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GoodNovel 완결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평면도 한 장을 올렸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집이었다. 각 방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방은 부모님, 작은 방은 오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향 방에는 ‘서연의 방’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서연의 아버지는 예전에 물에 빠진 오빠를 구하려다 익사하셨다. 고아가 된 이서연은 우리 집에 와서 10년 동안 친딸처럼 자랐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원 가고 싶다며? 합격하면 이사 갈 텐데, 그때 방을 비워두면 아깝잖아.] [서연이는 다르지. 서연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돌아가신 거잖아. 이 세상에 서연이에게 남은 가족은 우리밖에 없어. 이 큰 방은 꼭 서연이에게 남겨줘야 해.] 오빠는 이미 이서연과 함께 커튼을 고르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이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3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임호는, 방금 조립한 책장을 이서연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피규어를 놓을 칸을 하나 더 만들 건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서. 나는 거실에 놓인 이삿짐 상자 위에 앉아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마저 이서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이 집에 내 자리가 없다면, 그럼 이 모든 걸 저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주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고, 서북연구센터로 가서 5년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의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챕터 (1)

第1章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평면도 한 장을 올렸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집이었다. 각 방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방은 부모님, 작은 방은 오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향 방에는 ‘서연의 방’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서연의 아버지는 예전에 물에 빠진 오빠를 구하려다 익사하셨다. 고아가 된 이서연은 우리 집에 와서 10년 동안 친딸처럼 자랐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원 가고 싶다며? 합격하면 이사 갈 텐데, 그때 방을 비워두면 아깝잖아.] [서연이는 다르지. 서연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돌아가신 거잖아. 이 세상에 서연이에게 남은 가족은 우리밖에 없어. 이 큰 방은 꼭 서연이에게 남겨줘야 해.] 오빠는 이미 이서연과 함께 커튼을 고르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이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3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임호는, 방금 조립한 책장을 이서연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피규어를 놓을 칸을 하나 더 만들 건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서. 나는 거실에 놓인 이삿짐 상자 위에 앉아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마저 이서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이 집에 내 자리가 없다면, 그럼 이 모든 걸 저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주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고, 서북연구센터로 가서 5년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의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제1화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순간에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의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때 배임호가 이서연의 방에서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배임호는 자연스럽게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이켰다. 내가 배임호를 불러 세웠다. “임호야, 오후 내내 바빴잖아. 좀 쉬어.” 배임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이서연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이따가 쉴게. 서연이 방의 커튼 봉이 좀 기울었더라. 다시 가서 맞춰야겠어.”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배임호는 다시 이서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3년 동안, 배임호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 기숙사로 이사하던 날, 박스 5개를 나 혼자 하나씩 6층까지 날랐다. 배임호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서연의 SNS를 보니, 그날 배임호는 이서연과 놀이공원에 가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도 미처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예은아, 거기 앉아서 뭐 해? 가서 서연이 침대 시트 좀 갈아줘. 새 침구 세트는 현관 앞 봉지에 있어.” 나는 복도 모퉁이에 쌓여 있는 내 짐 상자들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복도를 절반이나 막고 있었다. 아무도 옮겨주지 않았고, 어디에 둘 건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엄마, 내 짐은 어느 방에 둬요?” 엄마는 턱짓으로 베란다 옆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 “창고 방부터 정리하고 그냥 지내.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어릴 때도 한동안 거기서 잤었잖아.” 어릴 때 그랬던 건 이서연이 막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그해 오빠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오빠가 발을 헛디디며 물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이서연의 아버지가 오빠를 물 밖으로 밀어 올렸지만, 자신은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아저씨를 강가로 불러서 아이를 좀 구해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그 빚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서연이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엄마는 그녀를 끌어안고 오후 내내 울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누구도 네가 서럽게 지내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서연이가 막 아버지를 잃었으니, 네 방을 좀 비워줘. 