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GoodNovel 완결

진우정과 심용하의 결혼식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심용하가 또다시 결혼식을 미루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인 백소은의 병이 도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백소은이 당장 몰디브 바다를 보러 가자며 울고불고 심용하를 들볶아댔다. 이 결혼식을 준비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진우정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랑을 갈아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챕터 (1)

第1章

진우정과 심용하의 결혼식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심용하가 또다시 결혼식을 미루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인 백소은의 병이 도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백소은이 당장 몰디브 바다를 보러 가자며 울고불고 심용하를 들볶아댔다. 이 결혼식을 준비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진우정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랑을 갈아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제1화 심용하가 피팅 중이던 턱시도를 황급히 벗어던지더니 휴대폰을 들어 몰디브행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결혼식은 며칠 뒤로 미루자.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네가 잘 좀 말씀드려 줘.” 연애한 지 6년, 진우정은 심용하가 백소은 때문에 그녀를 내팽개친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젠 세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대한 행복한 설렘에 젖어 있었건만 지금 진우정의 눈동자에서는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백소은 때문에 결혼식이 몇 번이나 미뤄진 탓에 진우정이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야속하게도 눈가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항공권 예매를 마친 후 심용하가 고개를 돌린 그때 눈물범벅이 된 진우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멈칫했다가 다소 찔리는 기색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도 알잖아, 소은이가 아픈 거. 기분 안 맞춰 주면 또 자해할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에 심용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백소은에게서 온 재촉 전화였다. 심용하가 비행기 표는 다 예매했으니 바로 집으로 데리러 가겠다며 일단 짐부터 싸라고 다정하게 백소은을 달랬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진우정을 쳐다보는 심용하의 눈빛에 조금 전의 미안함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지금 가야 해. 안 그러면 비행기 놓쳐. 드레스 피팅 다 끝나면 알아서 택시 타고 들어가.” 진우정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심용하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대학 시절 심용하는 학과 내에서도 도도하고 차갑기로 유명했고 그를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줄을 섰다. 진우정이 2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심용하에게 대시한 끝에 겨우 이 도도한 남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렵게 얻은 사랑이었기에 진우정은 이 사랑을 더없이 아꼈다. 늘 그를 배려했고 맞춰 줬으며 다른 여자들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온 진심을 다 쏟아부어도 진우정을 향한 심용하의 태도는 늘 미지근했다. 분명 연인 사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손에 잡히지 않는 거리감이 감돌았다. 원래는 심용하의 성격이 무뚝뚝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백소은이 다쳤을 때 안절부절못하던 심용하의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심용하는 결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백소은이 심용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다만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심용하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소은은 아프다는 핑계로 진우정과 심용하의 관계를 휘젓고 다녔고 그때마다 심용하는 다정하게 그녀를 다독이고 달래주었다. 가끔 진우정은 심용하와 백소은 두 사람의 사랑 연극에 들러리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기분은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웠다. 지난 6년 동안 진우정도 손을 놓아버릴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심용하가 먼저 자세를 낮추며 그녀를 붙잡았다. 악순환의 반복 속에서 진우정의 마음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 찼다. 온기와 희망이 빠져나갔고 남은 거라곤 쓸쓸함뿐이었다. 예전의 진우정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긍정적이고 밝았으며 온몸에서 생기가 넘쳐흐르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고 하루 종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신세타령꾼처럼 변해 버렸다. 일방적인 양보가 본래 모습마저 잃게 만든 것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진우정은 자신이 문득 너무나 낯설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심용하와 이런 소모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이토록 가볍게 여긴다면 진우정 역시 결혼식 전에 신랑감을 갈아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제2화 진우정이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용하랑 결혼 안 해요. 전에 말씀하셨던 혼사 있잖아요. 그 결혼 할게요. 그쪽 남자한테 아직 나랑 결혼할 생각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진우정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어머니가 경솔하다며 꾸짖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휴대폰 너머에서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했어. 