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이름의 주인

GoodNovel 완결

내 남편 정우진은 원양 화물선 선장이었고 1년 12개월 중 10개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나는 늘 정우진을 믿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습관 하나가 있었다. 정우진의 배가 항구에 들어와 보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을 불러 함께 술을 마셨다. 서지은의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서지은은 정반대였다. 서지은은 말도 많았고 술도 약했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부터 배에서 있었던 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들어갔을 때, 서지은이 불쑥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언니 남편은 진짜 로맨틱하더라고요. 지난달에 배가 마르세유에 들어갔을 때 현지 장인한테 일부러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맞췄대요. 목걸이에 팔찌, 귀걸이까지 한 세트로 다 하고 보급선 편에 따로 보내기까지 했다던데요? 저 진짜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내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 난 받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서지은도 눈치를 챘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부를 펼쳤다. 마르세유항 탁송 목록의 보석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 수령 주소는 우리 집 주소가 아니었다. 바다는 언제 거칠어질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제 나도 그 배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챕터 (1)

第1章

내 남편 정우진은 원양 화물선 선장이었고 1년 12개월 중 10개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나는 늘 정우진을 믿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습관 하나가 있었다. 정우진의 배가 항구에 들어와 보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을 불러 함께 술을 마셨다. 서지은의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서지은은 정반대였다. 서지은은 말도 많았고 술도 약했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부터 배에서 있었던 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들어갔을 때, 서지은이 불쑥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언니 남편은 진짜 로맨틱하더라고요. 지난달에 배가 마르세유에 들어갔을 때 현지 장인한테 일부러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맞췄대요. 목걸이에 팔찌, 귀걸이까지 한 세트로 다 하고 보급선 편에 따로 보내기까지 했다던데요? 저 진짜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내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 난 받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서지은도 눈치를 챘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부를 펼쳤다. 마르세유항 탁송 목록의 보석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 수령 주소는 우리 집 주소가 아니었다. 바다는 언제 거칠어질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제 나도 그 배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제1화 [수령 주소: 해온 아파트 17동 1203호. 비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령할 것. 가족에게 전달 금지.] 나는 마지막 한 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가족에게 전달 금지라니...’ 정우진과 결혼한 지 벌써 6년이었다. 정우진은 출항할 때마다 집 열쇠를 현관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며 말했다. “희서야, 가족들은 너한테 부탁할게.” 그 말을 믿고 나는 시부모님을 챙겼고 정우진 대신 정기 검사에 필요한 서류를 처리했으며 선원 가족 단체방에 공지를 돌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당연히 정우진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우진의 목록에서 ‘가족’이란, 저 다이아몬드 세트에 손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정우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방금 수에즈 지나왔어. 신호가 안 좋아.] 나도 짧게 답했다. [응.] 평소보다 답이 짧아 이상했던 모양인지, 2분쯤 지나 다시 문자가 왔다. [오늘은 왜 밥 먹었냐고 안 물어봐?] 나는 보고 있던 항차 장부를 덮고 답장을 보냈다. [밥은 먹었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먹었어.]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신호가 안 좋다더니 이런 답장은 참 빨랐다. 다음 날 오전, 나는 해온 아파트로 향했다. 해온 아파트는 해진시에서도 손꼽히게 비싼 오션뷰 아파트 단지로, 항구까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비원이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묻기에 휴대폰에 저장된 탁송 목록을 보여 줬다. “17동 1203호요. 물품 확인하러 왔어요.” 비고란을 확인한 경비원의 태도가 금세 공손해졌다. “잠시만요. 마침 1203호 차세린 씨가 집에 계시네요.” ‘차세린...’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정우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우진은 세 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더니, 네 번째에는 문자로 물었다. [어디야?] 나는 짧게 답했다. [장 보러 나왔어.] 곧바로 메시지가 돌아왔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 내가 없으면 네가 처리 못 하는 일도 많아.]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17동 1203호의 현관문도 동시에 열렸다. 