며칠만 버티면 돼.” 그 며칠이 꼬박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나는 베개와 얇은 이불을 안고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4제곱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는 걸레통과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고, 눅눅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창문도 없고, 필라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백열전구 하나가 겨우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다 요가 매트를 깔았다. 그게 침대였다. 저녁이 되자, 엄마는 이사 축하라며 배달 음식을 한 상 가득 시켰다. 생선구이, 치킨, 망고 크레이프... 거실 탁자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은 전부 다 이서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오빠는 이서연의 그릇에 닭 날개를 집어주고, 배임호는 생선 가시를 발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나는 그저 흰밥만 조용히 먹었다. 아무도 내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을 뒤져서 남아 있던 라면 한 봉지를 꺼내고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다들 밥 먹고 있는데 너 혼자 부엌엔 왜 갔어?” “라면 좀 끓이려고요.” “밥상에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혼자 따로 해 먹겠다고? 서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가 잘못한 줄 알잖아.” 나는 불을 끄고,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실에서 이서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혹시 이런 음식 안 좋아해? 다음에는 내가 아줌마한테 언니 좋아하는 걸로 해달라고 말해볼게...” 오빠가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 “밥 한 끼 먹는 것까지 꼭 일을 만들어. 그냥 내버려둬.” 배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 채 이서연의 새우 껍질을 계속 까주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다. 배임호는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이 일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창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요가 매트에 누워 있자니, 휴대폰 화면에는 아까 사인한 비밀 유지 계약서가 그대로 떠 있었다. 하얀 백지에 검은 글씨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5년간 근무, 무단이탈 금지.] 이 계약서는 지도교수가 직접 추천해 준 것이었다. 내 논문과 데이터 분석 능력이라면, 연구팀 전체에서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이 집에서는 내 전공도, 내 성적도, 내가 기울인 어떤 노력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 근무 시작일은 8월 15일이었다. 앞으로 23일이 남았다. 23일 후면 나는 이 집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창고 방이 비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 제2화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창고조차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아침 식사를 하던 엄마가 아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예은이 나가면 창고 벽을 허물어서 서연이 옷방으로 넓혀줄까 해.” “여자애들은 짐이 많잖아. 옷장 하나로는 부족하지.” 아빠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사람 불러서 치수부터 재보자.” 이서연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줌마, 진짜 괜찮아요. 옷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그러자 오빠가 웃으면서 이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적어도 앞으로는 오빠가 사주면 되지.”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죽을 떠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정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건지, 이 집을 떠나고 싶은 건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 원하는 건 그저 내가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는 내가 머물렀던 흔적마저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배임호가 집에 왔다. 배임호의 손에는 크기가 다른 쇼핑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큰 쇼핑백 안에는 전문가용 마커 세트가 들어 있었다. 128색에 가죽 필통까지 들어 있는 제품이었다. 아직 떼지 못한 가격표에는 6만 원이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배임호는 두 손으로 이서연에게 건넸다. “현우 형한테 들었는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 색깔도 많으니까 한번 써봐.” 이서연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마커 케이스를 품에 안은 이서연은 마치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배임호는 작은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열어보니 마트 할인 코너에서 파는 우유 사탕이었다. 노란 할인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1,200원이었다. “가는 김에 네 것도 하나 샀어.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배임호에게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매운 걸 좋아했다. 겨울이면 뜨끈한 국수에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서 먹는 걸 가장 좋아했다. 코끝에 땀이 맺힐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배임호가 기억하는 취향은 언제나 이서연의 것뿐이었다. “나 단 거 안 좋아해.” 배임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럼 서연이 줘. 버리긴 아깝잖아.” 나는 우유 사탕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고로 돌아갔다. 