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지 못한 인연

GoodNovel 완결

태자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 지도 어느덧 일곱 해가 흘렀다. 그런데 혼례를 하루 앞둔 날, 그에게 공략 시스템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증오 또한 컸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승상의 딸 조예진을 태자비로 맞아들인 뒤 그녀를 옥사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으로 그녀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무렵, 진북장군 김동건이 변방에서 서둘러 귀환했다. 황실의 경계와 의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두 다리를 잃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챕터 (1)

第1章

태자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 지도 어느덧 일곱 해가 흘렀다. 그런데 혼례를 하루 앞둔 날, 그에게 공략 시스템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증오 또한 컸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승상의 딸 조예진을 태자비로 맞아들인 뒤 그녀를 옥사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으로 그녀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무렵, 진북장군 김동건이 변방에서 서둘러 귀환했다. 황실의 경계와 의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두 다리를 잃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1화 그날, 김동건은 옥사에 갇혀 있던 박지영을 직접 데리고 장군부로 돌아왔다. 눈시울까지 붉힌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연모해 왔다며, 공략 대상을 자신으로 바꿔 달라고 애원했다. 그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박지영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동건과 혼인한 뒤로는 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지냈다.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그렇게 믿어왔다. 박지영은 밤참으로 탕을 가져다주려 김동건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와 호위무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김동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연모한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품은 여인은 오직 조예진뿐이었다. 자신에게 혼인을 청한 것조차 조예진의 연정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그의 다리는 이미 일 년 전에 말끔히 나은 뒤였다. 그런데도 줄곧 절뚝거리는 척한 것은 자신의 죄책감을 이용해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조예진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이진호의 태자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직접 그 진실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 버리는 듯했다. 김동건과 함께 보낸 지난 이 년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거짓이었다. 박지영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에 밤새 울었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시스템을 불러냈다. “시스템, 이 세계에서 떠나기를 신청할게. 또한 김동건과 이진호와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토록!” 곧이어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숙주님의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시간 통로를 개방합니다. 칠 일 후 숙주님을 이 세계에서 이탈시킵니다.” 바로 그때. 끼익, 문이 열리더니 김동건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왔다. “지영아, 오늘 저잣거리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물건을 몇 가지 구해 왔소.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지 골라 보거라.” 박지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어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었다. 어디에서도 거짓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지영은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나으리, 큰일이옵니다! 태자비마마께서 고열로 앓고 계시온데,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는다 합니다. 설련(雪蓮)을 구하려 궁녀까지 보내셨습니다.” 박지영은 곧바로 김동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스쳤다가 사라지는 당황스러움과 근심을 보았다. 역시나였다. 아무리 완벽하게 속인다 한들, 끝내 감출 수 없는 순간은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 한편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려 왔고, 움켜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조예진이 달라고 한 설련은 평범한 약재가 아니었다. 과거 김동건이 다리를 다쳐 죽을 고비를 넘길 때, 그녀가 직접 천산까지 가서 따 온 귀한 영약이었다. 당시 그녀는 홀로 그곳에서 늑대 떼와 사투를 벌이고, 얼어붙은 설원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겨우 두 송이를 얻었다. 그중 한 송이로 김동건의 목숨을 살렸고, 남은 한 송이는 귀하게 보관해 두었다. 박지영은 알고 있었다. 조예진이 원한다면 김동건은 반드시 내어 줄 터였다.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건은 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설련을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 이내 관복으로 갈아입고 직접 궁으로 향했다. 그날 밤, 김동건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자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이 쉴 새 없이 울리며 캄캄한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박지영은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였다.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눈꺼풀까지 쉼 없이 떨렸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금군이 장군부로 들이닥쳤다. 금군은 태자의 영패를 내보이며 박지영을 붙잡아 그대로 동궁으로 끌고 갔다. 죄목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귀를 의심했다. 설련에 독을 타 태자비가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박지영은 설련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조예진의 모함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하지만 박지영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권세도, 결백을 밝혀 줄 증거도 없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감들이 못이 촘촘히 박힌 형틀을 들고 왔다. 