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임신 9개월 차,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가 같잖은 핑계를 대며 우리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나를 볼 때마다 여자는 서글픈 일이 떠오른 듯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남편은 내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배를 내밀고 다닌다고 굳게 믿었다.
“시윤이는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그런데 왜 매일 시윤이 앞에서 배를 내밀고 다니면서 시윤이를 자극하는 거야?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못하게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남편은 사람을 시켜 나를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다락방에 가두고, 누구도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했다.
나는 몸부림치면서 애원했다. 초음파 검사 결과 뱃속의 쌍둥이가 너무 크게 자라 의사 선생님이 오늘 바로 입원해 출산 준비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그러나 남편은 마치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듯이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출산 예정일까지 3일이나 남았잖아. 그런데 어디서 불쌍한 척을 하고 있어? 다락방에서 얌전히 반성이나 해. 그러게 왜 시윤이를 괴롭혀? 이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진통이 시작된 뒤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문을 긁어댔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의 처절한 비명은 오랫동안 다락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끝내 나는 피바다 위에 쓰러졌다.
3일 뒤, 남편은 입맛에 맞지 않는 죽을 먹으면서 말했다.
“강진솔한테 나를 위해 죽을 끓이라고 하고, 시윤이한테 사과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전해. 충분히 반성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한다면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줄 거라고 해.”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다락방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두 번째 계단까지 적신 상태였다.
제1화
“강진솔 이 질투 많은 여자가 왜 소리를 지르지 않는 거지?”
“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잘못된 건 아닐까요? 어젯밤에 정말 목이 찢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비명을 지르셨거든요. 아주 힘드신 것 같던데...”
배찬규는 죽을 한술 뜨며 대수롭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나보다 강진솔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강진솔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번 기회에 단단히 혼쭐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앞으로 두 번 다시 시윤이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집사는 다락방을 힐끗 바라본 뒤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쌍둥이를 가지셨잖아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가능한 한 빨리 입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배찬규는 죽을 먹다가 멈칫했다. 집사의 말에 조금 흔들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배찬규는 숟가락으로 죽을 한동안 휘저었다. 잠시 눈빛에 망설임이 스쳤다.
“좋아. 그러면 강진솔한테 죽을 끓이라고 하고, 그다음 시윤이에게 사과하라고 해. 오늘은 출산 예정일이니까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병원에 보내줄 거야.”
배찬규는 우유 한 잔을 데운 뒤 그것을 들고 객실로 들어갔다.
박시윤은 침대에 누운 채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자고 있었다. 이불이 어깨 아래로 살짝 흘러내려 가슴께의 은밀한 곡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배찬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한참 동안 박시윤을 바라보다가 겨우 시선을 거두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박시윤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러고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덜댔다.
“찬규 오빠, 또 나를 괴롭히러 왔어?”
배찬규는 다리를 벌리며 박시윤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히더니 은근한 손길로 박시윤의 허리를 주물렀다.
“네가 이런 모습으로 자고 있는데 누가 참을 수 있겠어?”
박시윤은 배찬규의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몇 번 냈다.
“하지만 진솔 언니는 오빠 아이를 힘들게 품고 있잖아. 나도 언니와 같은 여자니까, 언니가 가장 힘든 순간에 오빠가 언니를 배신하게 할 수는 없어.”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솔 언니 어젯밤에 진짜 크게 소리를 지르던데 혹시 곧 아이를 낳으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휴... 진솔 언니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나는 언니가 부러워. 오빠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출산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행복한 일일 거야.”
‘행복한 일?’
이 순간 나는 이미 귀신이 되어 그들의 곁을 떠돌고 있었다.
다락방의 바닥은 온통 내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못한 나는 손톱으로 벽을 긁었고, 그 과정에서 부러진 손톱 조각과 살점들이 벽면 곳곳에 처참한 흔적을 남겼다.
