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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임신 5개월에 접어들 때까지 송경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첫사랑을 만나러 다니느라 넉 달째 산부인과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지만, 송경태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쩌라고? 네 뱃속에 있는 애, 나 혼자 만든 줄 알아? 엄마인 네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그렇게 힘들어? 산부인과 한 번 같이 못 갔다고 애가 잘못되기라도 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원 대기실에 걸린 TV를 바라봤다. 마침 화면에서는 재계 인사들의 자선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 속 윤라희를 바라보는 송경태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알았어...” 평소와 다른 내 반응을 눈치챈 송경태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내 순번이 되었다. 송경태가 첫사랑을 위해 거액을 들여 불꽃 이벤트를 열어 줬다는 뉴스를 보고 수군거리던 간호사들 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임소이 님, 산전 검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검진 예약은 취소해 주세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일주일 뒤로 임신중절 수술 예약해 주세요.”
챕터 (1)
第1章
임신 5개월에 접어들 때까지 송경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첫사랑을 만나러 다니느라 넉 달째 산부인과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지만, 송경태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쩌라고? 네 뱃속에 있는 애, 나 혼자 만든 줄 알아? 엄마인 네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그렇게 힘들어? 산부인과 한 번 같이 못 갔다고 애가 잘못되기라도 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원 대기실에 걸린 TV를 바라봤다. 마침 화면에서는 재계 인사들의 자선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 속 윤라희를 바라보는 송경태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알았어...”
평소와 다른 내 반응을 눈치챈 송경태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내 순번이 되었다.
송경태가 첫사랑을 위해 거액을 들여 불꽃 이벤트를 열어 줬다는 뉴스를 보고 수군거리던 간호사들 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임소이 님, 산전 검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검진 예약은 취소해 주세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일주일 뒤로 임신중절 수술 예약해 주세요.”
제1화
송경태가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길가에 앉아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화가 한복판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는 송경태와 윤라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그때 송경태가 싸늘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로막더니 내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 밤중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산전 검진 한 번 같이 못 가 준 게 그렇게 난리 칠 일이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나는 순간 멍해졌다.
송경태와 결혼한 지난 2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늘 같았다.
“억지 좀 부리지 마.”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송경태는 괜히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다.
부부 동반 행사 같은 공식 석상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산전 검진에 한 번만 같이 가 달라는 부탁조차 송경태에게는 괜한 억지에 불과했다.
예전의 임소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어느새 제법 불러온 배를 내려다봤다. 송경태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아내 노릇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내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사진 찍으러 가자.”
송경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임신한 뒤 내가 송경태에게 부탁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산전 검진에 함께 가는 것과 임신 기념사진을 같이 찍는 것.
하지만 송경태는 그중 어느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송경태는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근처 스튜디오로 가자고 했다.
“거참... 요즘 자꾸 깜빡하네. 네가 좀 이해해 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송경태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윤라희의 생일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식, 디저트까지 전부 기억했다.
심지어 윤라희가 작품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그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이 수십 개를 넘어 백여 개에 달하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송경태는 유독 나와 관련된 일들만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든 순간, 내 몸이 그대로 굳었다.
윤라희의 개인 스튜디오였다.
그 여자가 청해시로 돌아온 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송경태가 그 여자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해 줬다는 사실을.
스튜디오 이름은 ‘스튜디오 3650’이었다.
송경태와 윤라희가 사랑했던 10년, 꼬박 3,650일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연인으로 지내왔지만, 윤라희가 꿈을 좇아 유럽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 윤라희의 선택에 화가 난 송경태는 홧김에 나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 흐른 뒤, 윤라희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날 비를 흠뻑 맞은 채 사과하는 윤라희를 마주한 순간, 송경태의 오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 송경태는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라희와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 나는 멀쩡한 아내에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불청객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억지로 이어 온 결혼 생활에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차 문고리를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송경태가 내 손목을 잡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송경태를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윤라희가 곧장 다가왔다.
늘씬한 몸매에 생머리를 느슨하게 틀어 올린 모습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우아했다.
임신으로 얼굴이 핼쑥해지고 손발까지 퉁퉁 부은 나와 나란히 서자, 윤라희의 모습은 확연히 대비됐다.
