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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 끝났으니 저는 이혼할 거예요
결혼 3년 동안 오하윤은 두 다리를 못 쓰는 진서우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러나 진서우는 자신의 다리에 손만 대도, 오랫동안 문밖에 세워 둘 정도로 오하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러다 다리가 나아서 일어서게 됐을 때, 진서우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다름아닌 공항이었다. 순전히 자신의 첫사랑을 마중 나가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의 헌신도 끝내 첫사랑을 이기지는 못했다. 오하윤은 아픈 가슴을 눌러 담고 전화를 걸었다. “계약 끝났어요. 저 이혼할래요.” 그리고 오하윤이 떠난 뒤에야 진서우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챕터 (1)
第1章
결혼 3년 동안 오하윤은 두 다리를 못 쓰는 진서우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러나 진서우는 자신의 다리에 손만 대도, 오랫동안 문밖에 세워 둘 정도로 오하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러다 다리가 나아서 일어서게 됐을 때, 진서우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다름아닌 공항이었다.
순전히 자신의 첫사랑을 마중 나가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의 헌신도 끝내 첫사랑을 이기지는 못했다.
오하윤은 아픈 가슴을 눌러 담고 전화를 걸었다.
“계약 끝났어요. 저 이혼할래요.”
그리고 오하윤이 떠난 뒤에야 진서우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제1화
“연희야, 나 다리 다 나았어. 돌아와. 내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
익숙한 프로필 사진을 본 순간, 기뻐서 눈물까지 글썽이던 오하윤의 웃음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오하윤은 진서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진서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시종일관 첫사랑 임연희뿐이었기 때문이다.
3년 전, 대학을 졸업한 진서우와 임연희는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진서우는 국내에 남아 가업을 이어야 했고, 임연희는 해외로 나가서 자신의 꿈을 좇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길로 갈라섰지만, 진서우는 임연희를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얼마 후, 임연희는 갑작스럽게 해외에서 결혼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진서우는 미친 듯이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날아가서 임연희의 결혼을 뒤엎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항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진서우는 다시는 제 발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오하윤은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오하윤은 담당 교수님을 도와 진서우의 다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뒤에도, 하늘이 내린 천재라 불리던 진서우는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여러 악재가 겹친 탓에 진서우의 성격은 점점 더 사납고 예민해졌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도 욕을 퍼부었고, 눈앞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 누구도 감히 진서우의 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연차가 제일 적은 오하윤이 거의 등을 떠밀리다시피 진서우를 맡게 되었다.
오하윤은 부드럽고 순해 보여서 마치 옆집 여동생 같은 인상을 주었다.
친화력도 타고났는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쉽게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게다가 탄탄한 실력에 꼼꼼하고 인내심 있는 태도까지 갖춘 덕분에, 오하윤은 병원에서 유일하게 진서우의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뒤 진서우가 퇴원하자, 진서우 어머니인 배영숙이 오하윤을 찾아왔다.
배영숙은 오하윤에게 10억 원을 건네면서 진서우에게 다가가 달라고 부탁했다.
결혼을 전제로 종일 진서우의 곁을 지켜달라는 조건이었다.
당시 큰 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애가 탔기에, 오하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오하윤은 병원을 그만두고 3년이라는 시간을 진서우의 곁에서 보냈다.
진서우가 다친 다리 때문에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오하윤은 기꺼이 남자의 모든 화를 받아냈다.
상처가 욱신거리는 날이면, 오하윤은 밤새 잠들지 않고 진서우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또 재활 치료를 받다가 진서우가 넘어질 때면, 오하윤은 반사적으로 온몸으로 막아서 진서우를 다치지 않게 받쳐주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디서 나타난 어린 여자가 진서우에게 저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확실한 건 그 이유는 오하윤만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하윤의 대학교 등록금과 학비는 전부 진서우의 지원으로 마련되었다.
진서우는 학교 자선재단의 책임자였다. 하지만 오하윤은 진서우가 후원한 수많은 학생 가운데에서도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는 너무나 멀었다.
그래서 오하윤은 처음부터 진서우에게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두 다리를 다친 진서우와 마주치게 되자, 오하윤은 남자의 곁으로 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쳤다.
처음에는 오하윤도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몇 년이고 진서우의 곁을 지키다 보면, 언젠가는 진서우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지금 회복했다는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임연희에게 전하는 진서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하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오하윤은 단 한 번도 진서우의 마음에 든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지난 3년 동안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7월 칠석날이 되면, 진서우는 꼬박 하루 종일 자취를 감췄다.
오하윤이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진서우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오하윤은 그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칠석날은 진서우와 임연희가 연애를 시작한 기념일이었다.
진서우는 임연희의 곁에 있을 수 없었지만, 여자와 관련된 날짜만큼은 하나하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매번 선물까지 준비하는 정성도 보였다.
