라는 내 유일한 부인이다."
"권세도 부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셋이 평안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선황이 승하하시고 나라에 주인이 사라지자, 그는 역심을 품어서 검을 들고 경성으로 쳐들어갔다.
떠나기 전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나를 경성으로 데려가 함께 천하를 누리겠다고 약속했다.
두 해가 지나자, 우리 아들 지민도 옹알이를 시작했다.
마침내 나를 경성으로 데려갈 마차가 왔다.
하지만 경성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재상의 딸 백유리가 이미 중궁의 주인이 되어 황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가장 낮은 품계인 답응(答應)에 봉해졌을 뿐이었다.
제1화
지민마저 내 품에서 빼앗겨 황후의 손에서 자랐다.
강도현은 내게 온갖 호사를 베풀었지만, 아들만큼은 끝내 내게 보여 주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봉의궁(鳳儀宮)에 문안드리러 갔다. 내 친아들이 백유리의 곁에서 "어마마마"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궁에 들어온 지 다섯 해째 되던 해, 나는 백유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후마마, 부디 은혜를 베푸시어 제가 궁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영남(嶺南)으로 돌아가 설을 보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묘 곁에 묻히고 싶었다.
...
백유리는 높은 자리에 앉아 손톱에 끼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라야, 대체 왜 이러느냐?"
"이 넓은 후궁에는 우리 둘뿐이잖니?"
"폐하께서도 내 뜻대로 너를 외면하시지 않고 매달 한 번씩 네 처소에 드시지 않느냐?"
"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총애는 그저 의례적인 일에 불과하며 시골 아낙인 나에게 베푸는 은혜였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피비린 맛을 삼키며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저는 천한 팔자라 궁에서 누리는 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디 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백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고집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했다.
"됐다. 네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면 나도 더는 붙잡지 않겠다."
"내일 밤, 내 곁의 최 상궁에게 너를 경성 밖까지 데려다주라 이르겠다."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출궁패를 받아 나는 별전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등불을 밝혀 놓고 마지막 한 땀까지 꿰매 마무리했다.
지민에게 주려고 만든 새 신발 한 켤레였다. 전에 밤을 새워 지어 둔 노란 비단 두루마기까지 갖추니 꼭 한 벌이었다.
다음 날, 궁을 나가기 전 나는 몰래 상서방(尙書房) 밖에서 지민을 기다렸다.
지민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키가 이미 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지민..."
나는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나는 황급히 옷과 신발을 내밀며 조심스레 웃어 보였다.
"이 옷감은 반년 동안 받은 월봉을 아껴 마련한 것이다. 내가 직접 지었으니 한번 입어 보고 잘 맞는지 보거라."
지민은 옷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옷은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었다.
"천한 주제에 내 옷 만들어 줄 자격도 없다."
고작 여덟 살인 지민이 차갑게 얼굴을 굳힌 모습은 강도현을 쏙 빼닮아 있었다.
"나는 네..."
"네가 내 친어머니라고 뭐 어때서?”
지민은 목소리를 높였고, 어린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어마마마는 지금 황후마마다!"
"상서방의 모든 벗이 내가 시골 아낙을 친어미로 두었다고 비웃게 만들 셈이야?"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칼에 찔린 듯 아파 온몸이 떨렸다.
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죽기 전에 지민이 내게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라고 불러 주는 걸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질색한 듯 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한서라, 또 지민에게 무슨 짓을 하라고 부추긴 것이냐?"
그때 머리 위에 차갑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등줄기가 굳어지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강도현이 밝은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봉황 무늬 예복을 차려입은 백유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서늘하게 번뜩이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도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지 않는 것이냐?"
나는 멍하니 차가운 청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도현은 몇 걸음 다가와 내가 손수 지은 옷을 그대로 발로 짓밟았다.
"한서라, 내가 지민의 출생을 함부로 밝히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느냐?"
"정녕 네가 친어미라는 이유로 지민이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 셈이냐?"