태자의 명으로 그녀더러 그 위를 구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진호는 박지영이 자신을 공략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한때 사랑했던 만큼 깊이 그녀를 증오했다. 더구나 그녀가 장군부로 시집간 뒤에는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형벌이 이진호의 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박지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태자의 분부가 모두 전해지자, 금군은 곧바로 달려들어 박지영을 억지로 못판 위에 짓눌렀다. 날카로운 못 끝이 살갗을 뚫고 파고들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찢겨 나가며 곳곳에 깊은 핏자국이 벌어졌다. “아악...!” 박지영은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검붉은 피가 바닥의 돌판을 붉게 물들였고, 찢겨 나간 살점이 쇠못에 걸려 있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고문은 반 시진이나 이어졌다. 박지영은 몇 번이나 이대로 피를 다 쏟고 죽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희미해지는 시야 속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동건이었다... 그가 다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박지영의 의식은 오랫동안 깊은 어둠 속을 헤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올 무렵, 곁에서 누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근위대장이었다. “나으리께서는 분명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는 애초부터 설련에 손조차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태자비마마의 모함인 줄 아시면서, 어찌 태자 저하께 사실을 밝히고 마님을 위해 선처를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동건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저하께서 한때 지영이를 그토록 마음에 두셨으니, 예진이가 질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제 와 지영이에게 그동안 쌓인 화를 좀 풀고 싶다는데, 그것으로 예진이의 분이 풀린다면 지영이가 고초 좀 겪는 것이 무슨 대수겠느냐?” 제2화 그 말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얼음장 속에 내던져진 듯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김동건에게는 조예진만 기쁘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지아비였다. 이토록 자신을 속여 마음까지 내어 주게 만들어 놓고,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조예진밖에 없었다! 박지영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절망과 고통만큼은 끝내 눌러 참지 못했다. 소리를 들은 김동건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걱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지영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늦었다. 약효가 좋은 금창약(金瘡藥)을 발라 두었으니 당분간 푹 쉬거라. 며칠 지나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김동건의 눈빛에 넘칠 듯 어린 안타까움을 보는 순간, 박지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사람이 이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참담할 대로 참담해져, 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마주할 기력조차 없었다. 박지영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김동건은 직접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이어 탕약까지 가져와 한 숟갈씩 떠먹였다. 그 뒤로 이틀 동안은 한시도 침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낮으로 자리를 지킨 탓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 박지영의 상처에 딱지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김동건은 그동안 밀린 공무를 처리하러 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박지영은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꺼내 모두 없애 버렸다. 뒤이어 서찰을 정리하려 서재로 향했다가, 우연히 숨겨진 비밀 장치를 건드렸다. 사락사락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 한쪽에 느닷없이 문 하나가 나타났다. 박지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촛불 하나를 밝혀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비밀 통로를 지나 밀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벽마다 조예진의 초상화가 가득 걸려 있었다. 차를 마시며 옅게 웃는 모습, 말 위에서 당당히 바람을 가르는 모습, 춤사위를 펼치는 고운 자태도 있었다... 김동건은 그 모든 모습을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그려 두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또한 탁자 위에는 수백 통에 달하는 서찰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모든 서찰의 끝에는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예진 낭자에게.] 종이마다 영원히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는 맹세와, 다음 생에서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빼곡했다. 글자마다 스민 깊은 연정을 읽어 내려가던 박지영의 몸이 문득 휘청였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어찌하여 김동건의 서재에는 매일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그는 책을 읽거나 글씨를 익히던 것이 아니었다. 조예진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차마 저하지 못할 마음을 서찰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영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힘없이 휘청이는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밀실의 문이 막 닫히려던 순간,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김동건이 들어섰다. 박지영의 모습을 본 김동건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했다. 그는 성큼 다가와 박지영을 거칠게 붙잡은 뒤 서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내 허락도 없이 어찌 함부로 서재에 들어온 것이냐?” 강하게 붙잡힌 손목에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터졌다. 곧바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박지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소첩은 그저 제 물건을 가지러 왔을 뿐이온데, 어찌 서재에는 들어오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그는 곧바로 손을 놓고 박지영의 손목에 맺힌 피를 닦아 냈다. 이내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서재에 조정에 올릴 상소문이 많아 혹여 뒤섞일까 염려했을 뿐이다. 