진서우의 집에는 평소에 늘 잠겨 있는 서재가 하나 있었다.
오하윤은 한번 청소하다가 실수로 그 안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날 진서우는 오하윤을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로 인해서 여자는 밤새 문밖에서 비를 맞아야 했다.
그 이유가 방 안에 임연희의 사진이 가득했기 때문이라는 걸 그날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또한 오하윤이 아무리 노력해도, 진서우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그때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제 진서우의 다리가 나았으니 오하윤의 역할도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서우가 임연희와 전화를 하며 회복의 기쁨을 나누는 사이, 오하윤 역시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아까 일어섰어요.”
“제가 해야 할 일도 끝났으니, 이제 그이하고 이혼할래요.”
제2화
진씨 집안은 진서우의 완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오하윤도 아침 일찍 호텔로 가서 배영숙과 함께 파티 준비를 거들었다.
발코니에 선 두 여자는 서로 다른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참 뒤, 배영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아, 정말 이혼할 거니?”
“네가 3년 동안 서우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잖아.”
“서우의 다리가 이제야 나았으니, 분명 네가 잘해준 걸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제 둘이 잘 살아야지.”
“이제 임연희 씨가 돌아올 거예요.”
오하윤이 딱 이 한마디를 꺼내자 배영숙의 표정이 달라졌다.
놀람에서 걱정으로, 그리고 다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체념으로 변했다.
“휴, 그래. 그럼 네 선택을 존중할게.”
결국 배영숙은 말을 바꿨다.
그 모습을 본 오하윤의 가슴은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하윤을 붙잡으려 했던 배영숙이, 임연희라는 이름 하나에 그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원래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서우에게 임연희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이 3년 동안 진서우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어도, 진서우의 마음속에서는 도우미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하윤아, 이혼하고 나면 어쩔 생각이니?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이제 너 혼자잖아.”
“네가 3년이나 서우를 돌봐주기도 했고, 나는 진작부터 너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절대 사양하지 말고, 알겠지?”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햇살 같은 따뜻함에 오하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영숙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3년 전, 오하윤은 배영숙에게서 10억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불과 3달 만에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오하윤 또한 배영숙에게 받은 돈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진씨 집안에 남아서 진서우를 계속 돌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잠시 생각한 뒤 오하윤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외국에 나가서 대학원을 다니고 싶어요. 원래 의학을 전공했으니까 다시 의학 공부를 계속하려고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줄게.”
오하윤은 고마운 눈빛으로 배영숙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는 미리 짚어두었다.
“어머니, 이혼하는 건 제가 직접 이야기할게요. 이 일로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 말에 배영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느새 약간의 연민이 더해져 있었다.
이제 임연희가 돌아올 것이다. 오하윤이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내기만 한다면, 진서우는 분명 기뻐하며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는 배영숙이 나설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저 이렇게 좋은 오하윤이 진씨 집안과 인연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몰려들자, 배영숙은 오하윤을 데리고 나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느덧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진서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배영숙이 손짓으로 딸을 불렀다.
“소원아, 오빠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니? 걔는 어디 있어?”
진소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있으면 오빠 올 거예요. 분명 엄마가 깜짝 놀랄만한 선물이랑 같이요!”
말을 마친 진소원은 도발하듯 오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오하윤의 곁으로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골뜨기 새언니의 시대도 끝났어요.”
진소원은 줄곧 오하윤을 못마땅해했다.
돈을 노린 오하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서우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소원은 대놓고 오하윤을 괴롭히기도 했고, 남들이 모르게 괴롭히기도 했다.
그때 파티장 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색 고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진서우가 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임연희와 함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파티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저 사람 임연희 아니야? 진서우의 첫사랑 임연희?”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임연희 말고 진서우가 언제 저런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어?”
“진서우도 정말 한결같네. 예전에 임연희 때문에 다리를 다치더니, 다리가 낫자마자 제일 먼저 임연희부터 데려왔잖아.”
“그러게 말이야. 참 안됐지. 눈치도 없이 진씨 집안에 빌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사람도 있는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오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조롱과 무시가 가득했다.
이를 본 진소원이 피식 웃었다.
“어때요? 시골뜨기 새언니? 연희 언니 미모에 많이 놀랐죠?”
“이제 알겠어요? 말없이 남의 집 도우미 노릇이나 한다고 남자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연희 언니가 돌아왔으니까 낡아빠진 짐이나 싸서 얼른 꺼져요.”
오하윤은 환한 조명 아래 홀로 서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오하윤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듯했다.
‘그래. 난 애초부터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다들 오하윤을 도우미 정도로만 여겼지, 인간 자체를 제대로 봐준 사람도 없었다.
진심으로 오하윤을 존중해준 사람 역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하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뿐이었다.
제3화
진서우는 임연희의 손을 잡고 배영숙 앞으로 다가가서 들뜬 목소리로 소개했다.
