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GoodNovel new 완결

추석 연휴를 맞아 퇴근하기 직전, 여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이사한 집 주소라며 새 주소를 올렸다. 나는 그 주소를 따라서 버스를 무려 5번이나 갈아타면서 찾아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건 황량한 산과 잡목 숲뿐이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동생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빙고! 장난 성공! 마지막 버스도 떠났으니, 이제 어떡할래?]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지만, 부모님은 배를 잡고 웃으셨다. [그런 말도 믿다니. 저 멍청한 꼴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네.] [우린 추석에 가족끼리 밥 먹을 거니까, 너는 알아서 걸어와.] 그러고는 내가 누구를 더 닮았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절망한 순간, 나는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또 익숙한 배경음이 들려왔다. 남자친구의 비웃음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지아야, 방금 네 부모님한테 다 들었어. 그냥 혼자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처음 당하는 장난도 아닌데, 이제 와서 예민하게 굴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는 무정하게 끊겼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울면서 다시 전화를 걸어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보이는 집집마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지쳐버렸다. 여동생은 추석마다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고, 온 가족은 늘 그 장난에 맞장구를 쳤다. 재작년에는 복숭아털을 물컵에 넣어서 내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작년에는 샴푸를 제모크림으로 바꿔 놓아서 내 면접을 망쳤다. 올해는... 가족 모두가 내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여동생과 짜고 나를 속여서 교외로 보냈다. 그리고 가족들은 식탁에 앉아서 내가 몇 분 만에 애원할지 내기를 걸고 있었다. 나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나 혼자서라도 끝내기로 했다.

챕터 (1)

第1章

추석 연휴를 맞아 퇴근하기 직전, 여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이사한 집 주소라며 새 주소를 올렸다. 나는 그 주소를 따라서 버스를 무려 5번이나 갈아타면서 찾아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건 황량한 산과 잡목 숲뿐이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동생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빙고! 장난 성공! 마지막 버스도 떠났으니, 이제 어떡할래?]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지만, 부모님은 배를 잡고 웃으셨다. [그런 말도 믿다니. 저 멍청한 꼴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네.] [우린 추석에 가족끼리 밥 먹을 거니까, 너는 알아서 걸어와.] 그러고는 내가 누구를 더 닮았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절망한 순간, 나는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또 익숙한 배경음이 들려왔다. 남자친구의 비웃음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지아야, 방금 네 부모님한테 다 들었어. 그냥 혼자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처음 당하는 장난도 아닌데, 이제 와서 예민하게 굴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는 무정하게 끊겼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울면서 다시 전화를 걸어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보이는 집집마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지쳐버렸다. 여동생은 추석마다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고, 온 가족은 늘 그 장난에 맞장구를 쳤다. 재작년에는 복숭아털을 물컵에 넣어서 내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작년에는 샴푸를 제모크림으로 바꿔 놓아서 내 면접을 망쳤다. 올해는... 가족 모두가 내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여동생과 짜고 나를 속여서 교외로 보냈다. 그리고 가족들은 식탁에 앉아서 내가 몇 분 만에 애원할지 내기를 걸고 있었다. 나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나 혼자서라도 끝내기로 했다. 제1화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모니터링 화면에는 가족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핸드폰 4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가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서 살려 달라고 빌 거라고 내기를 하는 중이었다. 여동생 하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1분.] 10살 추석때, 하지연은 내가 키우던 강아지에게 독을 먹였다. 나는 울부짖으며 항복하고, 부모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울부짖으며 난리를 치는데도 부모님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연이 너랑 장난 좀 친 거야. 개가 죽으면 또 한 마리 사주면 되지.” 강아지는 내 품 안에서 경련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 정확히 1분이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이 사주겠다고 했던 새 강아지는 아무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 [5분.] 가족과 함께 먹었던 유일한 추석 식사 자리에서, 하지연은 내 콜라를 농약으로 바꿔치기했다. 