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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아내의 조용한 심판
혼인신고를 하러 가기로 한 바로 그날,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강시후의 전 여자친구는 구불구불한 산길 벼랑 끝에서 내 차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열두 번이나 거칠게 내 차를 들이받았다. 강시후가 경찰차를 뒤따라 도착했을 때, 소방대원들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운전석을 뜯어내 나를 간신히 꺼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긁힌 자국조차 찾기 힘든 한정판 스포츠카로 걸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서해원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대표님, 심유나 씨 이마에서 피가 납니다. 당장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꿰매야 해요.” 강시후는 나를 실은 들 것을 향해 걸어오다 멈춰 서서, 피투성이가 된 내 이마와 멍든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벼운 상처일 뿐이야. 해원이는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상태가 더 위급해. 해원이를 먼저 병원으로 보내야 해.” 버려진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의 바짓단을 죽어라 움켜쥐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해원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발작이 온 거라고. 넌 변호사면서 불가항력이라는 말도 몰라? 유치하게 왜 이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비서에게서 합의서 한 장을 건네받더니, 힘없이 축 늘어진 내 손목을 잡아채 그 위에 강제로 지문을 찍었다. “뒤에 다른 구급차가 올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챕터 (1)
第1章
혼인신고를 하러 가기로 한 바로 그날,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강시후의 전 여자친구는 구불구불한 산길 벼랑 끝에서 내 차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열두 번이나 거칠게 내 차를 들이받았다.
강시후가 경찰차를 뒤따라 도착했을 때, 소방대원들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운전석을 뜯어내 나를 간신히 꺼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긁힌 자국조차 찾기 힘든 한정판 스포츠카로 걸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서해원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대표님, 심유나 씨 이마에서 피가 납니다. 당장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꿰매야 해요.”
강시후는 나를 실은 들 것을 향해 걸어오다 멈춰 서서, 피투성이가 된 내 이마와 멍든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벼운 상처일 뿐이야. 해원이는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상태가 더 위급해. 해원이를 먼저 병원으로 보내야 해.”
버려진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의 바짓단을 죽어라 움켜쥐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해원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발작이 온 거라고. 넌 변호사면서 불가항력이라는 말도 몰라? 유치하게 왜 이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비서에게서 합의서 한 장을 건네받더니, 힘없이 축 늘어진 내 손목을 잡아채 그 위에 강제로 지문을 찍었다.
“뒤에 다른 구급차가 올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제1화
어릴 적부터 난 집안에서 늘 찬밥 신세였다.
다쳐도 참았고 아파도 꾹 참았다.
푹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내 육신은 이미 폐차가 된 자동차 곁에 누워 있었고 비서 허은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티슈를 꺼내 내 이마의 상처를 틀어막으며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그녀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나를 애타게 불렀다.
“변호사님, 정신 차려요... 조금만 더 버텨요, 잠들지 말고.”
나는 허은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뻗은 순간, 내 손가락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대로 통과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 파리하게 질려 숨이 끊어진 내 몸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난 죽었구나.’
허은채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깊은 죄책감이 일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으로 버텨내던 아이였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곱게 자랐을 텐데, 참혹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도 모자라 내 시체와 단둘이 남게 되었으니.
그녀는 두려움에 손끝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차에 무려 열두 번이나 치였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러나 강시후의 온 신경은 오직 서해원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는 내가 나중에 서해원에게 보복해 그녀가 다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내 몸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억지로 내 손가락을 붙잡아 지장을 찍게 했다.
나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강시후에게 서해원은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심지어 한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허은채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변호사님, 구급차가 왔어요, 구급차가 왔다고요...”
구급차의 불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다가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허은채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얌전히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내 몸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십자가를 그었다가 다시 합장하며 입속으로 쉴 새 없이 웅얼거렸다.
“하나님, 성모 마리아님, 부처님, 옥황상제님, 관세음보살님...”
동서고금의 신이란 신은 모조리 불러 모으는 중이었다.
“제발 우리 변호사님 좀 살려주세요. 무사히 깨어나게만 해주시면 일 년 동안 채식할게요...”
의사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은채의 눈물도 다시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조수석에 덩그러니 놓인 내 가방에 멈췄다.
“어, 이게 뭐지...”
그 시각 구급차 안에서는 간호사가 필사적으로 응급 처치를 이어갔지만, 차갑게 식어가는 내 심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간호사는 붉어진 눈으로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병원이 코앞이에요.”
의사는 곧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환자 상태가 위독합니다. 당장 수술해야 하니 응급실에 연락해서 서둘러 준비하라고 하세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의사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향했다.