문을 닫는 순간, 밖에서 이서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임호 오빠, 언니가 좀 기분 나빠 보이는데...” 배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이서연이 마커 포장을 뜯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배임호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 색 예쁘다.” 이제 배임호는 뒤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냥 처음부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굴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서연과 웃고 떠들었다. 차라리 몇 마디 욕을 듣는 게 덜 서러웠을 것이다. 해 질 무렵, 나는 물을 마시러 창고에서 나왔다. 그러다 부모님 방 앞을 지나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여보, 예은이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이사 온 뒤로 말을 거의 안 하잖아.” 물을 든 내 손이 문 앞에서 멈췄다. 심장이 아주 잠깐,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곧바로 그 기대를 덮어버렸다. 너무도 가볍고 무심한 목소리였다. “뭐가 이상해? 원래 어릴 때부터 저랬잖아. 말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고. 괜히 봐주지 마. 버릇만 나빠져.”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나는 문밖에 서서 물컵을 들고 있었다. 손은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눈치채고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였다. 그날 밤 짐을 정리하다가, 거실에서 충전 중이던 이서연의 태블릿 화면에 쇼핑 알림 하나가 뜬 걸 봤다. 가구 브랜드 주문 내역이었는데, 결제 금액이 무려 360만 원이 넘었다. 배송지는 우리 집이었고, 결제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그동안 새 침구며 커튼이며 침대 매트리스까지 하나씩 따져보니, 엄마가 이서연의 방을 꾸미는 데 쓴 돈은 이미 4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반면 내 창고에는 접이식 침대 하나 없었다. 이서연은 미안했는지 쇼핑백을 뒤적이다가 치마 한 벌을 꺼내 내게 건넸다. “언니, 이거 언니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아서 샀어. 내 돈으로 산 거야.” 분홍색 꽃무늬 치마, 이서연의 방에 달린 커튼과 같은 분위기였다. 이서연이 좋아하는 색과 무늬였지만, 나는 분홍색 옷을 입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치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 집에서 적어도 이서연의 눈에는 내가 보였으니까. 비록 이서연이 보고 있는 게 진짜 ‘나’는 아니지만. 그날 밤,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있는데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서북연구센터에서 온 최종 확인 메일이었다. [강예은 연구원님, 입소 절차가 모두 승인되었습니다. 8월 15일까지 도착해 주십시오. 도착 후 통신 장비는 일괄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의 메시지가 덧붙어 있었다. [연구팀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네 데이터 모델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야. 걱정하지 말고 와. 여기서 지낼 일은 전부 다 준비해 뒀으니까.] 나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 집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제3화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열흘째 되는 날은 배임호와 내가 사귄 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이틀 전부터 배임호에게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 배임호는 곧바로 대답했다. [토요일 오후지? 기억하고 있어.] 토요일 아침, 나는 종이 상자를 모조리 뒤져서 유일하게 보풀이 일지 않은 가디건 하나를 찾아냈다. 물티슈로 흰 운동화에 묻은 얼룩을 몇 번이고 닦았다. 창고에 있는 손바닥만 한 둥근 거울 앞에서 30분 동안 옅은 화장을 했다.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창가 자리를 골랐다. 그리고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한 잔은 아메리카노, 한 잔은 배임호가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였다. 얼음이 녹으면 다시 얼음을 채우고, 또 녹으면 다시 채웠다. 두 시간 반 동안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메시지에도 전혀 응답이 없었다.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배임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정말 미안해. 오늘 서연이 걔가 갑자기 자기 아빠가 예전에 자주 가던 강가에 가고 싶다고 했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혼자 뒀다가 무슨 일 생길까 봐 같이 있었어. 다음에 내가 제대로 챙겨줄게.] 그리고 사진 한 장이 함께 도착했다. 강가 난간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연, 그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배임호였다. 저물어 가는 석양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서 하나로 겹쳐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사진만 봤다면, 누구라도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켰다. 너무 써서 혓바닥 전체가 텁텁하고 떫었다. 나는 두 사람 몫의 식사비를 혼자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배임호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손에는 빨간 장미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포장지는 꽃집에서 나는 향초 향이 느껴질 만큼 고급스러웠다. 순간, 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배임호는 현관에서 곧장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서연의 방문을 열었다. “어제 많이 힘들었지? 이거 줄게. 앞으로는 매일매일 행복하게 지내.” 방 안에서 이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어서 잠긴 목소리였다. “임호 오빠, 고마워...” 벽을 짚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톱이 천천히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임호야.” 몸을 돌려 내가 복도에 서 있는 걸 본 배임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뭔가 들킨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가 우리 3주년이었어.” 