나는 배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다가 5분 만에 결국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날 나는 병원에서 위세척을 했고, 가족은 C시로 달구경을 갔다. 그 후로 나는 하지연의 장난이 두려워서 가족과 추석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 주호민은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바쁜 업무에도 매년 휴가를 내서 나와 함께해 주었다. 그런데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주호민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외투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주호민에게 위치를 전송하려던 순간, 그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췄다. 주호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아가 오늘 밤 절대 전화해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저 교외 지역의 통신 기지국은 우리 회사 관할이거든.] [내가 방금 비서한테 점검 공지를 내리라고 했어. 오늘 자정이 지나면 지아가 있는 지역은 신호가 완전히 끊길 거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움과 기쁨에 들뜬 하지연이 달려와서 주호민을 껴안았다. [그래서 오빠가 굳이 장소를 교외로 바꾸자고 한 거구나.] [역시 오빠는 최고의 장난 전문가라니까!] 예전의 주호민은 내가 이 지역 근처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주호민은 이곳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서 노숙자도 많고 들개도 있어서 위험하다고 했다. 내가 위험한 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주호민은 하지연의 장난 게임에 맞춰주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밤새 내버려두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가족들은 장난 게임에 든든한 조력자가 한 명 더 생겼다며 환호했고,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내 마음속 마지막 기대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핸드폰 신호가 아직 1분 정도 남아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사흘 뒤 밀라노로 장기 파견되는 근무 신청에 답장을 보냈다. 전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이 아니었다. 이 집까지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자, 핸드폰은 신호 하나 잡히지 않는 벽돌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한참 걷다 보니, 이상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정말로 묘하게 용감해지는 것 같았다. 제2화 다음 날 동이 트자, 나는 흙과 물에 젖은 바짓단을 질질 끌며 첫차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에게 부탁해서 핸드폰을 충전할 보조배터리를 빌렸다. 하룻밤 내내 꺼져 있던 핸드폰을 켜자,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가 100개 넘게 쏟아져 있었다. 하지연이 올린 달구경 사진도 있었고, 부모님이 보내주신 추석 용돈 이야기도 있었다. 주호민이 직접 만든 요리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온 건 회사뿐이었다. [며칠 동안은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 가면 10년 동안 파견 근무하게 되니, 돌아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세요. 모레 정시에 출발합니다.] 나는 집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손에는 테마파크 입장권 5장이 들려 있었다. 한 달 내내 야근해서 번 돈으로 가족 모두를 위해 준비한 추석 선물이었다. 원래는 다 같이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몫 한 장만 남기고, 나머지 4장은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문이 갑자기 안에서 열렸다. 하지연이 내 손목을 잡더니 거칠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주호민은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 위로 양동이에 담긴 찬물을 들이부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연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난 언니가 먼저 울 거라고 했어!” 주호민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지아가 먼저 화를 낼 거라고 했고.” 부모님은 물에 흠뻑 젖어 꼴이 말이 아닌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지아 반응 좀 보자. 내기에서 진 사람은 딱밤 세 대씩 맞기!” 그제야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지연의 이마 앞에 손을 내밀었다. “다들 졌네. 한 사람당 딱밤 세 대야.” 하지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 주호민이 순간적으로 나를 거칠게 밀쳤다. “하지아, 너 뭐 하는 거야?!” 부모님도 새끼를 감싸듯 하지연을 두 사람 사이에 꼭 끌어안았다. “이게 그렇게까지 따질 일이야? 가족끼리 장난치고 웃고 그러는 거지. 너만 왜 그렇게 사소한 걸 가지고 난리야?” 사실 나는 하지연의 이마에 딱밤을 때릴 생각이 없었다. 만약 다친 사람이 하지연이었다면, 가족들도 이렇게 재미있어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그 답은 알았다. 바닥에 떨어진 테마파크 입장권 네 장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채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하지연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보다가 입장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발끈했다. “고작 이런 종이 쪼가리 몇 장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 부모님이 진작에 나 데리고 갔다 왔거든.” “장난도 못 하는 주제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허공에 내민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늘 동생처럼 부모님을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달 부모님이 무심코 흘리듯 말했던 말을 기억해 두었다. “언젠가 가족끼리 테마파크에 가고 싶네.” 