제2화
나는 아이를 낳기 위해 내 손으로 직접 밑을 찢고 헤집었다.
간신히 첫 번째 아이를 꺼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상처 때문에 하체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졌고 두 번째 아이는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상처 사이에 걸려 버렸다.
끈적거리는 피가 내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눈을 뜬 상태로 숨을 거뒀다.
배찬규가 그 모습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지금 배찬규는 박시윤을 안고 있느라 여념이 없었다.
배찬규는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자책하듯 말했다.
“내 탓이야. 임신한 강진솔이 네 앞에서 얼쩡거리게 하지 말아야 했는데. 괜히 네 마음만 상하게 했네. 맹세할게. 강진솔이 내 아이를 갖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 절대 그 어떤 임산부도 이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할게.”
“너는 모르겠지만 강진솔은 내 마음이 약해지길 바라서 거짓말까지 했어. 글쎄 뭐라는지 알아? 태아가 너무 커서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권유했다는 거야.”
“야외에서 사흘 동안 굶고도 살아남은 애가 아이를 낳는 걸 무서워한다니, 말이 되냐고!”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통증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임산부의 몸 상태는 일반인들과 달랐다. 게다가 나는 쌍둥이를 가졌을 때부터 임신 증상 때문에 다양한 불편함에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그리고 나는 임신하면서 몸이 굉장히 약해져 몇 번이나 유산 위험으로 병원에 입원했었다.
막 다락방에 갇혔을 때 나는 제발 나를 내보내달라고 온갖 말로 배찬규에게 애원했다.
정말 사흘 동안 다락방에 갇히게 된다면 아이도, 나도 모두 죽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찬규는 내 앞에서 큰 목소리로 집사에게 지시했다.
“열쇠는 더러운 강에 던져 버려. 아무도 나 몰래 문을 열어줘서는 안 돼. 사흘 뒤 나는 강진솔이 시윤이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거야!”
살아남기 위해 나는 벽에 걸린 그림을 뜯어냈고, 그 그림으로 창문의 잠금장치를 부쉈다. 그 과정에서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손톱이 들리거나 부러졌다.
나는 뼈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견디며 온 힘을 다해 창가로 기어갔다. 그리고 창밖의 빗물받이 위에 올라가 기와를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조금씩 걸음을 옮겨 다른 방으로 뛰어들어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다락방 아래 정원에서 배찬규가 박시윤을 힘주어 끌어안은 채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리낌없이 서로를 탐했고, 곧 다음 단계까지 밟을 듯했다.
그런데 박시윤이 갑자기 배찬규를 밀쳐 내고 고개를 들어 다락방 쪽을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든 배찬규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매우 분노했다.
배찬규는 내가 또 일부러 박시윤의 앞에 나타난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크레인을 가져오게 한 뒤, 직접 조종해서 그랩 버킷으로 내 배를 밀어붙여 나를 다락방 안쪽으로 들이받았다.
복부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다리 아래로 피가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결국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배찬규는 가져온 우유를 박시윤의 입가에 가져다 대서 직접 먹여 주었다.
“사람을 보내서 강진솔을 데려오라고 했어. 이따가 강진솔은 네게 사과할 거야.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사람을 시켜 병원으로 보내주고, 성의가 없다면 다락방에서 출산하게 할 거야.”
박시윤은 우유를 조금씩 받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아주 가련하게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찬규 오빠, 진솔 언니한테 그러면 안 돼. 여자에게 아이를 낳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배찬규는 한숨을 쉬더니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품속에 안긴 박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러니까 강진솔 같은 애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강진솔은 야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전문가야.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 곳에서 사흘 동안 버틴 애야. 너랑은 달라. 너는 몸이 너무 약해서 우유를 마실 때도 사레가 들리잖아.”
배찬규는 박시윤의 코끝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게 위험하다고? 꼭 아이를 낳아 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
박시윤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박시윤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직 오빠만이... 강한 겉모습 아래 숨겨진 내 연약한 마음을 알아봐 주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박시윤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입술은 깨문 탓에 번들거렸다.