문 앞에 선 여자는 실크 소재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바로 그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차세린은 나를 보자 무심한 얼굴로 손끝을 들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누구세요?” “한희서예요.” 순간 차세린의 미소가 멈췄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었다. “아, 사모님이셨네요.” ‘사모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차세린에게서는 미안함도, 당황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세린이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거실에는 뜯어 놓은 택배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현지에서 포장한 듯한 수제 포장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옆에는 귀걸이와 팔찌, 작은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정우진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파도는 바다를 아는 사람에게 어울려.] 정우진과 막 결혼했을 무렵, 정우진은 내게 항해용 시계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다. 시곗줄이 딱딱해 오래 차고 있으면 손목이 쓸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벗어 놓지 않았다. 그때 정우진은 웃으며 말했다. “선장 아내라면 배랑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있어야지.” 나는 그렇게 그 시계를 6년 동안 차고 다녔다. 그런 정우진이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파도를 선물하며 바다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세린이 물 한 잔을 따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모님, 물건 가지러 오신 거예요?” 나는 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우진이 산 제 물건이 여기로 잘못 온 것 같아서요.” 차세린이 웃었다. “사모님, 그건 저한테 물으실 게 아니라 정우진한테 물어보셔야죠. 물건이 누구 건지는 배송 주소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봤어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의 카드를 사진으로 찍었고 차세린은 곧바로 손을 뻗어 카메라 앞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좀 보기 안 좋네요.” 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차세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부남한테 다이아몬드 세트를 받는 건 보기 좋고요?” 그제야 차세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우진한테 들으셨죠? 저희는 사모님보다 훨씬 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6년이나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겠네요.” 제2화 차세린은 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잠시 굳어 있던 차세린은 천천히 목걸이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세요.” 내가 손도 대지 않자 차세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걸 가져간다고 뭐가 달라져요? 정우진이 바다에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저인데요.” 차세린의 말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혼자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감상에 빠져 떠드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 “물건은 일단 여기 두세요. 잃어버리지 말고요.” 차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에요?” “나중에 조사할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현관까지 갔을 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화면을 보니 정우진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희서 네가 해온 아파트에는 왜 갔어?” 나는 뒤를 돌아 차세린을 바라봤다. 차세린은 고개를 숙인 채 이미 다른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정우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세린이가 모르는 여자가 찾아와 시비를 건다고 하잖아. 듣자마자 너인 줄 알았지.”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 당신이 다이아몬드 세트까지 사 주는 여자라면 나도 알아 둬야지.”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정우진이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거래처 선물이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거래처?” “세린이가 해성해운 항만 홍보를 도와주고 있어. 협력업체 쪽 사람이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협력업체 사람이 당신이 ‘가족에게 전달 금지’라고 적어 둔 물건을 받고 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정우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희서야, 내가 배에 있는 동안까지 네 감정 문제를 처리하게 만들지 마.”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시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현관에 들어서면서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않았다. “네가 세린이를 찾아갔다며?” 나는 주방에서 죽을 끓이다가 시어머니를 돌아봤다. “우진 씨가 말했어요?” 시어머니는 가방을 소파 위에 내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진이가 그렇게까지 속을 태우는데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하니? 