“어머니, 연희가 돌아왔어요.”
배영숙이 미간을 찌푸린 채 연희를 바라봤다.
“이미 결혼까지 해놓고 왜 다시 귀국한 거야?”
그러자 임연희가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곧바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 예전 일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그 말에 진서우는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곧장 임연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 연희 이혼했어요. 그 남편이라는 인간은 손찌검이나 하는 짐승이었다고요!”
“지난 일은 다 지난 일이에요. 저는 신경 안 쓰니까 어머니도 연희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배영숙도 아들이 임연희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면박까지 당하자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이에 배영숙은 소매를 떨치듯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진서우와 임연희의 시선이 동시에 오하윤에게 향했다.
진서우는 오하윤에게 굳이 해명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
“연희가 막 귀국해서 들어와서 갈 데가 없어. 먼저 집에 가서 방 좀 치워놔.”
여전히 아랫사람을 부리는 듯한 태도였다.
너무나 천하태평한 말에 오하윤은 순간 진서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연희 씨가 우리 신혼집에서 지낸다고?”
진서우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당연하지. 그럼 어디로 가?”
그 대화가 꽤나 웃겼는지 곁에 있던 진소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신혼집은 무슨... 진짜 자기가 진씨 집안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그 한마디에 사방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하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기만 했다.
3년 전 사고를 당한 뒤, 진서우는 삶의 의욕을 잃고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서우가 살던 집에서 갑자기 불이 났다.
오하윤은 망설이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서 온 힘을 다해 진서우를 업고 빠져나왔다.
하지만 오하윤은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조명 기구에 머리를 맞았고, 그 탓에 병원에 한 달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오하윤이 깨어났을 때 진서우는 병상 곁에서 청혼했다.
진서우는 새로 집을 마련하고 그곳을 두 사람의 신혼집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이 앞으로 두 사람의 집이 될 거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 임연희가 돌아오자마자, 진서우가 아주 당당하게 그 신혼집에 여자를 들이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오하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이, 임연희는 서러운 표정으로 진서우를 바라봤다.
“서우야, 하윤 씨가 내가 너희 집에 사는 걸 싫어하는 거 아니야? 나 그냥 호텔에서 지낼게. 괜히 하윤 씨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안 돼. 호텔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서 위험해.”
진서우는 단호하게 못을 박고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오하윤을 바라봤다.
“하윤아, 연희는 잠깐 머무는 것뿐이야.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오하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맞아. 내가 옹졸하게 굴면 안 되지.”
“내가 먼저 돌아가서 방 정리할게. 둘은 편하게 있어.”
오하윤은 그렇게 말한 뒤, 무시와 비웃음으로 가득한 파티장을 미련 없이 빠져나왔다.
‘집이 뭐가 그렇게 아깝다고, 어차피 머지않아 임연희의 차지가 될 텐데.’
텅 빈 신혼집으로 돌아온 오하윤은 자신이 쓰던 남쪽에 있는 침실을 비웠다.
오하윤은 원래부터 검소한 성격이었고, 게다가 진서우는 그동안 여자에게 선물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었다.
3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오하윤의 짐은 캐리어 하나를 가득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잘된 일이야. 이렇게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야.’
짐을 모두 정리하자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가 SNS에 영상을 올린 모양이었다.
영상 속에는 진서우와 임연희가 샴페인 타워 옆에 나란히 서서 러브샷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애틋한 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봐도 천생연분인 한 쌍처럼 보였다.
영상의 배경에서는 사람들이 키스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는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서둘러 영상을 꺼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우가 임연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에게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오하윤이 먼저 자신의 침실을 임연희에게 내준 것을 확인한 진서우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임연희가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하자, 진서우가 보기 드물게 오하윤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오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윤아, 역시 네가 이해를 할 줄 알았어.”
오하윤이 뒤로 물러나면서 그 손길을 피하자, 진서우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또한 오하윤을 바라보는 진서우의 눈빛도 조금 어두워졌다.
“됐어. 내가 뭐라고 했어. 연희는 잠깐 머무는 것뿐이야.”
“응, 괜찮아. 연희 씨가 얼마든지 있어도 돼.”
오하윤은 서류 한 뭉치를 가져와 진서우에게 내밀었다.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 의료 물자를 한꺼번에 지원받고 싶대. 이것 좀 봐줄래?”
“당신 이름으로 기부해 줄 수 있어?”
진서우가 서류를 받아 들고 어두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너도 조건을 꽤 잘 내거네?”
오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진서우가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바라봤다.
진서우는 오하윤이 임연희에게 신혼집을 내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런 요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류의 내용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사인했다.
당연히 서류 맨 뒤에 놓여 있던 이혼합의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오하윤은 진서우의 이름이 적힌 이혼합의서를 바라보며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3년 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지만,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제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제4화
다음 날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오하윤은 잠에서 깼다.
