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모션 로딩 중...
긴 항해의 끝, 인생은 시작된다
절친이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아기를 안고 어르며 놀아 주었다. "아가야, 착하지? 나는 이모고, 이쪽은 삼촌이야." 곁에 서 있던 서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삼촌 아니야. 아빠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당기더니 다시 말했다. "내 아이야." "네 아버지 돌아가신 날, 나연이랑 밤새 잤어. 콘돔도 한 갑이나 썼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목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하지만 우리, 어제 혼인 신고했잖아." 서지훈은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 나랑 걔는 기껏해야 잠자리 상대야. 결혼할 거였으면 진작 했지." 말을 잇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짓궂은 악의를 담아 말했다. "나연이가 아직도 너한테 숨겼어? 우리 예전에 사귀었어. 걔 첫 남자도 나고."
챕터 (1)
第1章
절친이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아기를 안고 어르며 놀아 주었다.
"아가야, 착하지? 나는 이모고, 이쪽은 삼촌이야."
곁에 서 있던 서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삼촌 아니야. 아빠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당기더니 다시 말했다.
"내 아이야."
"네 아버지 돌아가신 날, 나연이랑 밤새 잤어. 콘돔도 한 갑이나 썼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목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하지만 우리, 어제 혼인 신고했잖아."
서지훈은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 나랑 걔는 기껏해야 잠자리 상대야. 결혼할 거였으면 진작 했지."
말을 잇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짓궂은 악의를 담아 말했다.
"나연이가 아직도 너한테 숨겼어? 우리 예전에 사귀었어. 걔 첫 남자도 나고."
제1화
어떻게 병원을 나와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지훈이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웨딩 사진을 바닥에 내던져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던 결혼 축하 장식은 모조리 찢어 버렸고, 신혼 침대까지 망가뜨렸다.
현관에 선 서지훈은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피웠다.
그러고는 다가와 내 손을 살폈다.
"다친 데 없어?"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가슴을 들끓던 분노를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따져 물었다.
"왜 그랬어?"
서지훈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너랑 결혼한 이유를 묻는 거야?"
그는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불쑥 웃었다.
"넌 꼼꼼하고 성격도 무던하잖아. 나를 위해 일까지 포기하고 배우 활동도 접은 채 집에 있어 줄 수 있으니 아내로는 딱이지."
"나연이는 철없고 제멋대로인 공주님이라 집안일은 기대도 못 하거든."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을수록 가슴은 더 지독하게 아팠다.
내 눈에 맺힌 눈물을 보자 서지훈은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만해. 말했잖아, 나랑 걔는 안 된다고."
"앞으로도 기껏해야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사이일 뿐이야."
나는 그를 세차게 밀어내며 울부짖었다.
"왜 나한테 이래? 걔랑 아이까지 낳아 놓고 왜 나랑 결혼했냐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나를 철저히 속이고 바보로 만들었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헐떡였다.
서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사람 보듯 나를 바라봤다.
한참 뒤,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만 좀 해. 나연이가 내가 끓여 주는 닭고기 수프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남자를 꼼짝도 않고 바라봤다.
능숙하게 불을 켜고, 재료를 썰고, 국물 위 거품을 걷어 내는 모습을.
함께한 삼 년 동안 그는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요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다.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그가 사실은 요리를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문득 예전에 정나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전 남자 친구가 자신의 편식을 고쳐 주겠다며 매일 부엌에서 요리를 연구했다고 했다.
한 번은 집 부엌을 날려 먹기까지 했다고.
나는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모든 것이 정나연에게 들었던 기억 속 세세한 이야기와 하나씩 포개졌다.
평소 애써 외면했던 수많은 순간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운전할 때면 정나연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선글라스를 서지훈 앞에 내밀었다.
같이 밥을 먹다가는 불쑥 말하곤 했다.
"지훈이는 파 안 먹어."
정나연이 넘어지면 서지훈은 늘 나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정나연이 아프면 회의실에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병원으로 달려갔다.
...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지훈."
"우리 이혼하자."
제2화
그제야 서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벨소리가 끼어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왜, 우리 공주님?"