우리 딸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엄마가 지금 당장 준혁이한테 연락할게.” 송준혁이라는 이름이 진우정에게 낯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릴 적 죽마고우였으나 송준혁이 부모님을 따라 외국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진우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보다는 차라리 송준혁이 나았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비슷했고 서로를 잘 알기에 초고속 결혼 상대로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정의 휴대폰에 송준혁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머님께 연락받았어. 언제 시간 돼? 내가 해울시로 데리러 갈게.] 진우정에게 송준혁의 메신저 연락처가 있었다. 대학 시절 대학원 준비를 하던 때 어머니가 등 떠밀어 추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보름 정도만 시간을 줘. 주변 정리 다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 심용하와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매듭지어야 했다. 심용하는 드레스 샵을 나가면서 결혼반지조차 챙기지 않았다. 평소 물건 하나 잃어버리는 법 없는 꼼꼼한 성격의 심용하가 반지를 잊었다는 건 그만큼 조급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벌써 몰디브에 도착해 백소은과 여행을 즐겼다. 백소은이 보란 듯이 SNS에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우정을 향한 도발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정의 시선은 사진 속 백소은이 입고 있는 핫핑크색 비치 원피스에 꽂혔다. 그 옷은 진우정이 신혼여행에 가서 입으려고 야심 차게 준비해 둔 원피스였는데 며칠 전에 배송되었다. 파리 시즌 신상이라 며칠 밤을 새우며 치열한 광클릭 끝에 겨우 구매했다. 진우정이 그 옷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심용하가 상의 한마디 없이 백소은에게 가져다줬다.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민 진우정이 심용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나한테 묻지도 않고 가져갈 수가 있어? 네 소중한 동생 기분 맞춰주겠다고 내 옷을 가져다가 생색을 내?] 한참이 지나서야 심용하의 답장이 왔다. [저번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핫핑크는 어린애들한테나 어울려. 네 나이에 입기엔 너무 촌스럽고 과해. 고작 옷 한 벌 가지고 유난 떨지 마.] 진우정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게 지금 인간이 할 소리야?’ 사실 그녀는 백소은보다 고작 두 살 많았다. 심용하의 눈에 백소은은 애지중지 지켜줘야 할 어린애였고 진우정은 그저 촌스러운 여자였다. 진우정이 반박하려던 그때 심용하가 갑자기 돈을 송금해 왔다. [옷값이야. 소은이한테 뭐라 하지 마. 겨우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소은이가 어떤 일로도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돈을 받았다. 이제 옷도, 이 남자도 필요 없었다. 문득 이 사실을 깨달았다. 심용하가 그녀를 함부로 대할수록 그녀는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심용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이미 나눠준 청첩장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심용하는 화려한 결혼식이 백소은에게 자극을 줄까 봐 소규모 예식을 고집했다. 진우정은 그마저도 배려해 해울시 내의 가까운 지인과 친척들에게만 소박하게 청첩장을 돌렸었다. 결혼식이 취소되어 청첩장을 돌려달라는 소리에 친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오래 준비해 놓고 갑자기 취소라니?” 진우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혼식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긴 준비 과정 내내 진우정 혼자만 동분서주했고 심용하는 단 한 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어쩌면 심용하는 애초에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진우정이 혼자 좋아서 그의 뒤를 쫓아다녔을 뿐. 이 끝도 없는 ‘술래잡기’에 진우정은 이제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던 진우정이 솔직하게 말했다. “결혼은 할 거야. 다만 신랑이 바뀌었을 뿐이지.” 하지만 친구들은 진우정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진우정이 심용하를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도한 심용하를 손에 넣으려고 그녀가 들인 공이 얼마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 심용하가 결혼식을 미룬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진우정은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우정이 이번에도 심용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우정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지난 6년의 청춘을 바쳐 한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이미 쏟아버린 사랑을 되돌릴 순 없었기에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여기서 멈추는 것이었다. 제3화 진우정이 나눠줬던 청첩장을 모두 회수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심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심용하의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다. “이미 돌린 청첩장들 일단 다시 거둬들여. 결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소은이 상태가 여전히 불안정해서 그래. 지금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아.” 심용하는 진우정이 동의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늘 그렇듯 그녀를 몰아세울 도덕적 명분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진우정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았어.” 심용하는 순간 멍해졌다. 휴대폰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진우정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사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남이 그녀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진우정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지만 그는 백소은을 위해 진우정의 그 예민한 경계선을 무시해 버렸다. 