부인은 우선 몸부터 추스르도록 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건은 박지영의 말대로, 자신이 변방에 머물 때 그녀가 보내 왔던 서찰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그는 박지영이 갑자기 그것들을 왜 찾는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조예진이 보낸 궁녀를 본 순간, 김동건은 서둘러 장군부를 떠났다. 박지영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든 서찰을 모두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불길이 종이를 삼키며 글씨를 하나씩 지워 갔다. 십여 일이 지나면 자신 또한 이 종이장처럼 사라질 것이다.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김동건은 해가 저물 무렵에야 돌아왔다. 김동건은 촉수(蜀繡)가 정교하게 놓인 새 옷 한 벌을 들고 박지영의 처소로 찾아왔다.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영아, 요 며칠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더구나. 오늘 밤 도성에서 등불놀이가 열린다는데, 나와 함께 나가 바람이라도 쐬는 것이 어떠냐?” 박지영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김동건에게 이끌려 결국 장군부를 나섰다. 대보름을 맞은 거리는 형형색색의 등불로 환했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김동건은 길을 걷다 멈추기를 거듭하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토끼 모양 연등부터 비녀와 옥잠, 연지와 분, 떡과 과자까지. 뒤따르는 하인 대여섯 명의 두 손이 모자랄 정도였다. 장사꾼들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을 놀렸다. “마님, 나으리께서 참으로 마님을 귀히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이것들이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들입니까?” “나으리께서 이리 많이 사 주셨는데, 마님께서는 나으리께 드릴 신발이나 버선이라도 골라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변에서 짓궂게 말을 건넸지만, 박지영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괜찮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순간 김동건은 잠시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박지영이 오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예전의 박지영은 저잣거리에 나올 때마다 그에게 어울릴 옷이며 관모, 장신구를 정성껏 골라 주곤 했다. 괜찮은 칼이나 쓸 만한 병장기라도 눈에 띄면 빠뜨리지 않고 사서 선물했다. 김동건은 그녀가 왜 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요즘 들어 마음이 상해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 달래 주려던 찰나였다. 맞은편에서 동궁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장군부 사람들을 알아본 마부가 갑자기 채찍을 거칠게 내리쳤다.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날뛰더니 그대로 박지영을 향해 돌진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박지영은 발목을 접질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발목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에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자, 요염한 미소를 띤 조예진이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한 것이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태자비마마의 행차를 막다니! 여봐라, 채찍 서른 대를 쳐라!” 제3화 조예진을 모시는 시녀의 명이 떨어지자, 금군이 곧장 채찍을 치켜들었다. 채찍이 박지영의 몸에 내리꽂히려는 순간, 김동건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태자비마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신이 제 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마마의 행차를 방해했습니다.” 그제야 조예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진북장군이 그리 청하니, 채찍질은 면해 주지요.” 그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지영을 내려다보았다. “박씨, 바닥에 엎드려 본궁에게 열 번 머리를 조아리거라. 허면 이번 일은 더는 묻지 않겠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분명 그녀인데, 헌데 나더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니!’ 박지영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거칠게 걷어찼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박지영은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억누르며 김동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동건의 시선은 오직 조예진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마치 그녀는 그의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금군에게 짓눌린 채 열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지만, 조예진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얼굴이었다.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구나. 정성이 모자란 모양이니, 열 번 더 조아리게 하거라!” 바닥을 짚은 박지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김동건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었다. 그 순간, 박지영은 그에게 품었던 마지막 기대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힘껏 이마를 내리쳤다. 쿵! 쿵! 쿵! 둔탁한 소리가 거리에 연이어 울려 퍼졌다. 갈라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을 타고 내려와 옷깃을 붉게 물들였다. 박지영은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오도록 악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신음 한마디 내지 않았다. 그 처참한 꼴을 지켜보고서야 조예진은 비로소 만족한 듯했다. 그제야 김동건도 정신을 차린 듯 박지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 궁녀가 뒤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진북장군, 태자 저하께서는 조금 전 입궁하셨습니다. 오늘 태자비마마께서 바깥나들이를 하시는 동안 나으리께서 곁을 지켜 주시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김동건은 곧장 박지영을 부축하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예진의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신, 명을 받들나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김동건의 목소리를 듣자, 박지영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쥐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던 순간, 조예진이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 “본궁이 거리를 좀 둘러볼 터이니, 박씨도 곁을 따르거라.”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박지영에게는 그럴 힘도 처지도 없었다.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조예진은 곁눈질로 그녀를 훑어보다가, 하인들이 들고 있는 물건에 시선을 멈췄다. 