"수프는 끓이고 있어. 심심하면 아기랑 놀고 있어."
그러다 문득 말이 끊겼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상대에게 답했다.
"걔는 몰라. 걱정 마."
통화를 끝낸 그가 나를 바라봤다.
"나연이는 내가 다 말한 줄 몰라."
"모르는 척해 줘. 걔도 너랑 친구 사이가 깨지는 건 싫대."
말을 마친 그는 수프를 보온 용기에 담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는 그를 불러 세우고 다시 말했다.
"이혼하자."
그가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혼인 신고한 지 하루밖에 안 됐잖아. 무슨 이혼이야?"
"남들 웃음거리 되려고 그래? 체면 좀 지키고 그만해."
나는 손에 잡힌 꽃병을 집어 들어 그의 앞에 힘껏 내던졌다.
나는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유난을 떤다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있을 때, 둘이 뒹굴면서 내 체면은 생각했어?"
"애까지 낳아 놓고 나한테 무슨 낯으로 체면을 지키래?"
하필 그 순간,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무심히 한마디만 던졌다.
"미쳤네."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며 정나연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보민아,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갔네.]
[우리 아들 아직 못 봤지?]
[서지훈이랑 신혼여행은 언제 가?]
[지훈이도 진짜 너무해. 하필 내가 애 낳는 날 너랑 혼인 신고를 해서 네가 내 산후조리도 못 도와주잖아. ㅠㅠ]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그래도 내 걱정은 하지 마. 아기 아빠가 와서 돌봐 주고 있으니까.]
뒤이어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사진 속에서는 남자의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젖병을 쥐고 있었다.
약지에는 나와 똑같은 결혼반지까지 끼워져 있었다.
온몸이 떨려 휴대전화조차 제대로 쥘 수 없었다.
이제는 나를 속이는 시늉조차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결혼반지마저 빼지 않았으니까.
그때 정나연이 SNS에 새 글을 올렸다.
딱 한 문장이었다.
[이번에는 가지 말라고 하면, 내 곁에 있어 줄래?]
바로 다음 순간, 서지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신혼여행은 너 혼자 먼저 다녀와.]
가슴이 세차게 조여 왔다. 숨이 거칠어지고 온몸이 떨렸다.
힘겹게 정나연의 게시물 아래에 한 줄을 입력했다.
[굳이 돌려 말하지 마. 내가 둘이 잘되게 비켜 줄 테니까.]
댓글을 남긴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쌌다.
내 손으로 하나씩 꾸민 신혼집이었지만 단 한 순간도 더 머물 수 없었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 옷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거의 생각할 새도 없이 정나연의 생일을 입력했다.
잠금이 풀렸다.
배경 화면은 서지훈과 정나연이 입을 맞추는 사진이었다.
메모장에는 온통 정나연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정나연의 생리 주기.
정나연이 먹지 못하는 음식.
정나연의 산전 검진일.
사진첩에도 정나연밖에 없었다.
잠든 얼굴.
바보처럼 웃는 모습.
입술을 삐죽이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
흥분에 뺨이 달아오른 모습.
분만실로 들어갈 때 눈가에 맺힌 눈물.
열두 살 때부터 바로 어제까지. 서지훈은 사진 한 장 한 장으로 그녀의 모든 순간을 기록해 두었다.
그가 정나연을 몰래 찍은 사진들에는 우습게도 내 모습까지 섞여 있었다.
손가락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평생을 살아도 고작 삼만 일 남짓인데, 서지훈은 정나연의 사진을 사만 장 가까이 찍어 두었다.
우리가 함께한 삼 년 동안 웨딩 사진을 빼면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사진을 찍자며 휴대전화를 들 때마다 서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피했다.
"네가 이 바닥 사람이잖아. 사진이 퍼지면 난리가 날 수밖에 없어."
내 촬영장에는 단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으면서 정나연의 콘서트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계획한 신혼여행에서 가장 멀리 잡은 곳도 국내의 미령시에 불과했다.
반면 두 사람은 여러 나라를 함께 누볐고,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도 봤다.