눈앞의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차량들을 보자 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교통경찰한테 연락해서 앞쪽 통로 좀 터 달라고 해.”
간호사는 전화를 끊고는 분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앞에서 세강 그룹 대표님이 길을 막고 있대요. 친구한테 특별한 이벤트를 해준다고 거창하게 꽃밭을 꾸며 놓는 바람에 도로가 완전히 막혔대요.”
“경찰이 지금 그쪽과 얘기하고 있긴 한데, 치우려면... 한참 걸릴 거래요.”
“정말 어이가 없네! 여기가 얼마나 복잡한 도로인데, 어떻게 멋대로 차도를 막을 수가 있어!”
간호사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환자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구급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전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탓인지 많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간호사와 의사의 대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실 오늘은 혼인 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강시후는 서해원을 위해나를 바람맞혔다.
그뿐만 아니라 서해원을 기쁘게 해 주겠다며 꽃밭까지 꾸며 놓았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파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해원은 내게 해명하겠다는 핑계로 나를 구불구불한 산길에 가둔 뒤, 차로 치어 끔찍하게 살해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영혼은 제멋대로 차 밖으로 둥둥 떠올라 인파를 뚫고 강시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2화
VIP 병실. 서해원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후 씨, 유나 언니 별일 없겠지? 언니가 화난 것 같아서... 그래서 해명하려고 했던 건데, 내가 발작을 일으킬 줄은 몰랐어...”
그녀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강시후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
“괜찮을 거야, 유나는 원래 목숨이 질기잖아.”
그럼에도 서해원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 하는 날인데, 다 내 탓이야. 차라리 내가 언니한테 직접 설명할게. 나 때문에 두 사람 다투는 건 싫어.”
그때, 강시후의 또 다른 비서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경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표님께서 서해원 씨를 위해 준비하신 생화 장식 때문에 간선도로가 마비됐다고 합니다.”
“차량이 몰리면서 구급차까지 도로에 갇혔는데, 사고 환자라 상태가 위급해 즉시 현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도 이미 철거하고 있습니다만...”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해원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
“날 위해 준비한 거야? 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서해원의 말을 듣자마자 강시후는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치우지 마.”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강시후는 코웃음을 쳤다.
“병원에 헬기를 보내서 환자를 이송하면 되잖아.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까.”
그러자 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면 환자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세강 그룹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이 될 겁니다.”
강시후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뭐가 걱정이야? 우리한텐 심유나라는 대단한 변호사님이 계시잖아? 게다가 우리 곧 결혼할 사이인데, 세강 그룹은 우리 공동 재산이나 다름없으니 유나가 알아서 뒷수습도 잘해 주겠지.”
“난 지금 해원이랑 있어야 하니까, 별일 아니면 방해하지 마. 유나든 누구든 말이야. 안 그러면 너도 심유나랑 같이 쫓겨날 줄 알아.”
비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결국 씁쓸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들 곁에 떠서 눈을 깜빡였다.
눈꼬리에서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시후는 아직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의 계획에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듯했다.
하지만...
세강 그룹의 막강한 변호사팀이라면 이 모든 일을 감쪽같이 덮어버릴 수 있었다. 내 죽음까지도 말이다.
나는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강시후는 계속해서 서해원의 곁을 지켰고 심지어 업무를 볼 때조차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해원이 입만 열었다 하면 그는 무엇이든 다 해주었다.
나는 강시후가 서해원을 위해 섬을 통째로 사고, 심지어 행성까지 사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든 건 그저 서해원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만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우주는 영원하잖아. 나도 영원한 걸 하나쯤 갖고 싶어.”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강시후의 재산이 이토록 불어났을 줄이야.
그는 더 이상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그 처량하고 가엾어서 누구나 짓밟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며칠 동안, 깊은 밤이 되어 주변이 조용해지면 그는 서해원을 재워놓고 휴대폰을 열어 내 대화창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곤 했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뼛속까지 사랑했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령 서해원 때문에 싸우더라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내가 먼저 꼬리를 내리고 사과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자, 그는 점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을 터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해원이 병세가 안정되면, 그때 너랑 혼인신고 하러 갈게.]
[네가 말한 그 서프라이즈가 뭔데?]
그제야 나는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며칠 전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혼인신고 하는 날, 네가 깜짝 놀랄 만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분명 무언가 잊어버린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제3화
한참이 지나서야 강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담배를 낚아채려 했다.
“그만 피워, 몸에 해로워.”
하지만 손가락은 그대로 허공을 통과했다.