이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것은 본궁이 가장 좋아하는 부용떡과 화월방(花月坊)의 연지가 아니더냐? 박씨 너도 같은 것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려.” 그러다 토끼 모양 연등까지 발견한 조예진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 연등도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마침 본궁의 띠가 토끼띠이기도 하니, 저 연등을 본궁에게 양보해 주면 안 되겠느냐?” 박지영은 하인들이 들고 있는 연지와 부용떡을 바라보다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난 두 해 동안 김동건이 자신을 기쁘게 해 주겠다며 사다 준 것들은 모두 조예진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순간 박지영의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릿하게 저려 왔다. 시리고 쓰린 통증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동건은 김동건은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인들에게 물건을 모두 마차에 옮겨 싣게 했다. 조예진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마부에게 출발을 명했다. 그날 밤 조예진은 도성의 크고 작은 거리를 십여 곳이나 돌아다녔다. 김동건은 마차 곁을 지키며 곳곳의 볼거리와 구경거리를 하나하나 다정히 설명해 주었다. 반면 박지영의 발에는 어느새 물집이 가득 잡혀 있었다. 터진 물집마다 피가 배어 나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달군 숯 위를 걷는 듯 쓰라렸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이를 악물고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해시(亥時)가 되어서야 등불놀이가 끝나고, 조예진의 마차도 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때쯤 박지영의 두 다리는 퉁퉁 부어 한 걸음조차 떼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녀는 겨우 벽을 짚고 서서 조예진에게 작별을 고하는 김동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웃음이 가득했다. ‘나에게는 형벌이나 다름없었던 이 긴 밤이, 김동건에게는 연모하는 여인과 함께할 수 있는 더없이 귀한 시간이겠지.’ ‘그러니 저토록 헤어지기 아쉬운 얼굴을 하는 거젰지.’ 그때, 적막을 깨뜨리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이다! 태자비마마를 보호하라!” 그 소리에 박지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자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고, 순식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칼을 뽑아 서로 맞서는 두 무리를 보고, 박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목을 다친 탓에 멀리 달아날 수 없었던 박지영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진 곳에 몸을 숨겼다. 김동건은 이미 칼을 빼 들고 마차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달려드는 자객들은 단 한 명도 마차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자객들이 쓰러졌고, 붉은 피가 허공에 흩어졌다. 자객들의 기세는 거셌다. 금군만으로는 막아 내기 어려웠고, 어느새 김동건은 혼자 세 명의 자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곳곳에 상처가 늘어났지만,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숨을 내던지듯 싸우는 김동건의 모습을 바라보던 박지영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슴속에서는 온갖 감정이 뒤엉켜 일었다.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김동건은 조예진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반면 자신은 같은 위험 속에 놓여 있는데도, 김동건은 단 한순간도 그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이토록 선명했다. 일각쯤 지나 소란을 듣고 달려온 군사들이 전투에 합세했다. 점차 열세에 몰린 자객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제압되었다. 김동건은 칼을 거두고 조예진이 마차에서 내려오도록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익―!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동건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조예진을 향해 곧장 날아드는 화살을 보자,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김동건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박지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그대로 앞으로 밀쳐 냈다. 제4화 화살은 조예진의 몸을 불과 몇 치 앞에 두고 멈췄다. 조예진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 대신 십자형 화살촉이 박지영의 어깨를 관통했다. “아...!”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박지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슴께로 붉은 피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힘이 풀리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화살대가 등에 박힌 채 뚝 부러졌다. 피가 흥건한 바닥 위에서 박지영의 몸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연신 경련을 일으켰다. 시야도 서서히 흐려졌다. 주변의 아우성은 점점 아득해졌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끝내 정신을 잃기 직전, 흐릿한 시야 속으로 김동건의 모습이 들어왔다. 김동건은 말을 타고 조예진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사람 또한 김동건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지영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어제 너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경솔했다. 자객들이 태자비마마만 노린다고 생각해 너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구나. 내가 곁에 있었으면서도 너를 다치게 했구나.” 박지영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듣기조차 지겨운 변명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김동건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그의 신분상 태자비를 지켜야만 했으리라 스스로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예진을 살리겠다고 제 몸을 화살받이로 내몬 모습을 직접 본 이상, 더는 그 어떤 변명도 믿을 수 없었다. 박지영은 왜 자신을 화살받이로 내세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중상을 입은 자신을 버려둔 채 어째서 조예진부터 데리고 떠났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자신은 김동건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뿐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변명을 듣느라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김동건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옷과 장신구를 끊임없이 사들였다. 