그런데 알고 보니 부모님은 이미 다녀온 뒤였다. 결국 그 사람들이 말하는 ‘가족’에 처음부터 나는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에게 명령했다. “지연이가 놀랐잖아. 사과해!” 주호민도 나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야, 모레가 약혼식이잖아. 가족끼리 너무 험하게 굴면 너한테도 좋을 게 없어.” 말만 들으면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호민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하지연의 편이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 집에 돌아온 건 주호민에게 약혼을 취소하자고 말하려던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약혼식을 이용해서 가족들을 위한 특별히 준비한 나만의 장난을 완성하기로 했다. 나는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 하지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지연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흥,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고는 뒤돌아서 부모님과 주호민을 바라보며 몰래 웃었다. “모레 약혼식은 내 장난의 최고 걸작이 될 거야.” “두고 봐. 제대로 당하게 해줄 거야.” 제3화 주호민이 약혼식 준비를 하지연에게 맡기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몇 번이고 내게 장담했다. “약혼식도 결혼식이나 다름없어. 평생 한 번뿐인 날이잖니.” “우리가 어떻게 이런 중요한 날에 지연이가 마음대로 장난치게 내버려두겠어.” 주호민 역시 몇 번이나 나를 설득했다. “지연이는 그저 네가 준비할 게 많을까 봐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예비 신부가 되도록 도와주려는 거야.” 그 말을 믿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하지연과 함께 쇼핑을 나간 사이에, 나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지아의 행복한 추억’이라고 적힌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그리고 영상을 재생한 순간,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익숙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상 속에는 내가 12살이던 생일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부모님과 하지연은 번갈아 가며 나를 달래면서 생일 케이크를 먹였다. 나는 입안에 검고 하얀 덩어리를 가득 머금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 이 케이크는 뭐로 만든 거예요? 나 진짜 더는 못 먹겠어요.] 내가 케이크를 다 먹자, 10살이었던 하지연은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웃음을 참더니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소똥이랑 구더기로 만든 거야. 이 멍청이야!] [우리 언니 진짜 배가 고팠나 봐. 별걸 다 먹네!] 내가 미친 듯이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억지로 토해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핸드폰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 만큼 웃었다. 화면은 가족들의 웃음에 따라 계속 흔들렸다. 곧이어 다음 영상이 재생됐다. 잠에서 깼다가 이불 속에 뱀이 있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나.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공포에 질린 나. 그리고 내가 짝사랑하던 남학생에 대한 일기를 하지연이 공개해 버려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두꺼비 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나. 내가 가장 추하고 가장 처참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들을 하지연은 장난 영상 모음집으로 만들고 특수 효과음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그 영상은 내가 가장 행복해야 할 약혼식 날,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더 끔찍한 건 이 모든 사실을 부모님도 알고 있었고, 주호민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손발이 싸늘하게 식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한 역겨움이 밀려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구역질을 하며 토해냈다. 겨우 속이 진정되자,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영상 파일을 하나씩 삭제했다. 대신 내가 준비해 둔 녹음과 영상을 그 자리에 넣었다. 가족들이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자 엄마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약혼식 드레스 찾아왔어. 한번 입어보렴.” 나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하지연이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굴어. 피해망상도 아니고. 무슨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괴롭히려고 하는 줄 알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모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 엄마. 정말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거예요?” 두 사람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었다. “이 바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장난은 장난이고, 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니.” 