"황후가 지민을 예의도 바르고 사리도 분명하게 가르쳤잖니?”
"그런데 너는 오히려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는구나!"
"한서라, 설마 지민을 이용해 총애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냐? 똑똑히 일러두마. 지민에게는 절대로 태자의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에게는 아들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도 총애를 탐하는 일이었고, 친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조차 권력을 탐하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지워 버리고 싶은 오점이 되어 버렸다.
백유리가 때맞춰 강도현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서라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 방법을 잘못 택했을 뿐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강도현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고, 눈빛이 순식간에 다정해졌다.
다시 나를 바라볼 때는 뼛속까지 시린 냉정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분수나 지키고 조용히 살 것이지!"
"짐의 명을 전하거라. 오늘부터 한 답응을 별전에 가두고, 내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거라!"
"앞으로는 황후에게 문안드릴 필요도 없다. 눈에 거슬리니!"
나는 궁인들에게 거칠게 끌려 일어났다.
백유리가 내 곁을 지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 네가 궁을 나가는 일은 내가 알아서 마련해 두마."
제2화
한밤중, 별전의 문이 몰래 열렸다.
최 상궁이 도둑처럼 슬그머니 들어와 내게 거친 베로 만든 내시 옷 한 벌을 건넸다.
"한 답응, 어서 갈아입으십시오. 마차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궁문을 나서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최 상궁에게 황급히 떠밀려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멈춰 섰다.
마차 휘장이 거칠게 젖혀지며 독한 싸구려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마부는 음흉한 낯빛으로 손을 비비며 내게 달려들었다!
"최 상궁이 널 내게 넘겼으니 오늘 내가 제대로 예뻐해 주마!"
나는 매우 놀라 안색이 변한 채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네가 감히! 당장 꺼지거라!"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비녀를 뽑아 그를 찔렀다.
그는 아픔에 몸을 움찔하더니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쫙 소리와 함께 내 겉옷이 찢어졌다.
"살려주시오!" 나는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 수많은 횃불이 갑자기 밝혀지며 칠흑 같은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여봐라! 간통이다!"
"한 답응이 궁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치려 합니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마차를 빈틈없이 에워쌌다.
나는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마차에서 끌려 내려와 헌 누더기처럼 바닥에 내던져졌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자, 강도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서라, 네가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눈물이 입가의 피와 뒤섞여 흘러내렸다.
"사내와 눈이 맞은 게 아닙니다! 황후마마께서 저를 궁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저 마부가 저를 겁탈하려 한 것입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런데 강도현이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래서 나의 귀가 윙윙 울리고 눈앞이 핑 돌더니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천한 것! 감히 황후마마께 죄를 뒤집어씌우느냐?"
"황후는 어질고 자애로워 짐에게 네 처소에 자주 들르라고까지 하셨다. 그런데 너는 어떠했느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천한 마부와 정을 통하다니! 네 눈에는 짐이 죽은 사람으로 보이느냐?"
강도현은 곁에 있던 호위의 검을 거칠게 뽑아 마부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피가 내 얼굴에 튀었고 뜨거웠지만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제야 백유리가 궁녀의 부축에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이 광경을 보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폐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서라가 낮에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제가 몰래 편의를 봐주어 보내 주려 했는데..."
"제 출궁패를 빌려 사내를 만나러 갈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으니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최 상궁도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 전 분명히 한 답응이 저 마부와 눈을 맞추는 것을 직접 보았나이다. 게다가 금비녀까지 건네며 정표로 삼았옵니다!"
강도현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금비녀에 꽂혔다.
그것은 그가 영남에 있을 때 몇 달 동안 돈을 모아 내게 선물해 준 유일한 장신구였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서라, 훗날 네게 금은보화를 얼마든지 안겨 주마."
그런데 이제 저 비녀는 내가 사내와 정을 통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 버렸다.
강도현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리고 검으로 내 목을 겨눴다.