스튜디오 직원은 송경태를 이미 여러 번 본 사람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형부, 또 라희 언니 보러 오셨어요?”
송경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곧바로 내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돌렸다.
윤라희도 당황한 듯 혀를 차며 직원을 나무랐다.
“무슨 소리야. 경태 부인이잖아.”
그러고는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소이 씨, 신경 쓰지 마세요. 제 밑에서 일하는 동생인데 생각 없이 말할 때가 있어요.”
윤라희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고 촬영용 의상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라희는 몇 번이나 곁눈질로 내 표정을 살피다가 내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 보이자 비웃듯 입꼬리를 실룩댔다.
내 시선은 눈앞에 걸린 드레스 한 벌에 머물렀다.
은은한 아이보리색이 감도는 긴 드레스였다. 단정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드레스를 꺼내 입어 보려던 순간, 송경태가 손을 뻗어 막았다.
“다른 걸로 골라.”
예상 밖으로 단호한 반응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묻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송경태와 윤라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제2화
사진 속 윤라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내가 고른 것과 똑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드레스를 내려놓고 다른 디자인을 골랐다.
드레스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스튜디오 직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같은 옷을 입는다고 다 똑같이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요. 본인도 알아챘나 봐요. 바로 다른 옷으로 바꾸는 것 좀 봐요.”
윤라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대놓고 나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유치한 도발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촬영용 의자에 앉자, 송경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기 직전이었다.
“어머, 경태야...”
윤라희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 여기가 너무 아파.”
송경태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윤라희에게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스튜디오 직원이 안 됐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계속 찍어 주세요.”
직원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나는 완성된 사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스튜디오를 나왔다.
어차피 나와 아이를 위해 남기는 추억이었다.
그 사진에 송경태가 있든 없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매서웠다. 이대로 집까지 돌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다.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송경태에게 걸려 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수신을 거부했다.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세 번이나 이어지던 전화는 그제야 잠잠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다시 휴대전화 알림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무심코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윤라희가 송경태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윤라희가 입고 있는 옷이 낯익었다.
내 잠옷이었다.
사진은 5초도 지나지 않아 삭제됐다.
곧이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로 잘못 보냈네요.]
실수일 리 없었다. 나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보낸 사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휴대전화를 꺼 버리고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 안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있던 송경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송경태와 눈이 마주쳤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이고, 난 또 영원히 안 들어올 줄 알았네?”
“어제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근처 호텔에서 잤어.”
나는 송경태가 또 화를 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위치 확인해 봤거든. 그래도 앞으로 외박할 때는 반드시 나한테 허락받아야 해.”
외투를 벗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봤다.
“내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을 해 놨어?”
“혹시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런 거야.”
송경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화를 끝내고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전부 송경태의 친구들이었다.
결혼식 날 얼굴을 본 뒤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송경태의 아내인 나보다 윤라희와 훨씬 가까워 보였다.
윤라희는 마치 제 집에 손님을 초대한 사람처럼 앞으로 나서서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안준호. 요리를 진짜 잘해요. 특히 국물 요리는 끝내줘요.”
그러고는 다음 사람을 가리켰다.
“여기는 이도윤. 도윤이는 유명한 아티스트예요.”
마지막 남자를 소개할 때는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얘는 류시우. 얼굴은 좀 봐줄 만한데 항상 장난이 너무 심해서 문제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실에 웃음이 터졌다.
안준호가 서운한 척 윤라희를 타박했다.
“야, 윤라희. 내 얼굴을 어때서? 왜 은근슬쩍 사심을 끼워 넣어?”
윤라희는 볼을 부풀리며 곧장 친구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친구들도 익숙하다는 듯 장난을 받아 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누구도 내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들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 생각도 없었으니까.
송경태는 그런 윤라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쓰레기통 안에 버려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걸음을 멈췄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음식물쓰레기 사이에 김치가 뒤엉켜 있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마지막으로 담가 준 김치였다.
얼마 전, 엄마는 너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 김치는 엄마가 남긴 마지막 음식이나 다름없었다.
먹고 싶어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일주일 내내 냉장고에 넣어 두고 바라보기만 했던 김치가 음식물쓰레기와 뒤섞여 있었다.