돈을 보낸 것도 진우정이 계속 따질까 봐서였다. 예전에는 잘 먹히던 방법이었는데 이번에 진우정이 군말 없이 돈을 받아버리자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용하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멋쩍게 말을 이었다. “소은이 때문에 네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내가 약속할게. 이번엔 꼭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게 해서 하루빨리 병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오빠, 물 다 받아놨어. 오빠가 씻을 차례야.” 그때 백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용하가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진우정이 이미 전화를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진우정은 이 상황이 기가 찼다. 백소은의 진단서에 조울증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아픈 것을 핑계 삼아 심용하를 곁에 붙들어 두기만 했다. 심용하가 내뱉는 약속은 영원히 현금화할 수 없는 부도 수표와 같았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진우정이 미련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이 그리 많지 않아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6년 동안 살아온 집이라 곳곳에 진우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심용하와의 커플 사진, 주방에 걸린 진우정 전용 분홍색 앞치마, 화장실 컵 걸이에 나란히 걸린 커플 양치 컵까지... 그녀의 물건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사진은 가위로 그녀의 모습을 오려내 버리고 심용하만 남겨 두었다. 심용하가 선물했던 물건들은 값어치와 상관없이 단 하나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태울 수 있는 건 태워 버리고 태울 수 없는 건 쓰레기통에 던졌다. 영원을 상징한다던 결혼반지도 금은방에 팔았고 그 돈은 전액 기부했다. 해울시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진우정이 밤사이 고열에 시달렸다. 부모님 품을 떠나 심용하와 함께 생활한 지난 몇 년 동안 진우정은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터득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악착같이 정신을 차려 119에 구급 요청을 했다. 진우정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얼마나 잤는지도 알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심용하가 병상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백소은이 동행하지 않았다. 심용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눈에 가득 찬 안타까움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아프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왜 말을 안 해? 전화도 안 받고. 경비원이 연락 안 줬으면 너 입원한 줄도 모를 뻔했잖아. 사람 놀라 죽는 꼴 보고 싶어?” 진우정이 입가에 미소를 띠긴 했지만 눈동자에는 조금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네 그 소중한 여동생이랑 같이 있었으면서.” 그녀가 심용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심용하는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 그의 다정함과 따뜻함은 애초에 진우정의 몫이 아니었기에 지난 6년 동안 그녀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진우정의 말에 심용하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 원망하는 거야? 너 아프다는 소식 듣자마자 제일 빠른 비행기 표 끊어서 날아왔어. 나더러 뭘 더 어쩌라는 건데?” 진우정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돌아오라고 한 적 없어. 내 몸은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챙길 수 있으니까.” 심용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여자가 정말 그에게 의지하던 진우정이 맞단 말인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심용하의 휴대폰 벨 소리가 적막을 깼다. 또 백소은에게서 온 전화였다. 백소은의 화난 목소리가 진우정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렸다. “오빠, 나만 몰디브에 덩그러니 남겨 두고 간 이유가 진우정 그 여자 때문이었어?” 심용하가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진우정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백소은에게 말했다. “우정이가 아파서 입원했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 말에 백소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필 이때 아프다고? 이렇게 우연히? 그거 다 꾀병이야. 오빠, 그 나쁜 여자한테 속으면 안 돼.” 백소은의 목소리가 진우정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진우정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심용하를 가만히 지켜봤다. 심용하가 미간만 찌푸릴 뿐 예전과 다름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백소은을 달랬다. “걱정하지 마. 우정이 퇴원하자마자 바로 비행기 타고 너한테 날아갈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제4화 백소은은 몰디브에 남아 심용하를 기다리는 대신 바로 다음 날 병원으로 쫓아왔다.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진우정을 보자마자 백소은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서렸다. “제법 그럴싸하게 연기하네? 그런데 넌 불쌍한 척밖에 할 줄 몰라? 이런 식상한 수작은 용하 오빠한테나 먹혀.” 진우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진우정이 심용하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던 시절 비를 흠뻑 맞으며 남자 기숙사 앞에서 밤새 그를 기다렸던 일을 비꼬는 것이었다. 그날 밤은 빗줄기가 지독하리만치 굵었다. 진우정이 심용하에게 주려고 고심해서 고른 기타를 품에 안은 채 빗속에 서 있었다. 