“하윤아, 죽 좀 끓여. 연희가 어제 술을 마셔서 속이 안 좋대.”
진서우는 다리를 다친 뒤 한동안 몹시 예민해져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진서우 역시 자연스럽게 오하윤을 부려 먹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잠이 덜 깨서 아직 정신이 몽롱한 오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했다.
“싫어.”
“뭐?”
진서우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오하윤이 자신에게 거절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서우가 되묻자 오하윤의 머리도 그제야 조금씩 맑아졌다.
이에 오하윤은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나 그날이야. 배가 너무 아파서 찬물 못 만져.”
진서우는 오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이유가 과연 말이 되는지 판단하려는 눈빛이었다.
잠시 후, 진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내가 데리고 나가서 먹을게.”
진서우와 임연희가 집을 나섰을 때, 오하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곧 해외로 나가서 대학원을 다닐 예정이었기에, 미리 공부를 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때 임연희가 오하윤의 방으로 찾아오더니 선의인 척 웃으며 말했다.
“하윤 씨, 저희 밥 먹으러 나가는데 같이 가요.”
오하윤은 거절하지 않았다.
임연희가 먼저 입을 연 이상, 진서우가 자신이 거절할 여지를 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마이바흐가 차량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서 두 사람의 모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임연희는 친근하게 진서우의 팔짱을 꼈다.
“서우야,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 둘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지!”
진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오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연희가 학교 식당의 닭죽이 먹고 싶대서 온 김에 한번 둘러보려고.”
진서우가 평소와 달리 오하윤에게 해명하듯 설명을 덧붙였지만, 돌아온 것은 담담한 끄덕임뿐이었다.
“응, 괜찮아. 둘이 즐거우면 됐어.”
진서우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왠지 오하윤이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미처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임연희가 진서우의 팔을 끌며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온통 두 사람의 사랑을 증명하는 흔적과 추억이 남아 있었다.
진서우와 임연희는 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웃으면서, 뒤따라오는 오하윤의 존재는 완전히 잊은 듯했다.
오하윤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칠 대로 지친 기분을 느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조금만 지나면 완전히 떠날 수 있어.’
오하윤은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캠퍼스 식당은 환경도 좋았고 음식 종류도 다양했다.
진서우는 음식이 가득 담긴 식판을 들고 신이 난 얼굴로 임연희에게 다가왔다.
“연희야, 네가 대학 다닐 때 좋아하던 거 다 사 왔으니까 먹어봐.”
오하윤은 식탁 위에 놓인 시뻘건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잠시 멍해졌다.
3년 동안 진서우는 임연희가 뭘 좋아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오하윤이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담백한 음식을 사러 가려고 했다.
그 순간, 뒤에서 펄펄 끓는 뚝배기를 들고 오던 식당 아주머니가 오하윤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쳤다.
뜨거운 국물이 사방으로 튀자 진서우는 반사적으로 임연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는 사이 뚝배기의 뜨거운 국물이 거의 그대로 오하윤의 팔에 쏟아졌다. 여자의 팔 절반이 순식간에 화상을 입고 물집으로 뒤덮였다.
“괜찮아?”
진서우는 품에 안고 있던 임연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하윤의 팔을 붙잡았다.
진서우가 오하윤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하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임연희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서우야, 너무 뜨거워! 아파!”
임연희의 손에는 붉은 점이 몇 개 생겨 있었다.
물론 오하윤의 팔에 생긴 물집과 비교하면 대수롭지도 않은 상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연희는 손목을 감싸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서우야, 나 손 데었어!”
그 말을 듣자, 진서우는 곧바로 오하윤의 팔을 놓고는 임연희를 품에 안았다.
“진정해, 연희야.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두 걸음쯤 옮긴 진서우가 문득 뒤에 남겨진 오하윤을 떠올렸다.
돌아서서 오하윤을 바라보는 진서우의 표정에는 미안한 기색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너 의사잖아. 응급처치 정도는 알 테니까, 일단 네가 알아서 처치해.”
“나는 연희를 먼저 병원에 데려다줄게. 조금 있다가 기사 보내서 데려오라고 할게.”
며칠 동안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오하윤의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서우는 자기 남편이자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3년 동안 돌봐온 남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든, 임연희와 비교하면 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품었던 관심과 정성은 잡초보다도 못한 하찮은 것처럼, 진서우에게 몇 번이고 잔인하게 짓밟혔다.
제5화
날이 무더운 데다가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오하윤의 팔 상처는 곪아서 상태가 악화했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고 오하윤도 알겠다며 입원 절차를 밟았다.
지난 3년 동안 오하윤은 밤낮없이 진서우의 끼니와 잠자리를 챙겼다.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진서우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하윤은 그저 자신을 위해 살아보고 싶었다.