하지만 이제 박지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몸을 추스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조예진이 또다시 궁녀를 보내왔다. “장군 부인께서 태자비마마를 대신해 화살을 맞은 공이 크다 하시어, 마마께서 친히 궁으로 불러 상을 내리신다 하옵니다. 어서 감사의 예를 올리시지요.” 박지영은 단번에 알았다. 상을 내리겠다는 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그녀를 불러들인 데에는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다. 입궁하고 싶지 않았지만, 김동건은 박지영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대신 응낙했다. 그러고는 새 옷 한 벌까지 꺼내 와 갈아입으라 했다. 박지영은 동궁 앞에서 꼬박 한 시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두 다리가 저려 감각마저 무뎌질 즈음에야, 태감이 나와 동궁전 안으로 들라 전했다. 박지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높은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겨우 전각 안에 들어서자 짙은 침향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안쪽에서 조예진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이제 아바마마께 문안드리러 가셔야지요. 그만 신첩을 놀리시옵소서.” ‘이진호도 있었어?’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자, 박지영의 심장이 순간 세차게 뛰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숨을 곳을 찾기도 전에 이진호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한때 그녀를 바라보는 이진호의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지금 그 눈에는 혐오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만이 뒤엉켜 있었다. 이진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곧 시선을 거두더니 앞만 바라본 채 그녀를 지나쳐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진도 느긋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박씨, 지난번 나를 구하려다 새로 지은 옷이 망가지지 않았느냐.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 어렵사리 같은 옷감을 구해 새 옷을 한 벌 지었으니, 몸에 맞는지 한번 입어 보거라.” 조예진이 가볍게 손짓하자, 곧바로 궁인 한명이 쟁반 하나를 받쳐 들고 앞으로 나왔다. 박지영은 고개를 들었다가 쟁반 위에 놓인 가슴가리개를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조예진이 웃으며 말했다. “어찌 감사의 예를 올리지 않는 것이냐? 마침 잘되었으니 여기서 갈아입어 보거라. 본궁이 보고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상의원에 일러 다시 손보게 하마.” 조예진의 웃음소리에 노골적인 악의가 묻어났다. 박지영은 소매 속에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무슨 속셈인지 뻔했다. 조예진은 작정하고 자신을 욕보이려 하고 있었다. 박지영은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날 방도를 생각했다. “마마, 이곳은 동궁전이옵니다. 소첩이 어찌 감히...” 그 말에 조예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본궁은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네! 박씨가 끝내 은혜를 저버리겠다면, 어쩔 수 없지. 장 상궁, 그대들이 직접 갈아입혀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몇 상궁이 곧바로 달려들어 박지영의 두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놓으세요!” 박지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손톱이 부러질 듯 버티며 상대의 손을 할퀴어 피까지 냈지만, 여러 사람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겉옷이 거칠게 벗겨지고, 속옷마저 하나씩 뜯겨 나갔다. 박지영은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옷이 모조리 벗겨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상궁들이 새로 가져온 가슴가리개를 억지로 입혀 놓고서야 조예진은 흡족한 듯 손뼉을 쳤다. “역시 잘 어울리는구먼.” 그녀는 박지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짙은 자줏빛이 박씨의 흰 살결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군. 참으로 보기 좋소!”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좋은 구경을 본궁 혼자만 할 수야 없지.” 조예진이 장 상궁을 바라보며 명했다. “장 상궁, 박씨를 데리고 궁 안을 한 바퀴 돌거라.”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궁안에 사람들이 실컷 구경할 수 있도록.” 제5화 박지영은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조예진이 자신을 이토록 처참하게 욕보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상궁들에게 붙들린 채 궁궐 후원으로 끌려가는 내내, 매서운 찬바람이 칼날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한기에 내몰리자 온몸이 금세 얼얼해지고, 드러난 살갗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는 내내 오가는 궁녀와 금군, 내관들은 하나같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멀찍이 선 이들은 박지영을 흘겨보며 거리낌 없이 수군거렸다. “이미 진북장군 나으리의 부인이 된 몸인데, 어쩜 저리 낯짝이 두꺼울까! 역시 요망하기 짝이 없어!” “저런 꼴로 궁 안을 돌아다니는 걸 보니, 혹여 아직도 저하께 미련이 남은 것 아니겠지? 행실이 저리 문란하니, 저런 년은 물에 처넣어 죽여야 마땅해!” 숨길 생각조차 없는 조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박지영은 밀려드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세게 깨문 탓에 비릿한 맛이 번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은 이미 한기에 굳어 감각조차 희미했다. 뼛속 깊이 스민 냉기에 온몸이 쉼 없이 떨렸다. 어느 순간에는 정말 이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동궁전으로 끌려와 따스한 기운에 몸이 풀리고서야, 박지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상궁들은 박지영을 전각 한쪽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몸을 웅크린 채 가쁜 숨을 고르던 박지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붓을 놀리고 있는 조예진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김동건이 서 있었다. 그는 조예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감출 생각조차 없는 애틋한 연모가 눈빛에 선명하게 묻어났다. 잠시 뒤 마지막 붓질을 마친 조예진이 활짝 핀 모란 그림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진북장군, 어떻습니까?” 김동건은 그림을 바라보며 답했다. “살아 있는 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옵니다.” 그러자 조예진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다 구석에 앉아 있는 박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장군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이 모란도를 부인께 내리도록 하지요. 등에 그대로 새겨 드리세요. 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박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섬세하게 그려진 모란도와 그 옆에 놓인 문신 바늘을 본 순간, 박지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안 됩니다!” 