두 사람은 내 손을 잡았고, 마치 내일의 장난 게임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주호민이 다가와 내서 허리를 감싸안았다. “됐어. 지연이는 원래 저런 성격이잖아.” “네가 싫다면, 내가 형부로서 앞으로는 지연이한테 제대로 주의를 줄게.” 주호민은 가볍게 한마디로 상황을 넘겼다. 나는 네 사람의 눈빛에 어린 기대감을 모른 척했다. 내일 내가 얼마나 처참하게 망신을 당할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말없이 주호민의 손을 허리에서 떼어냈다. “엄마, 아빠, 고마워. 그리고 지연이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 만큼, 약혼식 날 나도 모두에게 준비한 선물이 하나 있어.” 제4화 부모님은 내가 드디어 철이 들었다며 흐뭇해하셨다. 그날 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주호민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 역시 후련한 표정이었다. “사실 요즘 계속 고민했어. 너랑 정말 약혼해야 하는 건지.” “넌 성격도 까칠하고 겁도 많잖아. 지연이가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것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 “그런데도 지연이한테 선물까지 준비한 걸 보니, 나도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었어.” 나는 짐을 싸던 손을 멈췄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지연이랑 같이 나한테 장난을 친 게... 나를 시험한 거야?” 주호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 동생 하나도 받아주지 못하는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아내로 맞이하겠어?” 그 말을 남긴 주호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방을 나갔다. 약혼식 당일, 출발하기 전까지 하지연은 몇 번이나 내게 신신당부했다. “언니, 꼭 흰색 차 타고 와. 흰색이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길한 색이잖아. 언니랑 오빠 결혼에도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부모님도 맞장구쳤다. “지연이가 아침 일찍부터 세차까지 해놨어. 그러니까 지연이 성의를 절대 저버리면 안 돼.”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약혼식장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족과 주호민이 다른 검은색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뒤, 나는 짐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일부러 주차장에 들러서 하지연이 타라고 지정한 흰색 차를 확인했다. 타이어 네 개 중 세 개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만약 저 흰색 차를 타고 약혼식장까지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족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 한편 약혼식장에서는 부모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연의 이번 장난을 실현해 주기 위해서, 부모님은 하지아와 아는 사람이라면 모조리 초대했다. 유치원 시절 친구부터, 고작 한 번 마주쳤던 경비 아저씨까지. 모두에게 하지연이 공들여 만든 장난 영상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주호민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혼식 시작까지 3분 남아 있었다. 주호민은 하지연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는 정말 문제없는 거 맞아? 혹시 지아가 못 오면 어떡하려고?” 하지연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오빠, 걱정하지 마. 설령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언니는 기어서라도 여기까지 올걸?”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20년 넘게 언니한테 마음 놓고 장난칠 수 있었는지 알아?” 주호민이 고개를 돌렸다. “왜?”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곁에서 자랐잖아. 언니는 5살이 되어서야 부모님한테 왔고.” “언니는 부모님한테 사랑받고 싶어 했어. 그래서 계속 부모님한테 잘 보이려고 했고, 오빠한테도, 나한테도 잘 보이려고 했어.” “그러니까 죽도록 괴롭혀도 결국엔 꼬리를 치면서 다시 돌아올 거야.” 하지연은 확신에 차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하지연은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하지만 약혼식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도록, 모든 하객이 자리에 앉았는데도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아파트 관리실에 물어보고 나서야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가 있던 흰색 차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파트 주차장을 한 번도 빠져나간 적이 없었다. 하지연은 급히 집에 설치된 영상을 확인했다. 집에는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 주호민은 몇 번이고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번번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음만 돌아왔다. 주호민이 초조하게 나를 찾고 있을 때, 마침 하지아와 예전에 함께 일했던 상사가 약혼식 초대장을 들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났다. “이상하네. 지아 씨는 밀라노로 발령받아서 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약혼식이라니...” 주호민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약혼식장 대형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됐다. 그 화면에 나온 내용은 부모님과 하지연의 얼굴을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세 사람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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