오하윤은 휴대폰을 꺼버린 뒤 병실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는 한편, 책을 펼쳐 들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의사들을 바라보는 오하윤의 마음에는 동경심이 가득했다.
한때 오하윤의 꿈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영숙과 맺은 계약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기회가 생겼고, 오하윤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서, 끝내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퇴원을 앞둔 어느 날, 오하윤은 병원에서 진소원과 마주쳤다.
진소원은 친구가 진료 예약이 있어 함께 병원에 온 참이었다.
오하윤을 보자마자 진소원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다가왔다.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일부러 잠적한 거예요? 요 며칠 집안이 아주 뒤집어졌어요. 오빠가 시골뜨기 새언니 찾는다고 사방을 다 돌아다녔다고요!”
“나를 왜 찾아요?”
오하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입원해 있는 게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진서우와 임연희가 둘만의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준 셈이었으니까.
이에 진소원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한 번 긁었다.
“설명하기도 귀찮아요. 직접 돌아가서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말을 마친 진소원은 오하윤의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병원에서 끌고 나왔다.
그리고 강제로 집까지 데려갔다.
집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오하윤은 뭔가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푸르게 우거져 있던 정원은 온통 시들어 있었다.
집 안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서우가 고개를 들었다.
오하윤을 발견한 순간 진서우의 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와서 여자의 다친 팔을 덥석 붙잡았다.
“어디 갔었어?”
“하윤아, 이제야 네 본성이 나오는 거야? 병원에 좀 늦게 데려갔다고 가출까지 해? 너 때문에 이 집이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 봐!”
오하윤의 팔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통증이 살갗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오하윤은 그제야 진서우가 자신을 찾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집에 가사도우미가 없어서 집이 개판이 된 것이었다.
진서우는 오하윤의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도우미 노릇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탓할 뿐이었다.
오하윤은 이를 악물고 진서우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이거 놔, 아파.”
그제야 진서우는 오하윤의 옷에 번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식당에서 오하윤이 다쳤던 일이 떠오른 듯, 진서우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친 줄은 몰랐네. 됐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네가 멋대로 집을 나간 것도 있으니까, 이걸로 퉁치는 걸로 하자.”
“이리 와. 보여줄 게 있어.”
진서우는 난생처음 오하윤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가 오하윤 앞에 놓여 있었다.
“이거 너 줄게. 다친 거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이제 연희도 나갈 거니까, 그만 삐쳐.”
오하윤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진서우가 선물 하나만 해주기를 매일 바랐다.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진서우가 자신을 생각하며 고른 선물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토록 바라던 선물이 눈앞에 놓이자, 오하윤은 이 선물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임연희를 위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오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자를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방으로 돌아가 씻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임연희는 거울 앞에 서서 그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오하윤을 바라보더니 도발하듯 웃었다.
“미안해요, 하윤 씨. 괜히 이런 모습을 보여서요.”
“어제 제가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오늘 서우가 바로 사 왔지 뭐예요. 정말 얘는...”
임연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서우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진서우는 임연희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는 순간 잠시 굳어버렸다.
진서우의 팔을 끌어안은 임연희는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를 떨었다.
“서우야, 너 정말 최고야. 나 이 선물 너무 마음에 들어.”
진서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오하윤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임연희를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네가 마음에 들면 됐어.”
“그럼요. 연희 씨가 마음에 들면 됐죠.”
오하윤도 담담하게 맞장구를 쳤다.
말을 마친 오하윤은 눈앞의 두 사람을 스쳐서 그대로 정원으로 향했다. 익숙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진서우는 멀어지는 오하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왜 오하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걸까? 혹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하지만 진서우는 곧 그 생각을 털어냈다.
‘됐어. 그저 목걸이일 뿐이야. 다음에 더 비싼 목걸이를 하나 사주면 그만이지.'
오하윤이 이 정도 일로 그렇게 옹졸하게 굴 사람은 아니었다.
진서우는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제6화
30일의 이혼 숙려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오하윤은 이미 출국 티켓을 예약해 두고 마지막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모든 짐을 상자에 담아서 먼저 해외로 부칠 생각이었다.
상자를 안고 방을 나서던 오하윤은, 마침 집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던 임연희와 진소원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자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오하윤은 황급히 물건들을 주워 담았지만, 결국 임연희와 진소원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걸 챙겨서 뭐 하려고요?”
진소원이 묻자 오하윤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다 안 쓰는 물건이라서 보육원에 기부하려고요.”
이에 진소원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고물들을 보육원에 기부한다고요? 보육원 애들도 참 난처하겠네요.”
오하윤은 진소원의 도발에 대꾸하지 않고 상자를 다시 담아서 그대로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임연희가 오하윤을 불러 세우고는 상자 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이거 꽤 예뻐 보이는데요? 제가 가질게요.”