그러나 김동건은 먼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자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눈앞에서 김동건이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모습을 보자, 박지영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지만, 곧 여러 상궁에게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놓으세요! 제발 놓아 주세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잠시 뒤 차가운 바늘 끝이 등에 닿았다. “아악―!” 날카로운 통증에 박지영의 몸이 크게 떨렸다. 검푸른 물감이 등 위에 번져, 군데군데 남아 있던 흉터를 감추듯 뒤덮었다. 박지영은 고통을 참지 못해 연신 몸을 떨었다.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손끝은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듯 바닥을 헤맸다. 그러다 문득 단단한 손 하나를 붙잡았다. 김동건이었다. 그는 박지영의 손을 꼭 감싸 쥔 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영아, 조금만 더 참거라. 다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데려가마.” 박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등에서 밀려오는 고통보다 그 말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픕니다... 너무 아픕니다...” 목소리는 이미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제발... 그만하게 해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만 김동건은 끝내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바늘은 다시 움직였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붉은빛이 감도는 모란이 박지영의 등에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그 과정은 더욱 참혹하게 느껴졌다. 고통이 거듭될수록 정신은 점점 흐려지고 감각마저 무뎌졌다. 마지막 바늘이 살갗을 파고든 순간, 박지영은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박지영은 긴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러다 등에 번지는 통증에 흐릿하게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자신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굳은살이 밴 손끝이 등에 새겨진 꽃의 윤곽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박지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정면에 놓인 거울 속으로 김동건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향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김동건은 그녀의 등에 새겨진 모란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예진아...”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이 모란이 있으니, 이제 남은 생 동안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머물게 할 곳이 생겼구나.” 제6화 그 말을 직접 듣는 순간, 박지영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수모가 김동건에게는 그저 연모하는 여인을 떠올리기 위한 흔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했던 걸까?’ 박지영은 묻고 싶었다. 더는 참지 못한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라니요... 무슨 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지영이 깨어난 것을 본 순간, 김동건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영아, 정신이 들었느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 눈앞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모습에 박지영은 새삼 놀랐다. 목소리가 한층 차갑게 가라앉았다. “등에 새긴 곳이 전부 아픕니다.” 그러자 김동건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군에서 쓰는 진통 연고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에 약을 발라 주었다. “약을 바르면 통증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청화(靑花)를 넣은 약욕도 준비해 두었다. 며칠 지나 상처가 아물면 괜찮아질 게다.” ‘청화라니?’ 박지영의 눈빛이 굳었다. ‘그것은 등에 새긴 무늬의 빛깔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는 데 쓰는 약재가 아니던가?’ 그녀는 홱 고개를 들었다. “그 무늬가 그렇게도 마음에 드십니까?” 떨리는 목소리 끝에 억눌러 온 감정이 터져 나왔다. “허나 저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치욕으로 남을 텐데, 서방님께서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붉어진 눈가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제야 김동건은 달래듯 말했다. “지영아, 등에 있는 것이니 네 눈에는 보이지 않지 않느냐. 그냥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박지영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김동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청화를 넣으려 한 것도 상처 자국과 멍을 가라앉히려 했을 뿐이다. 네가 싫다면 넣지 않으마. 허니 노여워하지 말거라, 응?” 박지영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김동건의 마음에는 오직 조예진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수치와 아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무슨 말을 더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박지영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그 뒤 며칠 동안 김동건은 관아에도 나가지 않고 장군부에 머물렀다. 박지영의 마음을 달래겠다며 여러 광대패까지 불러들여 날마다 연희를 벌이게 했다. 하지만 박지영은 이제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날이 갠 어느 날, 그녀는 사람을 불러 후원에 가꾸어 둔 약초밭을 모조리 거두게 했다. 한동안 부산스러운 소리가 이어지자 김동건도 곧 후원으로 찾아왔다. 그는 황폐해진 약초밭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심은 것은 박지영이 사방을 수소문해 어렵게 구한 약초들이었다. 두 해 동안 공들여 가꿔 온 곳이 하루아침에 텅 비어 버린 광경을 마주하자, 김동건의 가슴에 문득 알 수 없는 불안이 일었다. “잘 자라던 것들을 어찌 모두 걷어 낸 것이냐?” 박지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땅바닥에 흩어진 약초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김동건은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며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오래된 부상이 도질 때마다 밤잠조차 이루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박지영은 그런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래된 의서와 처방을 찾아 헤매고, 어렵게 구한 약초를 하나둘 심어 이 약초밭을 만들었다. 