얇은 셔츠가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빗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도 심용하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진우정은 사랑을 얻지 못한 게 무슨 대수냐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포기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때 심용하가 마음을 돌려 사귀어 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남자와 사귀게 되었다. 그날의 비로 사랑을 얻었으나 대신 지독한 폐렴을 얻었다. 나중에 병은 나았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온이 떨어지거나 감기에 걸리면 진우정은 기침에 시달려야 했다. 진우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심용하를 쳐다봤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심용하가 나서서 그녀를 감싸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심용하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백소은을 참아주다 보니 이제는 속병이 날 지경이었다. 어차피 곧 심용하와 헤어질 생각이기에 이 여우 같은 백소은에게 더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진우정이 차갑게 맞받아쳤다. “연기라면 내가 널 따라갈 수 있겠어? 하지만 이런 수작 부려봤자 아무 소용 없어. 넌 평생 심용하의 여동생으로밖에 살 수 없을 테니까.” 진우정의 말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소은이 미친 듯이 진우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막는 과정에서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이 빠지고 말았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통증에 진우정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수액과 피가 진우정의 하얀 환자복 위로 튀었다. 백소은이 먼저 손을 썼으니 진우정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손등의 통증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그대로 손을 들어 백소은의 뺨을 갈기려 했다. 바로 그때 심용하가 백소은의 앞을 막아섰다. 찰싹 하는 날카로운 따귀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심용하의 얼굴 위로 선명한 붉은 손자국이 나타났다. 심용하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안색이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먹구름처럼 어두워지면서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풍겼다. “진우정, 너 언제부터 이렇게 막무가내였어? 소은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감정 조절 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손을 대?” 진우정이 심용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며 씁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백소은이 환자면 나는 환자 아니야? 넌 왜 이렇게 이중 잣대야?” 심용하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인 듯한 기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소은이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역시 이젠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나 그냥 확 죽어버릴 거야. 흑흑...” 말을 마친 백소은이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자 심용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쫓아갔다. 진우정만 덩그러니 버려둔 채. 씁쓸함이 밀려온 진우정이 자신을 비웃었다. ‘뭘 그리 슬퍼해? 한두 번도 아닌데.’ 진우정이 홀로 슬픔에 잠긴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 위에 송준혁의 이름이 깜빡이고 있었다. 제5화 지난 며칠 동안 진우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송준혁은 내심 초조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정아, 결혼식 준비는 이미 시작했어. 네 쪽 상황은 어때? 정리 다 됐어?” 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까지 송준혁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혹여나 그녀가 후회한다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송준혁에게 지금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감정을 조절한 뒤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응, 거의 다 정리됐어. 요 며칠 사업적인 일들만 마무리하고 바로 갈게. 결혼식 준비는 네가 수고 좀 해줘.” 진우정의 대답에 송준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워낙 세심한 성격이었기에 그녀의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쉬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요즘 해울의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던데 나갈 때 옷 따뜻하게 챙겨 입어. 너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잖아.” 송준혁의 다정한 당부에 진우정의 가슴 한구석으로 몽글몽글한 온기가 번져 나갔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꼭 나한테 전화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이제 내가 있으니까 속상하지 않게 지켜줄게.” 진우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몸은 내가 잘 챙길게. 걱정하지 마.”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먹구름이 가득하던 하늘이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처럼. 한편 심용하는 백소은을 집에 데려다주는 길 내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가 백소은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소은아, 너 자꾸 이러면 안 돼. 우정이가 어찌 됐든 내 미래 와이프가 될 사람이잖아.” 미래 와이프라는 말에 백소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심용하에게 물었다. “오빠, 나 이젠 오빠 인생에 방해만 되는 존재지?” 심용하는 백소은의 눈물에 유독 약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져 해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뜻이 아니야. 우정이가 내 곁에 6년이나 있었어.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을 거야.” 