그 순간 오하윤의 시선이 임연희의 손으로 향하더니, 다급하게 여자의 손에서 팔찌를 다시 빼앗았다.
“안 돼요. 잘못 넣은 거예요. 이건 기부 안 해요. 제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팔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오하윤에게 남긴 마지막 물건이었다.
그랬기에 오하윤은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왔다.
그런데 하필 오늘 임연희의 눈에 띄고 말았다.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팔찌 하나 가지고.”
진소원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연희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어쩌면 본인한테도 좋아요. 얼른 줘요. 그 궁상맞은 꼴 좀 그만 보이고요.”
진소원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오하윤을 몰아세웠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죠! 내 물건을 내가 왜 줘야 하죠?”
가슴속에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는지, 오하윤은 얼굴을 붉히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진소원이 순간 멍해졌다.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지른 거야?’
진소원은 오하윤이 본인이 대체 뭐라도 되는 줄 안다고 생각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진소원이 막 손을 뻗어서 팔찌를 빼앗으려는 순간, 진서우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시끄럽던데 무슨 소란이야?”
진서우의 불쾌한 시선이 방 안을 훑다가 오하윤을 바라봤다.
그러나 오하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임연희가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서우야, 다 내 잘못이야. 하윤 씨가 한 상자 가득 안 쓰는 물건을 모아서 보육원에 기부한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팔찌 하나가 마음에 들어서 혹시 나한테 팔 수 있냐고 물었는데 싫다고 했어.”
“그러게. 이렇게 옹졸한 사람은 처음 봐. 우리가 돈을 주겠다는데도 안 된대.”
진소원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부채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진서우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오하윤을 바라봤다.
“안 차는 팔찌 하나잖아. 연희가 갖고 싶다는데 그냥 줘. 내가 새걸로 하나 사줄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기에 오히려 오하윤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오하윤은 입술을 꾹 깨물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애써 참았다.
그리고 팔찌를 진서우 앞으로 내밀었다.
“똑똑히 봐. 이거 우리 어머니 유품이야.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
어머니가 막 세상을 떠났을 무렵, 오하윤은 이 팔찌를 하루 종일 손목에 차고 있었다.
잠을 잘 때조차 빼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은 진서우의 재활을 도와주다가 팔찌가 부딪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오하윤은 팔찌를 빼서 조심스럽게 따로 보관했다.
3년 동안 밤낮없이 진서우와 함께 지냈으니, 진서우도 이 팔찌를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서우는 팔찌를 한참 바라보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하윤아, 넌 정말 갈수록 너무하네.”
“팔찌 하나 가지고 유품이라는 거짓말까지 지어내?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내가 보기엔 네가 일부러 연희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연희가 원하는 물건일수록 네가 더 안 주려고 하는 거잖아. 차라리 기부해 버리더라도 연희한테는 주기 싫다는 거고.”
“네가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실망이야.”
진서우는 임연희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오하윤은 그 자리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임연희가 무슨 말을 하든 진서우는 믿었다.
하지만 오하윤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진서우에게는 단 한 마디조차 와닿지 않았다.
오하윤은 손에 든 팔찌를 꼭 감싸 쥐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제7화
그 소동 때문에 오하윤은 팔찌를 택배로 부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가방 안에 넣어 두고 나중에 직접 가져가기로 했다.
이날 오하윤은 배영숙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집에 와서 함께 식사하자는 것이었다.
배영숙은 한 가족으로서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 말에 오하윤도 마음이 움직여서 승낙했다.
본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진서우는 이미 임연희와 함께 오하윤이 평소 앉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하윤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서 다른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는 동안 진서우는 임연희를 세심하게 챙겼지만, 오하윤은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안의 음식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영숙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직접 나무랄 수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 오하윤은 배영숙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막 나섰다.
그때 정원에서 진서우와 진소원, 임연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우야, 그런데 이 팔찌 재미있어. 단단해서 호두도 바로 깰 수 있겠어.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지 모르겠네.”
“무슨 재질인지는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별로 값나가는 물건도 아니고요. 새언니처럼 그렇게 궁상맞은 사람이 무슨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겠어요!”
진소원도 따라 웃었다.
짧은 몇 마디였지만 오하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오하윤은 화가 치민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확실히 임연희의 손목에 그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팔찌에는 이미 얼룩덜룩한 상처가 적지 않게 나 있는 것으로 보니, 정말로 호두를 깨는 데 사용한 모양이었다.
오하윤의 눈에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은 쿵쿵 뛴데다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호흡도 가빠졌다.
“내 팔찌 훔쳐서 임연희한테 준 거야?”
진서우는 그 말을 듣자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훔치다니? 무슨 소리야? 연희가 이틀 정도 빌려서 차고 싶다고 했을 뿐이야. 며칠 뒤에 돌려줄 거야.”
“묻지 않고 가져간 건 훔친 거야. 그렇게 간단한 것도 몰라?”