희서야, 너는 왜 갈수록 철이 없어져?” “제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다이아몬드 세트를 사 줬는데 제가 철이 없는 거예요?” 시어머니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우진이는 선장이야. 밖에서 사람 만날 일도 많고 접대도 많아.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관계도 있는 거야. 너처럼 맨날 집에만 있는 애가 밖에서 얼마나 힘든지 뭘 알겠니?” 나는 탁송 목록 복사본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피할 수 없는 관계가 이 정도예요?” 하지만 시어머니는 종이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제대로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고작 보석 한 세트잖아. 네가 그런 게 부족하니? 갖고 싶으면 우진이 돌아왔을 때 하나 사 달라고 하면 되잖아.” “제가 부족한 건 보석이 아니라, 남편이 저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시어머니가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우진이가 번 돈을 집에 안 가져다주니? 네가 사는 이 집도 우진이가 배 타면서 번 돈으로 마련한 거 아니야?” 나는 말없이 시어머니를 바라봤다. 이 집의 계약금은 아버지가 남겨 준 돈으로 치렀고 인테리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챙겼다. 정우진은 일 년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느라 우리 침실 커튼이 무슨 색인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사실은 하나도 모르는 시어머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신이 옳아서 내가 할 말을 잃은 줄 알았다. “내일 세린이한테 사과해. 이 일은 여기서 끝내고 괜히 우진이 수석 선장 승진에 지장 주지 마.” 나는 끓인 죽을 그릇에 담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과 안 해요.” 시어머니는 화가 나 손까지 떨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선장 아내로 사는 게 얼마나 번듯한데. 우진이 없으면 네가 뭐가 될 것 같아?” 나는 죽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시어머니를 바라봤다. “다시 제가 되겠죠.” 제3화 정우진이 입항한 건 닷새 뒤였다. 나는 항구로 마중 나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정우진이 돌아오기 사흘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침대 시트를 새것으로 갈고 냉장고에는 정우진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고 차 안에는 숙취해소제까지 미리 챙겨 뒀겠지만 이번에 나는 집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마르세유항 기록이 적힌 페이지를 컴퓨터에 스캔하고 있었다. 정우진은 아직 제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장부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희서, 지금 내 뒷조사를 하는 거야?” “왜? 조사받는 게 무서워?” 정우진은 모자를 소파 위로 내던졌다. “나 방금 배에서 내렸어. 오자마자 나랑 싸우자는 거야?” “난 싸운 적이 없어.” 정우진이 성큼 다가와 내 앞의 장부를 낚아챘다. “이거 어디서 났어?” “가족용 장부 사본이야. 원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 정우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나를 노려봤다. “앞으로 배와 관련된 서류는 건드리지 마.”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배에서 차린 돈으로 차세린한테 다이아몬드 세트 보낼 때는 배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 안 들었어?” 정우진은 곧바로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우진은 몇 분 뒤 말을 바꿨다. “그 다이아몬드 세트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어떤 건데?” “세린이가 예전에 나한테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요즘 몇 년 동안 힘들게 지내기도 했고. 그냥 선물 하나 해 준 것뿐이야.” 나는 정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세린한테는 다이아몬드를 사 주고... 나한테는 뭘 사 왔는데?” 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꼭 세린이랑 너를 비교해야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우진은 여행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너 주려고 사 왔어.” 봉투 안에는 냉장고 마그네틱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항구 기념품점에서 파는 흔한 물건이었고 뒷면에는 가격표조차 떼지 않은 채 붙어 있었다. [2유로.] 나는 냉장고 마그네틱을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그러자 정우진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또 마음에 안 들어?” “우진 씨는 내가 이걸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우진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희서야, 바다 위에서 일하는 게 정말 힘들어. 세린이는 해운 쪽도 알고 내가 어떤 압박을 받는지도 이해해. 그런데 넌 맨날 이런 사소한 일만 붙잡고 늘어지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정우진에게는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도 그저 사소한 일이었고 우리가 함께한 6년의 결혼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해온 아파트의 출입 등록 내역을 보여 줬다. “차세린이 거래처 사람이라며? 거래처 사람이 왜 당신 명의로 임시 출입 등록까지 된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정우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알려줬어?” “경비원.” 정우진이 내 휴대폰을 빼앗듯 가져갔다. 사진첩을 빠르게 넘겨 보던 정우진은 내가 이미 자료를 따로 백업해 둔 걸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혼하려고.” 정우진이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희서, 이혼 얘기로 날 겁주려 하지 마. 나랑 헤어지면 넌 어떻게 먹고살 건데?” 