귓가에서 이명이 울렸다. 손끝이 떨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 선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거 누가 버렸어?”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거실에는 여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다시 물었다.
“누가 버렸어?”
그래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자,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이 김치 누가 버렸냐고!”
제3화
순간 거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고,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송경태가 내 어깨를 짓누르듯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라희가 버렸어. 오래 두면 김치도 상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나를 생각해서라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봤다.
“당신도 알잖아. 이건 엄마가 남긴 마지막 음식이야. 내가 먹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윤라희 씨한테 먹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대체 누구 건강을 생각해서 버렸다는 거야? 왜 남의 물건에 마음대로 손대?”
생각해 보면 송경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나를 꾸짖고 가르치려 들면서도 정작 아내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존중조차 해 주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송경태는 당황한 듯 잠시 굳어 있다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 손을 쳐 냈다.
“소이 씨!”
갑자기 윤라희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윤라희는 송경태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앞을 가로막더니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김치는 내가 버렸어요. 화가 나면 나한테 화내요. 왜 경태한테 그래요?”
안준호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고작 김치 한 통 가지고 이럴 일이에요? 소이 씨가 이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불편해지잖아요.”
류시우는 아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희는 생물학 전공자예요. 그러니 소이 씨보다 훨씬 잘 알겠죠. 소이 씨를 생각해서 버려 줬더니, 고마운 줄을 모르네.”
누구 하나 내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윤라희의 편을 들었고, 오히려 나를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 사람처럼 몰아갔다.
게다가 사람들은 동정 섞인 눈빛으로 송경태를 바라봤다. 마치 어쩌다 저런 여자와 결혼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송경태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이제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버린 엄마의 마지막 김치를 다시 담아 ‘살려’ 내는 것.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김치를 하나씩 건져 내기 시작했다.
송경태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임신한 사람이 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어!”
그때 윤라희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윤라희도 곧장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쓰레기통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같이 꺼내 드릴게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쓰레기통 안으로 손을 뻗은 윤라희는 내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아...”
갑작스러운 통증에 몸이 움찔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윤라희를 밀어냈다.
윤라희는 힘없이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윤라희에게 달려갔다.
윤라희를 감싸듯 앞을 막아선 뒤, 하나같이 나를 적대적으로 노려봤다.
송경태가 떨리는 목소리로 버럭 화를 냈다.
“임소이! 너 지금 제정신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쓰레기통에 버려진 김치를 하나라도 더 건져 내는 데만 집중했다.
송경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곧이어 송경태가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윤라희가 당한 만큼 반드시 받아 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임소이, 당장 사과해.”
나는 송경태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송경태가 앞뒤 사정을 무시하고 윤라희 편을 든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내가 너무 무르고 순진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웬만한 일은 참고 넘겼다.
하지만 이제 내 곁에는 나를 걱정해 줄 가족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없었다.
“우리 이혼하자.”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송경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결혼한 지 2년. 그동안 수도 없이 다투고 서로 언성을 높인 적도 많았지만, 내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송경태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라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소이 씨, 같은 여자로서 하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경태 마음 떠보지 마세요. 배가 벌써 이렇게나 불렀는데, 정말 이혼할 수 있겠어요?”
윤라희가 내 배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이까지 지울 것도 아니면서...”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송경태는 누군가 자신을 협박하거나 조건을 내세워 뜻대로 움직이려 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송경태는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실망이 가득 밴 목소리로 말했다.
“임소이,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뒀지? 집에 틀어박혀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똑똑히 반성해.”
그 말을 끝으로 송경태는 윤라희의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나머지 사람들도 곧바로 뒤따라 나갔다.
순식간에 소란스럽던 집 안에는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건져 낸 김치를 깨끗한 용기에 옮겨 담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병원에서 온 문자였다.
[임소이 님, 예약하신 수술 일정 안내해 드립니다.]
수술까지 닷새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방으로 들어가 신분증과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겨 두고 조용히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친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소이야, 빨리 뉴스 봐.”
전화를 끊고 곧바로 포털을 열었더니, 메인 화면 가장 위에 송경태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 속에서 송경태와 윤라희는 손을 맞잡은 채 해변을 걷고 있었다.