나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맞다, 나 이미 죽었지.’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란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도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강시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강시후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목소리에는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요즘 심유나가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일단 막아.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 해원이 요양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비서가 잠시 머뭇거리며 침묵했다.
“그동안 심유나 씨는 연락이 없으셨습니다만...”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시후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와 나눈 대화창을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꾹 눌러 심술이라도 부리듯 나를 차단해 버렸다.
그러고는 아예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
예전의 나였다면 잔뜩 겁을 먹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찾아내 사과를 하고, 제발 차단만은 풀어달라고, 연락이 두절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강시후, 나 이제 너 안 찾아가.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니, 널 증오해... 내 목숨을 앗아갔으니까.”
“저주할 거야...”
그 순간, 하늘에서 느닷없이 번개가 번쩍였다.
뒤이어 천둥이 굉음을 내며 울리자 깊이 잠들어 있던 서해원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시후 씨...”
강시후는 황급히 담배꽁초를 내던지고 병실로 뛰어 들어가 온몸을 벌벌 떠는 서해원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나 또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 역시 번개 치는 날을 끔찍하게 무서워했다.
하지만 강시후는 단 한 번도 나를 위로해 준 적이 없었다. 천둥이 치는 날이면 그는 언제나 나를 내버려 둔 채 서해원에게로 달려갔으니까.
그 일로 그에게 서운함을 토로할 때면 그는 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픈 애랑 꼭 그래야겠니?”
한참을 다독인 끝에야 서해원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강시후의 품에 꼭 안긴 그녀는 눈물 맺힌 눈으로 가녀리게 울먹였다.
“시후 씨, 나 며칠 전에 이성을 잃었던 게 자꾸 마음에 걸려. 난 정말 유나 언니랑 오해를 풀고 싶었을 뿐인데… 차라리 언니한테 가서 사과할래. 며칠 동안 유나 언니가 안 보이는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해.”
강시후는 왠지 딴생각을 하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직접 확인해 봤는데 그냥 이마에 피 살짝 난 정도였어. 넌 지금 아픈 애인데 설마 심유나가 그런 거로 화를 내겠어.”
서해원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만약 언니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어떡해... 나 감옥에 가기 싫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서해원이 격하게 흥분하자, 강시후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거듭 달랬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심유나는 원래 여자들한테는 너그러운 편이라 화 안 낼 거야. 그리고 합의서까지 받아 냈으니 더는 널 귀찮게 할 일도 없어.”
강시후의 말을 들은 서해원은 그제야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그의 품에 파고들어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강시후가 눈을 내리깔더니, 이내 서해원을 살며시 밀어냈다.
“해원아, 나중에 나랑 심유나가 결혼하고 나면 너 이렇게 나한테... 애교 부리면 안 돼. 모양새도 안 좋고, 유나도 화낼 거야.”
서해원은 순간 멍해지더니,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눈동자에 불쾌함이 가득 차올랐다.
강시후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서해원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내 탓이야,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와서... 미안해.”
강시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잘못 아니야, 괜찮아. 내가 유나랑 잘 얘기해 볼게.”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켰다.
강시후는 늘 이랬다. 언제나 서해원을 세상 그 무엇보다 우선시했다.
나는 강시후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는 간호사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강 대표님은 자기 여자친구한테 진짜 잘해 주는 것 같아. 온몸에 멍 하나 없고 그냥 놀란 것뿐인데, 병원 의사들을 전부 불러서 정밀검사까지 받게 하잖아.”
“내가 듣기로는 엄청난 규모의 꽃밭까지 준비했다더라. 머지않아 두 사람 결혼하는 것도 볼 수 있겠지? 그때 결혼식장은 얼마나 화려할지 벌써부터 상상이 안 가네.”
“그러고 보니... 그 꽃밭 때문에 교통사고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한참이나 길에 묶여 있었다며... 헬기로 겨우 이송하긴 했는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졌대... 10분만 더 일찍 왔어도 살릴 수 있었다던데...”
표정이 굳어진 강시후를 발견한 두 간호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더니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강 대표님...”
강시후의 묘한 표정에 두 간호사는 야단을 맞을까 긴장했지만 그는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툭 내뱉을 뿐이었다.
“그분은 제 약혼녀가 아니에요.”
잠시 멈칫한 그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제 약혼녀는 심유나라고 해요. 아주 유능한 변호사죠.”