박시윤은 배찬규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일부러 가슴을 내밀어 은근히 배찬규의 가슴에 밀착했다.
제3화
배찬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박시윤의 입술을 덮쳤고, 박시윤은 낮게 신음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입을 맞추었고 이내 서로의 몸을 거리낌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에 박시윤이 갑자기 숨을 헐떡이던 배찬규를 밀어냈다.
“안 돼. 지금 오빠는 유부남이잖아. 게다가 진솔 언니는 오빠 아이를 가졌어. 나는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녀가 되고 싶지 않아!”
배찬규의 눈에서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배찬규는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나는 네 마음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순수한 너를 가지려면 나 또한 모든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맞아. 그래야 너를 가질 자격이 생기겠지.”
말을 마친 뒤 배찬규는 아쉬운 듯 박시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소중히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시윤의 눈빛에 잠깐이지만 의기양양함이 스쳤다.
배찬규는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녀가 되고 싶지 않다고?
우스웠고 또 가소로울 뿐이다.
박시윤은 예전에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내가 임신했더라도 결국 배찬규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심지어 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 아이는 앞으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를 거라고 뻔뻔하게 떠들어 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박시윤이 해온 짓들은 뭐란 말인가?
박시윤은 아픈데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같잖은 핑계로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았다.
박시윤이 식탁 앞에서 대놓고 배찬규와 애정행각을 벌였을 때는 보다 못한 가정부가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했었다.
그러자 박시윤은 곧바로 배찬규에게 가정부가 식자재를 깨끗이 씻지 않아 장염에 걸렸다면서 당장 그녀를 해고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때 나는 임신한 상태라 입맛이 없었는데 오직 그 가정부가 해준 음식만 입에 맞았다.
그래도 박시윤은 손님이라는 생각에 나는 예의를 차리며 박시윤에게 다른 요리사를 불러 따로 음식을 준비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박시윤은 내 뺨을 때리며 말했다.
“음식을 잘 만드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진짜 안주인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지. 강진솔, 똑똑히 들어. 배찬규의 아내는 오직 한 명뿐이야. 그리고 그건 바로 나 박시윤이야!”
자신이 배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이 박시윤은 아기 고양이처럼 배찬규의 품에 안겨서 훌쩍댔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이 없어 평생 배찬규의 아이를 가질 수가 없다고 울며 하소연했다.
그리고 내가 매일 배를 내밀고 다녀서 나를 볼 때마다 속상하고 괴롭다고 했다.
“나도 최대한 언니를 피해 다니려고 했는데 그래도 매일 언니랑 마주치게 돼. 차라리 그냥 내가 이 집에서 나가서 따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매일 이런 고통 속에서 사는 건 너무 힘들어!”
배찬규는 순간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다. 음산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든 배찬규는 내 뺨을 세게 후려쳤고, 그 탓에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시윤이가 임산부를 보면 힘들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하루 종일 배를 내밀고 시윤이 앞에서 어슬렁거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가 있어? 너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 오늘 너를 다락방에 가둘 거야. 어디 한 번 실컷 고생해 봐!”
경호원 몇 명이 내 팔다리를 붙잡더니 먼지가 잔뜩 쌓인 다락방 안으로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안에 내던졌다.
“의사 선생님이 오늘 바로 병원에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어. 내가 병원에 가도 시윤이는 나를 볼 수 없잖아. 그러니까 병원에 보내줘!”
나는 문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러나 배찬규는 차갑게 비웃었다.
“거짓말도 머리를 써가면서 해. 출산 예정일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잖아!”
배찬규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고 힘껏 문을 닫아 버렸다.
그 순간 손가락이 문에 세게 끼었고,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나는 몸을 웅크리며 황급히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배찬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힐끗 보더니 다락방 문을 잠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몸을 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집사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와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께서... 사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죽었다고?”