배임호는 자기 이마를 치면서 과장되게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내가 뭘 잊었나 했어! 다음에, 다음에는 꼭 챙길게.” “그런데 서연이한테 줄 꽃은 기억했네.” “꽃집 지나가다가 그냥 산 거야. 얼마 하지도 않아...” “임호야.” 나는 배임호를 바라봤다. “우리 3년 만나는 동안, 넌 나한테 꽃을 한 번도 사준 적이 없잖아.”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배임호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내게 너무도 익숙한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너 좀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마. 서연이가 어제 아버지 생각나서 강가에 갔다가 오후 내내 울었다고.” “그래서 위로하려고 꽃 한 다발 사준 게 뭐가 문제야? 네가 언니인데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소리를 듣고 나온 오빠는 반사적으로 배임호의 편에 섰다. “그만 좀 해. 서연이 아버지가 나를 구하다가 돌아가신 거잖아. 우리 가족들이 서연이를 좀 더 아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이서연과 비교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남자친구에게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배임호의 마음속에서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하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창고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바닥에 앉아서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지 3년 된 그 이름을 꺼냈다. [배임호.] 저장된 이름 뒤에는 작은 태양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저장된 이름도 지웠다. 배임호는 이미 내 태양이 아니었다. 나를 향해 한 번 눈길을 주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녁 식사 시간, 이서연은 몰래 내 그릇에 갈비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언니, 이제 그만 화 풀어. 임호 오빠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나는 진심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서연의 눈을 보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서연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내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그중 부스러기만 조금 내게 내밀었다. 그러면 모두가 이서연은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다. 가장 무서운 건 정작 이서연 자신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휴대폰 뱅킹 앱을 열었다. 통장에는 192만 원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카페에서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3년 넘게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돈이었다. 서북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돈은 기지에 도착한 뒤에 다시 천천히 모으면 된다. 나는 은행 카드를 몸에 가까이 챙겨 넣고 다시 누웠다. 백열전구가 나지막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조용했다. 제4화 나를 완전히 무너뜨린 마지막 한 방은 바로 오빠의 휴대폰이었다. 그날 오후, 오빠가 샤워하러 간 사이에 휴대폰을 소파 위에 두고 갔다. 그때 화면이 잠깐 켜지더니, 단톡방 메시지 하나가 떴다. 단톡방 이름은 ‘서연이의 가족들’이었다. 5명이 있는 방이었다. 아빠, 엄마, 오빠, 배임호, 그리고 이서연이 있었다. 내 친부모와 친오빠, 그리고 3년 동안 사귄 내 남자친구가 성도 다른 여자아이와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의 단톡방을 만든 것이다. 그 사람들 사이에 나만 없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단톡방을 눌렀다. 대화 내용은 끝도 없이 길었다. 이사한 날 만들어진 단톡방이었다. 엄마가 이서연의 방 사진을 올려놓고 말했다. [우리 서연이, 드디어 자기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네.] 오빠는 폭죽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화답했다. [앞으로 누가 내 여동생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둔다.] 위로 더 올려봤다. 엄마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음성 메시지를 보낸 기록이 있었다. [임호야, 너는 예은이보다 서연이를 더 잘 챙기는구나. 걔가 워낙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네가 곁에서 계속 돌봐주면 아주머니는 마음이 놓여.] 배임호의 답장이 이어졌다. [걱정 마세요. 서연이는 제가 계속 챙길게요.] 오빠가 바로 답했다. [역시 의리가 있네.] 그리고 단톡방 위쪽에 배임호가 고정해 둔 이서연과의 개인 채팅창이 눈에 들어왔다. 이서연이 먼저 물었다. [언니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배임호가 답했다. [괜찮아. 예은이는 이 단톡방 있는지도 몰라.] [그럼 다행이야. 난 언니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뒤에는 신나게 뛰는 이모티콘 하나가 붙어 있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안심했다. 아니, 안심한 것을 넘어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휴대폰을 다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내 손끝은 얼음장처럼 싸늘해져 있었다.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판결문을 다 읽은 것 같았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피고인인 나는 마지막에서야 그 결과를 알게 된 것이다. 샤워를 마친 오빠가 나오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너, 내 휴대폰 봤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연이의 가족들...”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거기에 나는 없어?” 순식간에 거실이 조용해졌다. 엄마가 부엌에서 나왔고, 아빠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서연은 방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오빠는 휴대폰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그건 우리가 서연이 어떻게 챙길지 이야기하는 방이야.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임호는 내 남자친구야!” 나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임호한테 서연이를 계속 돌봐주라고 했잖아. 그럼 임호까지 서연이한테 넘겨주겠다는 거야?” 엄마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엄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서연이 아버지가 네 오빠 살리다가 돌아가신 거야! 