오하윤은 거의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손을 뻗어 임연희의 팔을 붙잡고 손목에서 팔찌를 빼내려고 했다.
“아, 아파요. 하윤 씨, 저 아파요!”
임연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프다고 소리치자 진서우도 순식간에 화가 치밀었다.
고작 필요 없는 팔찌 하나 때문에 오하윤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심지어 임연희에게 직접 손까지 대다니.
진서우가 오하윤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아서 뒤로 확 내던지자, 여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번개가 갑자기 번쩍이더니 하늘에서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임연희는 진서우의 품에 기대어 끊임없이 자책했다.
“다 내 탓이야. 서우야, 그만 싸워. 내가 이 팔찌 바로 하윤 씨한테 돌려줄게.”
말을 마친 임연희는 손목에서 팔찌를 빼내서 오하윤에게 내밀었다.
온몸에 퍼진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 일어난 오하윤은 임연희의 손에 들린 팔찌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막 맞닿으려는 순간, 임연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
곧바로 임연희의 손에서 떨어진 팔찌는 바닥에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 모습에 오하윤는 공포에 질린 듯 동공이 커졌다.
반면 임연희는 옆에서 곧바로 소리를 지르며 염장을 제대로 질렀다.
“어머, 하윤 씨! 왜 제대로 안 받았어요? 팔찌가 깨져 버렸네요. 이를 어쩌죠!”
“깨졌으면 깨진 거지. 자업자득이야.”
진서우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무표정하게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런 뒤 임연희와 진소원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오하윤은 산산이 조각난 팔찌를 바라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빽빽하고 촘촘한 통증이 번져 오는 것 같았다.
곧 오하윤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목 놓아 통곡했다.
‘엄마가 나에게 남겨 준 유품이 사라졌어.’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오하윤은 3년 동안 그렇게 애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마저 잃어버렸다.
제8화
진서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저도 모르게 창가로 걸어갔다.
어두운 정원에 희미한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 왜소한 사람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팔찌 조각을 하나씩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진서우의 가슴 한구석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파왔다. 갑자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저 팔찌에 저렇게까지 집착하는 걸 보면...정말 하윤이 어머니가 남긴 유품인 걸까?’
진서우는 손에 두른 수건을 내던지고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임연희와 진소원이 마주 걸어 나왔다.
“오빠, 설마 새언니 찾으러 가려는 건 아니지? 내 말 들어. 지금 관심 끌려고 일부러 연기하는 거야. 절대 속으면 안 돼!”
임연희도 불안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서우야, 그날 하윤 씨가 자기 입으로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한번 가지고 놀아도 되냐고 물어본 것뿐이야.”
“다 내 잘못이야. 괜히 하윤 씨 마음만 상하게 했어.”
그 말을 듣자 진서우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자기가 직접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연희가 갖고 싶다고 하니까 갑자기 말을 바꾼 거고.’
‘이게 연희를 일부러 겨냥한 게 아니면 대체 뭐야?’
그래서 지금 정원에서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보이려는 모양이었다.
‘지금 내려가면 오하윤의 버릇만 더 나빠질 거야.’
그렇게 생각한 진서우는 결국 오하윤을 찾아 내려가려던 마음을 접었다.
하늘이 다시 밝아올 무렵에야 오하윤은 정원 곳곳에 흩어진 팔찌 조각을 모두 찾아냈다.
밤새도록 비를 맞은 탓에, 머리는 무거웠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정신까지 몽롱했다.
하지만 오하윤은 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제 곧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고, 그 전에 반드시 팔찌를 원래대로 복원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오하윤은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오하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주얼리 경매장에서 팔찌를 복원할 수 있는 장인을 찾아냈다.
오하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꼬박 사흘이 걸려서야 장인은 팔찌를 복원해 냈다.
“깨진 물건은 결국 깨진 거예요. 아무리 어떻게든 수리해도 금이 간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장인이 팔찌를 오하윤에게 건넸다.
오하윤은 팔찌에 길게 남은 금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장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알아요, 선생님. 이 정도로 복원해 주신 것만 해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감사드려요.”
오하윤은 상자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쳤다.
“하윤 씨, 정말 우연이네요. 주얼리 사러 왔어요?”
임연희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오하윤은 더 이상 그 여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몸을 살짝 돌리고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임연희와 어깨를 스치는 순간, 누군가 오하윤을 거칠게 밀쳤다.
곧 두 사람의 비명이 경매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잠시 후 진서우가 달려왔을 때, 두 사람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오하윤의 얼굴은 여기저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면 옆에 쓰러진 임연희는 눈에 띄는 상처 하나 없어 보였지만, 숨이 넘어갈 듯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하윤 씨, 저 싫어하시는 거 알아요. 제가 팔찌를 깨뜨린 것도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오늘은 일부러 선물까지 사서 사과하려고 온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를 계단에서 밀 수가 있어요? 저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머릿속이 윙 하고 울렸다.