언젠가 그의 묵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낫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눈이 연일 쏟아지는 바람에 약재가 모두 얼어 상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얼어 버렸다고?’ 그제야 김동건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박지영의 차가운 손을 감싸 품속에 넣었다. “괜찮다. 약초야 다시 구하면 되지.” 그러더니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마침 새로 얻은 녹매(綠梅) 몇 그루가 있으니, 이곳에 옮겨 심으면 되겠구나. 꽃이 필 무렵이면 우리도 여기서 화로를 가운데 두고 앉아 차나 달여 마시자꾸나.” 곧 김동건은 사람을 시켜 녹매 몇 그루를 가져오게 했다. 직접 땅을 파고 나무를 심은 뒤 물까지 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인들을 붙잡고 한참이나 당부했다. 물을 거르는 때부터 추위를 막는 일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일렀다. 김동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박지영은 알고 있었다. 그 녹매는 동궁전에서 도성의 여러 집안에 나누어 보낸 것이었다. 그저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오가는 흔한 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동건이 이토록 소중히 다루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녹매가 조예진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녀가 직접 골라 보낸 것이니, 김동건에게는 평범한 꽃일 리 없었다. 박지영은 조예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돌아섰다. 이제 사흘만 지나면 된다. 사흘 뒤면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저 녹매가 꽃을 피우든, 끝내 피지 못하든. 그때가 되면 모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7화 정월 열아흐레는 김동건의 생일이었다. 장군부에서는 예년처럼 몇 상의 잔칫상을 차렸고, 점심 무렵부터 동료들이 하나둘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모두 박지영이 직접 챙겼다. 하지만 올해는 몸이 좋지 않다는 말만 남긴 채 손을 떼었다. 그러자 장군부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찾아온 손님을 잘못 맞이하는가 하면 술과 음식을 빼먹고, 그릇을 깨뜨리는 일까지 끊이지 않았다. 김동건 역시 밀려드는 손님을 혼자 감당하지 못했다. 그제야 그는 해마다 박지영이 얼마나 많은 일을 도맡아 해 왔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밤이 깊어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김동건은 박지영이 머무는 처소를 찾았다. 둘이서라도 조촐하게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막 술과 음식이 차려졌을 때, 문지기가 급히 찾아와 알렸다.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박지영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김동건만 나가도록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진이 사람들을 잔뜩 거느리고 처소까지 들이닥쳤다. “부인께서 아프다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그리 위중해 보이지는 않네요.” 조예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본궁을 피하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박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곁을 지키던 시녀 소월이 먼저 나섰다. “태자비마마, 저희 마님께서는 며칠째 몸져누워 계셨사옵니다. 몸이 쇠약하여 혹여 마마와 태자 저하께 누가 될까 염려한 것이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러자 조예진의 시선이 곧바로 소월에게 향했다. “어디서 온 천한 계집이 감히 본궁의 말에 끼어드는 것이냐? 여봐라, 뺨을 서른 대 쳐라!” 명을 받은 상궁 몇이 곧장 달려들어 소월을 붙잡았다. 이어 손을 치켜들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소월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고, 처절한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박지영 역시 조예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시녀에게 화풀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소월이가 자신 때문에 화를 입었다는 걸 알기에, 즉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나섰다. “마마.” 박지영이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소첩에게 잘못이 있다 여기신다면 저 하나만 벌하여 주십시오. 아무 죄 없는 아이까지 끌어들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조예진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물론 네 잘못이지! 본궁을 업신여긴 것이 첫째고, 종을 시켜 본궁에게 대들게 한 것이 둘째다. 허니 벌도 두 배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예진은 궁에서 따라온 금군들을 불렀다. 체격 좋은 사내들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들어서자, 소월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병든 박지영에게까지 손을 댈까 두려웠던 소월은 몸부림치며 그녀 앞을 막아섰다. “마님께는 손대지 마세요!”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탁자가 엎어졌고, 술과 음식이 바닥에 쏟아졌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바닥에 제압당했다. 곧이어 거친 매질이 이어졌다. 박지영은 이를 악물고 견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에 피가 배어 나왔고, 눈앞마저 어지럽게 흔들렸다. 한참 뒤에야 매질이 끝났다. 박지영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한동안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조예진이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박지영, 네가 본궁에게 태자비 자리를 빼앗겼다고 여겨 원망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해서 번번이 본궁에게 덤비는 것이겠지.” 박지영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조예진은 차갑게 웃었다. “허나 똑똑히 알아 두거라. 네가 무슨 수를 쓰든 본궁은 영원히 태자비다. 태자 저하도, 김 장군도 결국 본궁의 편에 설 것이고.” 목소리에 노골적인 우월감이 묻어났다. “넌 평생 본궁을 이길 수 없어.” 박지영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저는 단 한 번도 마마와 무엇을 다투려 한 적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 말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조예진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 순간 넓게 퍼진 옷자락이 곁에 놓인 촛대를 건드렸다. 촛대가 쓰러졌다. 다음 순간 불씨가 바닥에 쏟아진 술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예진의 치맛자락까지 옮겨붙었다. “아악!” 조예진은 비명을 내지르며 새파랗게 질렸다. 박지영도 남은 힘을 끌어모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밖이었다. 바로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진호와 김동건이 뛰어들었다. “예진아!” “예진아!”