그제야 백소은이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웃으며 심용하의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오빠는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그 여자랑 결혼하는 거네? 오빠 마음속에선 언제나 내가 제일 소중하고 그 여자보다 먼저인 거 맞지?” “그럼.” 심용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음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진우정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지난 6년 동안 그녀가 그에게 어떻게 진심을 바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혼 상대로서는 진우정만 한 여자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아낌없이 퍼주었고 사업적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었으니까. 그래서 진우정이 결혼하자고 했을 때 기꺼이 승낙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백소은이 눈물을 보일 때마다 심용하는 번번이 마음이 흔들렸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정이 깊어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심용하는 늘 진우정이 백소은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백소은을 달래주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중에 백소은의 병이 나으면 그때 진우정과 결혼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여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심용하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백소은의 편을 들어줄 때마다 진우정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진우정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자는 언제나 두려움이 없는 법이었으니까. 제6화 진우정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심용하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용하의 SNS를 확인해봤더니 예상대로 또 백소은과 함께 있었다. 배경 화면조차 백소은의 셀카였고 업로드된 모든 게시물이 예외 없이 그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명색이 여자친구인 진우정은 그의 SNS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감정이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심용하와 함께한 6년은 진우정을 생기 넘치던 여자에서 원망만 가득한 여자로 변하게 했다. “이렇게 엉망인 사랑이라면 차라리 놓아버리는 게 마음이 편해.” 진우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진우정은 소지품을 정리하고 퇴원 절차를 밟았다. 해울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소연지를 만나야 했다. 소연지는 진우정의 둘도 없는 절친으로 대학교 졸업 후 함께 해울시에 정착했다. 진우정은 사랑을 위해, 소연지는 창업을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함께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연지야, 이 카페 내 지분 너한테 싼값에 줄게. 부모님한테 고향 내려가서 결혼하겠다고 했어. 이제 다시는 해울에 안 올 거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심용하를 포기하고 딴 남자랑 결혼한다고?” 소연지가 귀를 의심하며 경악한 표정으로 진우정을 쳐다봤다. 진우정은 친구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진우정은 심용하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 “응. 며칠 내로 주변 정리 다 하고 내려가려고. 그때 가서 너 꼭 내 들러리 서줘야 한다?” 이 카페는 두 사람의 피땀이 어린 곳이었다. 진우정이 이곳의 지분까지 넘기겠다는 건 정말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뜻임을 소연지도 눈치챘다. “그래 잘 생각했어. 한 남자한테만 목매선 안 되지. 친구로서 네 결정 응원할게.” 두 사람은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마쳤다. 이로써 해울시에 남겨 두었던 모든 미련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카페를 나온 후 심용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너 데리고 와서 밥 먹으라고 하시네. 집에서 아주머니가 이미 준비 중이야. 어디야? 데리러 갈게.” 진우정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심용하가 또다시 결혼을 미루려 한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는 아직 모르고 있을 터. 어차피 곧 떠날 것이기에 그의 아버지에게 직접 모든 사실을 말하고 관계를 확실히 매듭짓는 편이 나중에 뒤탈이 없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용하가 차를 몰고 진우정을 데리러 왔다. 진우정이 한창 어머니와 메신저로 결혼 준비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결혼식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심용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너희 부모님께 결혼식 미루게 됐다고 말씀드리라고 했잖아. 아직 말씀 안 드렸어?” 그의 반응에 진우정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심용하는 결혼을 반복해서 미루는 것이 어른들에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잘 알면서도 그 난처한 짐을 오롯이 진우정에게만 떠넘기려 했다. 그와의 관계에서 몰아치는 모든 비바람은 늘 진우정을 향했고 심용하는 언제나 한발 물러서서 방관할 뿐이었다. 진우정이 피식 웃었다. “말씀드렸어. 걱정하지 마. 너랑 결혼 못 해서 안달 난 거 아니니까.” 그 말에 심용하가 멈칫했다. “오해한 모양인데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됐어. 설명할 필요 없어. 상관없으니까.” 진우정은 그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유리창을 연 다음 창밖을 내다봤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그녀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연애 초기 그녀는 얘기가 끊기는 법이라곤 몰랐다. 이젠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사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심씨 가문 본가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심용하의 아버지 심국해는 사업가였다. 평소 아들에게는 엄격했지만 진우정에게만큼은 늘 인자한 어른이었다. “우정이 왔구나. 아주머니한테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일렀어. 