둘은 해외 디즈니랜드에도 모두 스물일곱 번이나 갔다.
내가 기념일에 디즈니랜드에 가자고 할 때마다 그가 "시시해"라는 한마디로 넘긴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정말 시시했다면 정나연과 스물일곱 번이나 갔을 리 없었다.
스스로를 벌주듯 사진을 끝까지 넘겨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물이 이미 다 말라 있었다.
휴대전화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리우드 영화, 할게. 폴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 줘.]
[언니, 다시 활동하신다니 정말 잘됐어요!]
답장을 확인한 뒤 여행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택시에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몸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제3화
서지훈의 두 눈은 피처럼 붉었다. 마치 악귀라도 된 듯했다.
"강보민, 정나연이 자살을 시도했어."
"네가 그 말을 해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그가 격앙된 채 내게 소리쳤다.
"애 낳은 지 얼마 안 돼 감정도 불안정한 걸 뻔히 알면서 왜 자극했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너도 걔랑 같은 희귀 혈액형이잖아. 걔를 살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신호를 몇 번이나 무시하며 달린 그는 나를 병원 안으로 끌고 갔다.
"의사 선생님, 이 여자도 나연이와 혈액형이 같습니다. 헌혈할 수 있어요!"
말하는 내내 그의 온몸이 떨렸다.
그토록 초라하게 무너진 서지훈을 처음 봤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그에게 이끌려 채혈실로 들어갔다.
그가 거칠게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정나연 때문에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서지훈의 모습만 가득했다.
그때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이분은 임신 중이라 헌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멍하니 배를 매만졌다.
바로 다음 순간, 서지훈의 고함이 터졌다.
"피를 뽑으라고! 아이는 필요 없어. 나한테는 정나연만 있으면 돼!"
내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물은 아무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
"서지훈, 이 아이는 네 친자식이야."
하지만 그는 계속 악을 쓰며 사람들에게 채혈 바늘을 내 팔에 꽂으라고 했다.
"서지훈..."
"서지훈!"
"내 아이를 해치게 둘 수 없어!"
바늘을 뽑아 버리고 몸을 돌려 달렸다.
한 걸음도 못 가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들렸다.
서지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 같았다.
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온몸이 떨릴 만큼 서늘했다.
"보민아, 가서 나연이한테 피 줘."
보디가드 네 명이 나를 채혈실 침대에 눌러 붙들었다.
피가 한 관씩 몸에서 빠져나가 정나연이 있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얼굴은 조금씩 핏기를 잃어 갔다.
마침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을 떴을 때는 사흘이 지나 있었다.
의사는 내가 심한 출혈로 의식을 잃었고, 아이도 잃었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나는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눈으로 눈물 고인 정나연과 마주쳤다.
"보민아, 다 알게 된 거지?"
"미안해. 너한테 너무 죄책감이 들어서 순간 잘못된 생각을 했어. 지훈이가 너한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그녀는 내 침대 앞에 무너지듯 엎드려 울었다.
울음소리는 요란했지만 손목의 상처에는 밴드 하나만 붙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서지훈이 말한 위급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갑자기 허리를 세웠다. 큰 결심이라도 한 얼굴이었다.
"보민아, 이제부터 내 아이는 네 아이나 마찬가지야."
내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쉰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꺼져."
정나연이 얼어붙었다.
상처받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아 제 뺨을 때렸다.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해도 늦었다는 거 알아. 그래도 너랑 친구 사이가 끝나는 건 싫어."
"나를 때려. 용서만 해 준다면 네가 화 풀릴 때까지 뭐든 해도 돼!"
그녀가 다시 내 손을 끌어 제 뺨을 치려던 순간, 언제 왔는지 서지훈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가 빠르게 다가와 정나연을 떼어 놓았다.
실랑이 속에서 나는 침대 아래로 끌려 내려가 바닥에 세게 떨어졌다.
몸 아래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신음을 삼키며 의사를 불렀다.
그제야 서지훈이 정신을 차렸다. 정나연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나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정나연의 울음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서지훈, 다 너 때문이야! 보민이가 정말 나한테 화났잖아! 이러다 친구까지 잃게 생겼다고!"