오하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진서우는 이미 짙은 증오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악독할 수가 있어?”
“연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야!”
진서우의 경고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곧 진서우는 오하윤을 혐오스럽다는 듯 지나쳐서 임연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하윤은 온몸을 뒤덮은 자신의 상처를 바라봤지만, 이제는 통증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흐르긴 했지만 오하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면, 어쩌면 몸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몸이라면, 이제는 굳이 몸을 사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제9화
오하윤은 주얼리 경매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곳은 오하윤이 예전에 일했던 병원이었다.
다리를 다친 오하윤은 예전 진서우와 마찬가지로 정형외과에서 진료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스승인 방동석 교수와 마주쳤다.
상처를 처치하고 붕대를 감은 뒤, 방동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좀 어때? 아직도 아파? 남편은? 네가 입원했는데도 왜 곁에 있어 주지 않는 거야?”
오하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교수님. 저 혼자서도 잘 챙길 수 있어요.”
방동석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재벌가에 시집갔다고 하면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그 안에서 어떤 고생을 하는지는 당사자만 아는 법이었다.
방동석은 오하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괜찮아. 정 안 되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난 언제든 널 환영해.”
그 말에 오하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사드려요, 교수님. 제가 손을 놓은 지 너무 오래됐거든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실력을 되찾고 나면 꼭 돌아올게요.”
방동석은 그 말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의사라는 직업은 끊임없이 전공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하는 법이야.”
그러다 방동석이 문득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 너는 모르고 있겠구나. 네 어머니가 그때 앓았던 병 말이야. 지금은 치료 방법이 나왔어.”
“하아, 네 어머니가 몇 년만 더 버티셨다면, 지금 이렇게 혼자 남지는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오하윤은 순간 굳어버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 그럼 그때의 의료 수준으로는 저희 어머니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내가 그때 말했잖아. 발병하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길어야 3달이라고.”
“아, 이제 생각났다.”
방동석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말했던 건 아니었어. 다른 여자분한테 이야기했어.”
“그분이 네 가족이라고 하면서, 네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조금 완곡하게 전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하윤의 머릿속에서 뭔가 뚝 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오하윤에게는 다른 친척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병원에 찾아왔던 그 여자는 배영숙일 수밖에 없었다.
배영숙은 진작부터 오하윤의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10억 원을 건네며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오하윤을 진서우의 곁에 붙잡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오하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배영숙은 예상을 했던 셈이다.
그런데 오하윤은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배영숙이 손을 내밀어준 것을 고마워했고, 진서우의 곁에 남기로 했던 것이었다.
배영숙은 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오하윤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3년을 희생시켰다.
진심과 헌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하윤에게 돌아온 것은 이런 비참한 결말뿐이었다.
오하윤은 방동석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3년...”
“저의 3년이 남한테는 그저 웃음거리라니. 저 정말 너무 멍청했던 것 같아요. 정말... 너무 멍청했어요!”
오하윤은 마치 미쳐버린 사람처럼 자신의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방동석은 결국 오하윤에게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다.
그렇게 오하윤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오하윤은 꼭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지나치게 조용했다.
오하윤은 다친 다리를 끌며 퇴원 절차를 밟았다.
몸을 돌리는 순간, 병원 복도에서 진서우가 임연희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서우의 얼굴에는 임연희를 향한 걱정과 애틋함이 가득했다.
오하윤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진서우가 오하윤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연희 옆을 지나갈 수 있어?”
“너 연희한테 사과해!”
진서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오하윤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밀었어. 사과 안 해.”
오하윤의 말을 들은 임연희가 곧바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서우야, 하윤 씨 탓하지 마. 어쩌면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들은 진서우는 오하윤을 벽 쪽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길 것만 같았다.
진서우는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경고했다.
“연희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너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갈 데도 없는 사람이 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오하윤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너도 알고 있었구나. 내게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진서우는 오하윤에게 돌아갈 곳이 없어진 이유가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을까?
오하윤은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서우를 바라보는 오하윤의 눈에는 억눌려 있던 증오가 그대로 터져 나왔다.
그런 오하윤의 눈빛에 진서우가 순간 멍해졌다.
진서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오하윤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잠시 넋을 잃은 사이, 오하윤은 진서우를 거칠게 밀쳐냈다.
오하윤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오하윤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공항으로 향했고, 그 길로 이 도시를 완전히 떠났다.
떠나기 전, 오하윤은 진서우에게 두 사람의 이혼을 증명하는 서류를 퀵으로 보냈다.
퀵으로 보낼 때 수령인란에 적힌 이름을 빤히 쳐다봤다.
한때 오하윤이 수없이 되뇌었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을 바라보면서 남길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진서우,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