배찬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리며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하듯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집사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락방이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사모님께서...”
집사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배찬규는 흐트러진 셔츠를 대충 정리하며 말했다.
“피? 아, 아이가 나오려는 모양이네. 그럼 병원으로 보내.”
제4화
집사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모님께서... 숨을 쉬지 않으세요...”
배찬규의 목소리에서 잠시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내가 귀를 기울여 좀 더 자세히 들어보려는데, 그 순간 배찬규의 목소리가 다시 사납게 변했다.
“또 연기하네! 계속 연기해 보라고 해!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예전에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고, 물속에서 십 분 넘게 숨을 참고 버틸 수 있었던 여자야. 걔는 의학 상식이 없는 너희를 겁주려고 일부러 숨을 참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 주치의를 불러와. 내가 직접 그게 전부 연기라는 걸 까발려주겠어!”
집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표님, 사모님 아이도 이미...”
“너한테 월급을 주는 사람이 누군지 잊은 거야?”
“네... 그러면 지금 바로 주치의를 모셔 오겠습니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떴다.
박시윤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힘없이 배찬규에게 몸을 기댔다.
“오빠, 화내지 마. 화내면 몸에 안 좋아.”
“강진솔은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 도가 텄어. 고작 몇 년 됐다고 다들 강진솔이 이 집 주인인 줄 아네!”
배찬규의 말을 들은 나는 따귀라도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3년이 흘렀을 뿐인데 배찬규는 예전에 나와 했던 약속을 전부 잊었다.
신혼 첫날, 배찬규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었다.
“여기가 네 집이야. 앞으로 이 집의 유일한 안주인은 너야.”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배찬규가 내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이라도 후회하거나 자책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정말 헛된 기대였다. 이제는 어리석었던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영원히 나만 사랑하겠다던 배찬규의 말을 정말 믿어버리다니.
배찬규와 박시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고 집안끼리 정략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시윤은 검사를 받았다가 뜻밖에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어 자연 임신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배찬규와 모든 연락을 끊었다.
박시윤은 배찬규가 배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데 자신과 결혼해 가문의 대를 끊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별 후의 고통을 잊기 위해 배찬규는 야외 탐험대에 가입했다.
그리고 마침 내가 그 탐험대를 이끄는 대장이었다.
훗날 배찬규는 내게 청혼하면서, 용감하고 강인한 내 모습이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내 존재 자체가 길을 잃은 자신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신앙과도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처음 본 순간, 내가 평생 자신의 안식처가 되어 줄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고 고백했다.
결혼 후 배찬규는 야외 탐험은 너무 위험한 것 같다면서 나더러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임신 준비를 해서 배씨 가문의 후계자를 낳아달라고 했다.
사실 배찬규는 박시윤과 헤어진 뒤로 매일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 탓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는 어서 아이를 가지라는 배씨 가문 어른들의 압박 속에서 한편으로는 배찬규의 건강을 돌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를 했다.
마침내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 나는 쌍둥이를 임신했다.
배찬규의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기자회견까지 열어 내가 낳은 아이가 비우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라고 발표했다.
바로 그때 박시윤이 귀국했다.
그리고 박시윤은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비우 그룹 후계자가 누가 되든지 관심 없어. 오빠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배찬규는 그날부터 외박하는 일이 잦아졌고, 흰 셔츠에는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빨간색 립스틱을 묻힌 채 돌아왔다.
나는 단호하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배찬규는 내 뱃속의 아이가 비우 그룹의 후계자가 될 아이들이라며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박시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 임산부를 보면 괴로워한다는 이유로, 출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나를 오랫동안 방치된 다락방 안에 가둬두었다.
배찬규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했다. 배찬규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고진후는 평소 배찬규의 건강 관리를 전담하고 있었다.
배찬규는 팔짱을 낀 채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고진후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강진솔,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