윤라희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사진을 확대한 뒤, 내 시선은 윤라희의 허리춤에 멈췄다. 드러난 맨살 위에는 송경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론은 송경태가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빼지 않았던 결혼반지까지 빼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송경태와 내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부터 서로 사랑해 온 송경태와 윤라희가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나 서로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 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던 팬들마저 각성한 듯 내 개인 계정으로 몰려들었다.
제4화
[네가 끼어들어서 헤어진 거라며? 그렇게 남의 남자를 뺏고 싶었냐? 불륜녀 주제에 뻔뻔하기는.]
[임신했다면서요? 그냥 빨리 애 지워요. 괜히 낳아서 라희 작가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남자를 붙잡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요? 불쌍한 두 사람 그만 괴롭히고 이제 좀 놔주세요.]
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관련 기사는 사흘 내내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송경태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송경태는 내가 먼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관계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송경태에게 있었다.
내가 입는 옷부터 먹는 음식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 기능까지 설치해 내 동선마저 감시하고 있었다.
송경태가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윤라희였다.
내게 남은 것은 일방적인 통제와 차가운 무관심뿐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내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송경태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만, 송경태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리고 예전처럼 내가 먼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날개가 꺾인 새처럼 다시 송경태의 품으로 기어들어 가 얌전히 갇혀 있기를 바랐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흘째 되던 날, 송경태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송경태는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은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밖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머리카락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졌다.
송경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가라앉은 눈빛에는 서운함과 상처받은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송경태는 서둘러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나서야 나를 품에 안았다.
머리 위에서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전 검진 다시 예약했어. 이번에는 꼭 같이 갈게.”
송경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 허락 없이 장모님 김치를 버린 건 우리가 잘못한 게 맞더라. 라희가 버리려고 했을 때 내가 막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나를 끌어안은 송경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기사는 오해야. 회사 법무팀에서 처리하고 있으니까 이제 너한테 악플 다는 사람도 없을 거야.”
송경태는 말을 마친 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처럼 이쯤에서 화를 풀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 송경태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상처를 줄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면서, 내가 정말 떠날 것처럼 굴면 뒤늦게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윤라희가 존재하는 한, 송경태에게 버림받을 사람은 언제나 나라는 것을.
그 지긋지긋한 삼각관계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송경태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실로 들어갔다.
송경태가 뒤따라 들어오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익숙한 벨 소리였다. 윤라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때만 울리는 특별한 벨 소리였으니까.
송경태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화면만 바라봤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을 주면서도 끝내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샤워를 마친 송경태는 침대에 누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랑 라희는 이제 정말 끝났어.”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한 오해 하지 마.”
나는 허리를 감싼 송경태의 손을 내려다봤다.
며칠 전 사라졌던 결혼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다시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내가 임신중절 수술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송경태가 예약한 산전 검진 역시 같은 날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송경태와 함께 병원에 가는 날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던 송경태가 그날만큼은 처음 아빠가 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미리 챙겨 둔 물건들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 뒤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그런 송경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늘 병원에 가면 아이를 지울 생각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송경태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송경태는 별생각 없이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휴대전화마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밝게 켜진 화면에는 피투성이가 된 손목 사진이 확대되어 있었다.
송경태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주워 들더니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잠깐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경태가 다급하게 뒤돌아봤다. 얼굴에는 제발 한 번만 봐 달라는 듯한 간절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번 한 번만. 정말 마지막이야. 라희가 죽으려고 해. 이런 걸 보고 어떻게 모른 척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리고 송경태가 들고 있던 내 신분증을 가져왔다.
“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신분증 돌려 달라고 부른 것뿐이야.”
송경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송경태는 곧바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몇 걸음이나 갔을까.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보였던 반응이 뒤늦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송경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얼굴로 다시 달려와 나를 품에 세게 끌어안았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송경태가 나를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갈게. 꼭 갈 테니까 병원에서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송경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고 송경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찾은 사립 병원은 오랫동안 송경태 명의의 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온 곳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송경태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임신한 지 5개월이 되도록 송경태가 단 한 번도 산전 검진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 결정을 들은 병원장은 직접 나서서 수술 전 검사부터 수술 일정까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 줬다.
수술대에 누워 수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정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취제가 천천히 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온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뜨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윽고 눈앞이 완전히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