언니라는 애가 그것도 이해 못 해? 그 정도 마음도 없어?” 마침 그때 배임호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배임호는 들어오자마자 먼저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예은아, 네가 너무 많이 생각한 거야. 나랑 서연이는 그냥 서로 돕는 사이야.” “그럼 기념일에 나 혼자 두고 서연이랑 강가에 간 건 뭐고?” 나는 배임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서연이한테는 6만 원이 넘는 선물을 사주고, 나한테는 1200원짜리 할인 사탕을 준 건 또 뭐야?” 배임호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그날 서연이 기분이 안 좋았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서연이를 혼자 두고 와? 이제 그만 좀 물고 늘어지면 안 돼?” 그때 이서연이 울기 시작했다. “언니...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그러자 오빠가 갑자기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 오빠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서연이 아버지는 나를 살리려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그 은혜는 내가 평생 갚아야 한다고! 네가 같이 갚을 마음이 없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나가라고?’ 내 친오빠가 나에게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도 방 안에 있던 누구 하나 오빠의 말을 막지 않았다. 아빠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조용히 말했다. “됐어. 다들 그만해.” 하지만 아빠는 오빠가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내 죄는 단 하나였다. 충분히 이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창고로 들어갔다. 조용히 문을 닫고 잠갔다. 잠시 후 문밖에서는 엄마가 이서연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이서연을 위로했고, 배임호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금세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방금 전의 싸움은 마치 잠깐 넘겨버릴 수 있는 광고 한 편과도 같았다. 그 이후 며칠 동안, 오히려 집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엄마는 이서연의 생일을 미리 축하해 준다며 딸기 케이크를 주문했다. 무려 세 단짜리 케이크였다. 오빠는 풍선과 전구 장식을 사 와서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밤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배임호는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면 이서연과 함께 베란다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들렸다. 아무도 나를 일부러 소외시키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가족들의 즐거움 속에서 나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창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물건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아파트 단지의 대형 쓰레기통에 조금씩 버렸다. 전공 서적, 낡은 옷, 일기장, 그리고 배임호가 사준 캔버스 가방과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과자까지 다 버렸다. 3년의 연애였다. 그런데 막상 한 손에 들어 보니, 한 줌의 공기만큼이나 가벼웠다. 이서연이 내게 준 분홍색 꽃무늬 치마는 깨끗하게 빨아서 곱게 접었다. 그리고 이서연의 방문 앞에 조용히 놓아두었다. 8월 14일 새벽 4시.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이었다. 나는 요가 매트를 접어 벽에 세워두고, 대걸레 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창고는 처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처럼 깨끗해졌다. 내 짐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신분증, 그리고 연구센터 입소 통지서였다. 나는 소리를 죽이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이서연의 방에서는 달콤한 딸기 향이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오빠의 방에서는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에서는 아빠가 고르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 집에는 내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에 올라탄 뒤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친구 목록에서 하나씩 삭제했다. 기지에 도착하면 통신 장비는 모두 일괄 제출해야 한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이곳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게 된다. 이제부터 갈 길이 먼데 다시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날 아침 7시 반, 엄마가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서연아, 계란찜 먹을래? 아니면 계란후라이?” 그러더니 오빠 방을 향해 소리쳤다. “현우야! 언제까지 잘 거야?” 그리고 습관처럼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텅 비어 있었다. 벽 한쪽에 접힌 요가 매트 하나만 남아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 전원은 꺼져 있었다. 메시지를 보냈지만, 회색으로 변한 프로필 사진만 보였다. “여보!” 엄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갈라졌다. “예은이 없어졌어! 짐도 전부 없어!” 오빠가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다. 10번이 넘도록 전화를 걸었지만, 매번 차가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배임호도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배임호는 창고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아빠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수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고지문 씨가 맞습니까? 저는 예전에 이건호 씨와 같이 일했던 주태영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이건호 씨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때의 물건을 몇 가지 발견했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던 그 일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사실이 좀 있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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