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김동건은 문 앞에 선 박지영을 미처 살피지도 않은 채 옆으로 밀쳐 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조예진에게 닿는 길뿐이었다. 이진호 역시 조예진의 비명을 따라 곧장 달려갔다. 그는 불길 속에 있던 조예진을 품에 안아 들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박지영은 바닥에 쓰러진 채 두 남자가 조예진을 감싸 안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역시 그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구 하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길이 가까이 번져 오고, 매캐한 연기가 숨통을 조였다.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숨을 들이쉴수록 가슴이 답답해졌고, 머릿속도 점점 흐려졌다. 뜨거운 열기와 고통 속에서 의식마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던 순간이었다. 그때 소월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박지영을 끌어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막 바깥으로 나왔을 때, 조예진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장군 부인 박씨가 일부러 촛대를 넘어뜨렸사옵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신첩이 본인의 자리를 빼앗았다며 원망하더니, 저와 함께 죽으려 했사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진호와 김동건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박지영에게 향했다. 박지영은 이미 변명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소월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저하, 아니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먼저 사람을 시켜 저희 마님을 벌하신 분은 태자비마마이옵니다. 불이 난 것도 마마께서 돌아서시다 촛대를 건드렸기 때문이옵니다. 저희 마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사옵니다!” 소월은 곧 김동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으리.”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떨렸다. “마님은 나으리의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부디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 제8화 ‘일개 시녀가 제 주인을 저리 감싸고 나서다니?’ 조예진이 화를 내기도 전에 김동건이 먼저 소월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무엄하다!” 이진호의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하찮은 시녀 주제에 감히 태자비를 모함하다니? 김 장군, 알아서 처리하게!” 그 말을 들은 김동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았다. 박지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통을 견디며 눈을 뜬 순간, 김동건의 칼이 소월의 가슴을 꿰뚫는 장면을 보았다. “안 돼!” 따뜻한 피가 얼굴을 적시고,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박지영은 눈을 크게 뜬 소월이가 소리 없이 바닥에 쓰러져, 서서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에도 칼날이 파고든 듯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박지영은 눈앞이 캄캄해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피를 왈칵 토해 냈다. 온몸을 찢는 고통에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 의식을 잃기 직전, 박지영은 이진호의 냉담한 목소리를 들었다. “박지영은 태자비를 해하려 했으니, 법도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 뒤 며칠 동안 박지영은 물감옥에 갇혔다. 차가운 물이 어깨까지 차올라 피부가 하얗게 불었고, 물에 잠긴 상처는 점점 곪아 흉측하게 변해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이 얼어 정신을 잃으면 하인들은 박지영을 매달아 불에 쬐어 억지로 깨웠다. 그러고는 다시 물속에 던져 넣었다. 온몸은 성한 데 하나 없이, 뼈마디와 살갗이 모두 부서져 내릴 듯 쑤시고 아팠다. 반복되는 고문 끝에 박지영은 죽음의 문턱에 섰다고 느꼈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를 때 김동건이 나타났다. 김동건은 겉옷을 벗어 박지영의 몸을 감싼 뒤 품에 안고 그 지옥 같은 곳을 나왔다. 그의 품은 뜨거웠지만, 박지영의 몸에 밴 한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박지영은 힘겹게 눈을 뜨고 떨리는 입술로 한마디를 물었다. “소, 소월이는요?” 김동건은 걸음을 멈추고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비마마를 모함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미 사람을 시켜 난장터에 버렸으니, 지영아, 소월이는 없던 아이로 여기고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거라.” 소월이는 그저 그녀를 위해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반면 지아비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예진만 감싸고 있었다. 자신에게 거슬리는 옳은 말 한마디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그제야 박지영은 김동건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눈물만이 쉼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김동건은 박지영이 고통 때문에 우는 줄 알고 다급히 달랬다. “지영아, 조금만 참거라. 네 상처를 봐줄 의원도 불렀고, 네가 좋아하는 떡과 다과도 준비해 뒀다. 많이 힘들었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거라.” 박지영은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김동건을 떠나고 싶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 말하려던 순간, 호위무사들이 들이닥쳤다. “장군 나으리, 태자비마마께서 급히 궁으로 들라십니다.” 김동건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박지영을 마차에 태운 뒤, 서둘러 떠났다. 떠나기 전, 김동건은 한마디만 남겼다. “지영아, 먼저 돌아가 있거라.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 네 곁에 있어 주마. 상처가 좀 나으면 함께 봄나들이도 가자꾸나.” 박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박지영이 떠나는 날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더는 앞으로가 없을 것이다. 박지영은 멀어지는 김동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시스템을 불렀다. “시스템, 가진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 소월이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세요.”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숙주가 이 세계를 떠난 뒤, 소월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부터 현 세계 이탈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5, 4, 3, 2, 1.” 마지막 숫자가 울린 순간 온 세상의 시간이 잠시 멈추더니, 눈부신 빛이 마차를 감쌌다. 잠시 뒤 모든 것이 다시 움직였다. 마차는 덜커덩거리며 장군부를 향해 계속 달렸지만 마차 안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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