서지훈은 급히 그녀를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다 내 잘못이야. 화내지 마."
"일단 데려다줄게. 아이한테는 네가 필요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서지훈, 평생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의 걸음이 잠시 멈췄지만 끝내 돌아보지는 않았다.
십 분 뒤, 처음으로 그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제4화
[나연이랑 아이를 멀리 보내고, 걔와는 완전히 끝낼게.]
[몸이 회복되면 신혼여행 가자.]
나는 차갑게 화면을 끄고 답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자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원래도 혈육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까지 떠난 뒤에는 세상에 가족이라 부를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늘 나와 피가 이어진 아이를 갖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서지훈이 내 아이를 제 손으로 죽였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간호사를 불러 퇴원 수속을 부탁했다.
그때 서지훈이 험악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
내 귀에서 윙 소리가 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가에 비릿한 맛이 번지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그는 머리채를 움켜쥐고 내 얼굴을 휴대전화 화면에 들이밀었다.
화면은 온통 폭발적으로 치솟은 실시간 검색어로 뒤덮여 있었다.
[인기 가수 정나연, 혼외 출산. 과거 성폭행 피해 사진 유출]
실검 아래에는 과거 정나연이 납치범들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할 때 찍힌 사진이 가득했다.
그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강보민, 내가 여기까지 양보했는데도 왜 이런 짓을 했어?"
"이러면 나연이 인생이 망가진다는 걸 몰라?"
"십 년 동안 곁을 지키며 겨우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네가 전부 망쳤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부인했다.
"내가 한 일 아니야."
하지만 그는 설명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나를 억지로 방 안에 끌고 들어갔다.
대낮처럼 환한 조명 아래, 옷을 벗은 남자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방 구석구석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가슴이 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서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네가 이 바닥 사람인데도 모르겠어?"
"실검을 가장 빨리 묻는 방법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 거야."
말을 이어 갈수록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짙어졌다.
"네가 톱 여배우잖아. 네가 성폭행당한 것처럼 꾸민 사진이 퍼지면 아무도 나연이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숨 쉬는 법조차 잊었다.
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나는 그의 아내였다. 그 때문에 방금 아이까지 잃었다.
그런데도 서지훈은 정나연을 위해 나를 다른 남자들에게 짓밟히게 하려 했다.
서지훈은 나를 떼어 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들을 향해 차갑게 지시했다.
"빨리 끝내."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나는 문으로 달려가 힘껏 두드렸다.
"서지훈, 나 좀 내보내 줘!"
"내가 한 짓 아니야! 제발 문 열어 줘!"
"제발..."
그러나 문밖에서는 자동차 엔진 소리만 멀어질 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벽을 따라 몸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남자들이 둘러싸 옷을 모두 벗길 때, 절망 속에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명이 꺼졌다.
생기라곤 남지 않은 물고기처럼 방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었다.
온몸 어디에도 성한 곳이 없었다. 몸 아래에서 피가 쉼 없이 흘러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조금씩 기어서 문가의 꽃병 앞으로 갔다.
남은 힘을 모아 꽃병을 밀어 넘어뜨렸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었다.
의식이 흐려지던 순간, 문이 요란하게 걷어차였다.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뛰어들어와 나를 안아 들고 무너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가 그랬어? 누가 이런 짓을 했어?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한편 병원으로 들어서던 서지훈은 쇼핑몰의 대형 화면에 시선이 멎었다.
화면에는 동의 없이 촬영된 내 성폭행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의 귓속을 가득 울렸다.
서지훈은 눈을 크게 뜨고 대형 화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는 사진만 찍어 성폭행당한 것처럼 꾸미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영상이 퍼지고 있는 거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에게 고함을 질렀다.
"내려! 강보민 영상, 전부 당장 내려!"
그 순간 화면이 긴급 부고로 전환됐다.
[3관왕 톱 여배우 강보민, 성폭행 피해 후 극단적 선택. 응급 치료에도 끝내 사망]
서지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