거의 다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심국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소은이 어머니 유민희와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왔다. 진우정을 본 순간 모녀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식사할 때 백소은은 일부러 심용하와 진우정의 가운데 앉아 심용하에게 반찬을 집어달라며 응석을 부렸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지 둘 사이가 유독 각별하다니까.” 유민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우정을 힐끗 쳐다봤다. 진우정은 속이 메스꺼워 도저히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심국해에게 말했다. “아버님, 용하랑 결혼식 잠시 안 올리기로 했어요. 용하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제7화 심국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안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청첩장까지 다 돌려놓고.” 심용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결혼식을 미루겠다는 말을 심국해에게 꺼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우정이 먼저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우정이 대답을 심용하에게 넘겼다. “그건 용하한테 물어보세요. 용하가 내린 결정이니까요.” 심국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심용하를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결혼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청첩장도 다 돌렸는데 우리 집안을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야?” 심용하가 입을 열기 전에 백소은이 먼저 나서서 애교를 부렸다. “아빠, 오빠 탓하지 마세요. 오빠가 결혼식을 미룬 건 다 저 돌봐주려고 그런 거예요.” 심국해가 불같이 화를 냈다. “뭐? 소은이 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쩜 이렇게 철이 없어? 네 엄마가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이야?” 백소은이 심국해의 친딸은 아니었지만 유민희가 심씨 가문으로 들어온 이후 심국해는 그녀를 친딸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평소 큰소리 한번 내지 않던 심국해가 이토록 화를 내자 백소은이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이제 속이 시원해?” 심용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백소은의 뒤를 쫓아갔다. “왜 애한테 소리를 질러요? 소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절대 가만 안 둬요!” 유민희가 진우정을 매섭게 째려봤다가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정아, 잠깐만 앉아 있어. 소은이 엄마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유민희를 달래기 위해 심국해도 서둘러 위층으로 향했다. 이미 여러 번 본 광경이라 진우정은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자꾸만 반복되는 이 상황이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겨웠다. 백소은이 이토록 심용하와 진우정의 사이를 헤집어 놓을 수 있었던 건 심용하의 편애와 유민희의 방임과 다름없는 훈육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집안의 금지옥엽이라면 진우정도 부모님의 소중한 딸이었다. 진우정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른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니까. 심국해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심국해의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틈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멍청해? 지금 회사 자금이 40억이나 비어서 은행 대출도 막힌 상황이야. 진씨 가문에 돈이 많잖아. 그래서 우정이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사돈댁 자금을 끌어다 쓸 생각이었다고.” “내 회사가 무너지면 당신이 그 명품들을 무슨 돈으로 살 건데? 소은이가 용하 좋아하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좀 참으라고 하면 안 돼?” “회사가 고비만 넘기면 용하랑 소은이가 만나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제발 소은이 단속 좀 잘해. 내 계획 망치지 않게.” 진우정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상하게만 보였던 심국해 역시 결국 그녀를 돈줄로만 보고 이용하려 했다. 그렇다면 심용하는? 그가 결혼을 결심했던 것도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을까?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진우정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심씨 가문 본가를 나왔다. 이곳에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와 그 가족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지난 6년의 청춘을 버린 셈 치기로 했다. 진우정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용하가 들어왔다. 다급한 기색으로 침실로 들어가 옷가지를 챙기던 그가 옷장 옆에 놓인 캐리어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진우정이 대충 핑계를 댔다. “계절 바뀌어서 안 입는 옷들 기부하려고.” 심용하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이가 또 자해해서 입원했어. 이틀 정도 내가 병원에서 간호해야 할 것 같아. 당분간 못 들어오니까 그런 줄 알아.” 급하게 집을 나선 바람에 그는 집안의 물건들이 사라진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심용하가 나간 현관을 보던 진우정은 오히려 깊은 해방감을 느꼈다. 심용하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한 뒤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심용하, 이만 헤어지자. 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 쪽지와 집 열쇠를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둔 다음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심용하의 세상에 진우정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More GoodNovel Nov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