"한서라, 네 아비의 옛정을 봐서 네 목숨은 살려 주마."
"그토록 천한 짓을 좋아한다면, 짐이 네 뜻을 이루어 주마!"
"여봐라! 찰형(拶刑)을 시행하라!"
"사내를 꼬드기는 저 손으로도 그 볼품없는 옷가지를 다시 지을 수 있는지 보겠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내가 칼질하다 손가락을 베기만 해도 가슴 아파 눈물까지 흘리던 사람이, 이제는 내 열 손가락을 부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열 손가락을 짓누르는 고통이 가슴까지 파고들며 형구가 조여드는 순간 나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텅 빈 전각 안에 메아리쳤다.
나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다시 깨어났다.
강도현은 나를 내려다보며 혐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한서라, 영남에서 너와 혼인한 것이 내 평생 가장 큰 치욕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양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드린 나는 문득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은 피와 뒤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도현, 알고 보니 지난 십 년의 정이 네게는 치욕이었구나.’
‘하지만 그때 너를 살리려고 내가 독혈을 빨아냈고, 이제 그 병이 다시 도져 손쓸 수도 없으니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너희는 속이 시원하겠지.’
제3화
찰형을 당한 뒤 나는 다시 별전으로 내쳐졌다.
두 손은 완전히 망가져 퉁퉁 부었고,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기침을 쏟아 냈다.
토해 낸 피는 어느새 선홍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강도현은 왕 태의를 한 번 보내 진맥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백유리의 사람이었다.
그는 싸구려 지혈약 한 봉지만 내던지고 말았다.
돌아가서는 강도현에게 내 상처는 그저 찰과상일 뿐이며, 일부러 아픈 척하며 동정을 사려 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사흘 내내 누워 있으며 고열에 시달렸다.
어렴풋이 별전의 문이 걷어차이며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강도현인 줄 알고 힘겹게 눈을 떴는데 아들이 보였다.
지민은 화려한 비단 옷을 차려입고 손에 채찍을 든 채, 차갑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방탕한 년아, 왜 아직도 죽지 않았어?"
그의 첫마디에 나는 그대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는 망가진 두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지민아... 그런 게 아니다... 어머니는 누명을 쓴 거..."
휙! 지민이 채찍으로 내 침상을 후려쳤고,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닥쳐! 내 어머니라고 하지 마!"
여덟 살 어린아이의 눈에는 매서운 노기가 가득했다.
"네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탓에 어제 아바마마께서 크게 노하셔서 어마마마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꾸짖으시고, 불경을 백 번 베껴 쓰라고 벌까지 내리셨어!"
"내 어마마마는 너 때문에 손목까지 퉁퉁 부으셨다고!"
"이 천한 것, 대체 왜 아직도 살아서 우리 모자를 괴롭히는 거지?"
내 열 손가락은 모조리 부러져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지만, 그는 보지도 못했다.
백유리가 불경을 몇 번 베껴 쓴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 아파하며 내게 채찍을 휘둘렀다.
"지민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나는 목숨까지 걸고서야 너를 낳았다."
"그때 영남에서 큰 눈이 내려 산길이 모두 막혔을 때, 네가 고열에 시달려서 내가 너를 품에 안고 눈밭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의원에게 너를 살려 달라고 빌었..."
"그만해!"
지민은 두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잘 들어. 네가 정말 나를 아낀다면 당장 죽어 버려!"
"네 추잡한 짓이 세상에 드러나서 내가 음탕한 년이 낳은 사생아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지 말고!"
욕을 퍼부은 지민은 바닥에 세차게 침을 뱉고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음탕한 년이 낳은 사생아..."
나는 그 말을 되뇌면서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불씨마저 완전히 꺼졌다.
이제는 울 힘조차도 없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전교를 전하는 내시가 도착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오늘 연회에 한 답응을 들여 함께하시라 하셨습니다."