정우진은 비웃듯 말을 이었다. “몇 년째 사회생활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잖아. 혼자 먹고살 능력도 없으면서 나 없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바라봤다. “우진 씨는 내가 뭘 가졌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잖아.” 정우진은 휴대폰을 탁자 위에 던졌다. “네가 집에만 너무 오래 있어서 그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니까 생각도 그렇게 단순하지.” 그날 밤, 정우진은 알아서 손님방에 들어가서 잤다. 새벽 1시쯤, 벽 너머에서 낮게 깔린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통화 내용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걱정하지 마. 희서가 뭘 어쩌겠어? 며칠 저러다 말겠지.” 잠시 뒤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그 다이아몬드 세트는 그냥 하고 다녀. 돌려줄 필요 없어. 원래부터 널 주려고 산 거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우리 엄마가 알아서 희서를 다룰 거야. 걔가 진짜 나랑 이혼할 배짱은 없어.” 나는 복도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느낀 서운함과 상처는 정우진에게 고작 며칠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에 불과했다. 제4화 다음 날, 혜성 해운 그룹에서 정우진의 입항을 축하하는 작은 파티를 마련했다. 그리고 아침부터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꼭 와야 해. 네가 안 오면 사람들이 우진이를 어떻게 보겠니?” 그 말에 내가 되물었다. “차세린도 와요?” 그러자 시어머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린이는 협력업체 쪽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오지. 쓸데없이 속 좁게 굴지 마.” 결국 나는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결혼반지는 뺀 채 파티가 열리는 진항 호텔로 향했다. 룸에 들어서자 정우진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차세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차세린은 목걸이부터 귀걸이까지 그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전부 갖춰 착용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시어머니가 곧바로 손짓했다. “희서야, 빨리 와서 저기 앉아. 문 옆이면 음식 나르기도 편하잖니.” 정우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세린이 고개를 들며 옅게 웃었다. “사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오늘 촬영할 때 필요해서 착용한 것뿐이에요. 우진이가 당분간 저한테 맡겨 두라고 했거든요.” 그러자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장난스럽게 말을 보탰다. “정 선장님은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 물결 디자인이 차세린 씨한테 정말 잘 어울려요.” “역시 선장은 바다를 아는 사람이 알아주는 법이지.” “사모님도 질투하지 마세요. 차세린 씨야 우리 식구나 다름없잖아요.” 정우진이 술잔을 들었다. “그만들 해요. 괜한 소리 하지 마세요.” 말로는 말리면서도 정우진은 입가에 번진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그대로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직원이 내 앞에 차가운 해산물 요리를 내려놓았다. 나는 위가 좋지 않아 찬 해산물을 먹지 못했고 예전의 정우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우진은 지금 차세린의 접시에 따뜻한 음식을 직접 덜어 주고 있었다. 잠시 뒤 차세린이 술잔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모님, 한잔 받으세요. 우진이가 늘 그러더라고요. 집에서 부모님 모시느라 사모님이 고생이 많다고요. 저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차세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또 무슨 말을 했는데요?” 차세린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사모님은 뭐든 빠짐없이 잘 챙기는데 딱 하나 우진 마음속의 바다만은 이해하지 못한다고요.” 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곧바로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원양선 타는 사람들의 가족이야 다 그렇죠.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서로 이해하고 살아야죠.” 옆에 있던 시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냥 마셔.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굴지 말고.” 정우진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서야, 할 말 있으면 나중에 둘이서 해. 사람들 앞에서 체면 구기지 말고.” 나는 술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고 그대로 기울여 옆에 놓인 화분에 부었다. 그 순간 차세린의 표정이 굳었고 시어머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한희서!” 정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이 들어왔다. 얼굴이 붉어진 걸 보니 술을 꽤 마신 듯했고 손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언니, 한참이나 찾았어요.” 서지은은 내 손에 종이를 쥐여 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마르세유에서 실어 온 게 다이아몬드 세트뿐만이 아니었어요. 수령 승인서도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언니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언니는 이런 거에 서명한 적 없잖아요.” 순간 정우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종이를 펼쳤다. 맨 아래 서명란에는 분명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희서.] 하지만 그건 내가 쓴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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