잡역 궁인 둘이 나를 침상에서 억지로 끌어 내려 색이 바랜 궁중 의복으로 갈아입혔다.
태화전(太和殿)에 도착하니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술잔이 쉴 새 없이 오갔다.
강도현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곁에는 꽃처럼 환하게 웃는 백유리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얌전하고 영특한 강지민이 앉아 있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세 식구였다.
나는 구석 자리에 억지로 눌러 앉혀졌다.
강도현은 귀신처럼 창백한 내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내게 제비집 한 그릇을 내렸다.
"몸이 약하면 보양이라도 해야지. 어찌 그 꼴로 다니느냐?"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가갔다. 두 손이 망가져 그릇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제비집이 백유리의 치맛자락에 쏟아졌다.
"악!"
백유리가 놀라 소리쳤다.
강도현이 벌떡 일어나 나를 거칠게 밀쳐 넘어뜨렸다.
"그릇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손을 어디에 쓰겠느냐?"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검은 피를 한가득 토해 냈고, 피가 강도현의 황금색 용무늬 장화에 튀었다.
"폐하... 제 손은... 폐하께서 찰형을 명하셔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전각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강도현은 순간 굳어 버렸고,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강도현..."
나는 궁에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추격당할 때 아버지가 대신해 칼을 맞고 다리까지 부러지셨습니다."
"그 뒤에도 아버지는 당신이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추격병을 유인하다가 수많은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부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저를 보내주십시오..."
강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굳었다.
마치 아픈 곳을 찔린 듯 그는 버럭 화를 냈다.
"한서라! 또 지난 은혜를 내세워 보답을 강요하는 것이냐?"
"네 아비가 짐을 구한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것일 뿐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감히 죽은 사람을 내세워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
그는 전각 밖에 몰아치는 눈보라를 가리켰다.
"당장 꺼져 눈밭에서 무릎을 꿇어라! 네가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일어나지 말거라!"
제4화
내 온몸에 눈이 쌓이고 뼛속까지 시렸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정신이 흐릿해지며 다시 영남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해 섣달그믐날, 아버지는 술에 취했고, 강도현은 서툰 손길로 부엌에서 내게 만두를 빚어 주었다.
코끝에 밀가루를 묻힌 모습이 꼭 얼룩 고양이 같았다.
그는 나를 품에 안고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라, 나중에 살림이 나아지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를 마당에 가득 심어 주마."
"정말 좋았는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눈밭에서 기어가며 긴 핏자국을 남겼다.
궁을 나가야 한다. 남쪽으로 가야 한다. 영남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은 점점 거세게 내려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태화전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도현,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아버지가 너를 구하게 두지 않겠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가슴을 파고들던 익숙한 통증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태화전 안의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강도현은 조금 취한 채 곁의 단정하고 현숙한 백유리를 바라보며 마음이 흡족했다.
그런데도 왠지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답답하고 어수선했다.
그는 전각 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한 답응도 이제는 잘못을 깨달았겠지?’
"가거라."
강도현이 곁에 있던 내시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밖에 나가서 한 답응을 살펴보거라."
"잘못을 뉘우쳤다면 별전으로 데려가 태의에게 살펴보게 하고 몸을 잘 추스르게 하거라."
내시가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백유리의 눈에 순간 어두운 빛이 스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역시 마음이 어지십니다."
"서라가 큰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폐하를 모셨던 사람이니, 저도 서라가 잘못을 뉘우치길 바랍니다."
강도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역시 너는 사려가 깊고 국모다운 품격도 갖춰서 한 답응과는 달라..."
그때 전각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눈보라가 안으로 들이쳤다.
내시가 허겁지겁 전각 안으로 뛰어들어 바닥에 엎어지며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강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허둥대서야 무슨 꼴이냐? 한 답응이 잘못을 뉘우쳤느냐?"
내시는 금색 벽돌 바닥에 머리를 연신 찧었다.
"폐, 폐하..."
"한 답응께서... 훙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