제4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강시후와 막 약혼했을 무렵, 그는 내게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가 나를 미워했던 건, 내가 그의 어머니가 억지로 맺어준 약혼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무시했고 온갖 까다로운 소송 사건들을 떠맡겼으며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방관했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비좁은 창고에 갇힌 채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고열에 시달리며 병원에 누워 있을 때도, 그는 서해원을 품에 안고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감상하고 있었다.
내가 늦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노숙자에게 미행을 당해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서해원과 함께 프랑스에서 라벤더를 구경하고 있었다.
강시후는 세상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서해원에게 안겨주었다. 반면 내게 남은 것은 갈 곳 없는 상처와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뿐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모든 오해는 언젠가 풀릴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내가 수년 전부터 동경해 온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차가운 얼음을 기꺼이 녹여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우리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는 짜증을 내면서도 내게 책임을 졌고 우리의 관계는 점점 좋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뚝 끊어졌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툭하면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의 태도와 서해원의 이간질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살았을 때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다정한 인정의 말들을 정작 지금 이 순간에 듣게 되니 씁쓸함만 밀려오니 말이다.
강시후는 더 이상 두 간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와 회사로 향했다.
비서는 그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지만, 곧이어 들려온 강시후의 지시에 멈칫했다.
“심유나를 불러와.”
비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심 변호사는...”
비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시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좀 튕기라고 해. 살짝 긁힌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을 떨어! 해원이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엄청 자책하고 있으니까, 얼른 와서 해원이 좀 달래주라고 해.”
“나랑 결혼하기 싫대? 걔한테 전해,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먼저 와서 해원이 기분부터 풀어주라고. 그리고 앞으로 해원이한테 질투 좀 그만 부리라고 해, 엄청 유치하니까!”
나는 비서의 얼굴에 스치는 당혹감을 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시후를 바라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멍하니 서서 뭐 해, 당장 심유나한테 연락하지 않고.”
말을 마치고 강시후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의 발걸음에는 거친 기세가 묻어났고,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우리가 함께 살던 신혼집으로 향했다.
그 집의 모든 물건은 내 손으로 직접 고르고 채워 넣은 것들이었다.
강시후는 심호흡을 한 번 내쉬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 내 옷가지들과 화장품들이 모두 예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걸 보자 그는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심유나, 너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면, 나중에 이 집 명의를 해원이에게서 너한테 넘겨줄게... 아니, 그냥 걔랑 잘 지내봐. 돌봐달라고까지는 안 할 테니까, 최소한 타깃 삼아 괴롭히지만 마.]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여긴 우리 신혼집이 아니었다.
서해원이 이 집 창밖 풍경이 마음에 든다는 말 한마디에, 이 집은 통째로 서해원 명의로 넘어가 버렸었다.
카톡 창에 뜬 빨간 느낌표가 안방을 장식한 빨간 풍선만큼이나 시리게 눈을 찔렀다.
강시후는 그제야 자신이 나를 차단한 채 풀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나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한 뒤,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화풀이하듯 휴대폰을 침대에 내던졌다.
한참 뒤, 그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번 일은 해원이가 좀 심했어. 내가 잘 말해둘게.]
[너도 마음 풀고 얼른 답장해. 너 북극 가서 펭귄 보고 싶다며, 일 정리되는 대로 같이 가자.]
메시지가 전송 중임을 알리는 동그라미가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서해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해원의 목소리는 몹시 슬펐다.
옥상의 매서운 바람 소리와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나와 강시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시후 씨, 심유나가 인터넷에 폭로했어. 내가 남의 결혼을 망친 불륜녀라고. 난 내 결백을 증명할 수가 없어. 내가 시후 씨를 향한 마음이 정말 순수하지만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나 그냥 죽어버릴래. 죽어버리면 다 끝날 테니까…. 심유나랑 꼭 행복해야 해….”
제5화
강시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서해원의 여린 몸은 옥상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시후의 동공이 순간 작게 수축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해원아, 제발 이러지 마,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서해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
“네티즌들이 전부 나를 욕해, 상간녀라고 욕하고 걸레라고 욕해. 시후 씨, 나 정말 더는 못 버티겠어. 유나 언니도 나를 저주했어. 내가 상간녀고 여우 같은 년이라고 ...”
“하지만 언니를 원망하진 않아. 어차피 지금 시후 씨 진짜 약혼자는 언니고, 내 존재 자체가 죄악이니까.”
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으로 서해원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써야 한다니.
강시후는 굳은 표정으로 서해원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서해원이 보여준, 내가 그녀를 욕했다는 소위 그 ‘채팅 기록’을 바라보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 ‘증거’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법이 너무 엉망이라 강시후가 믿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강시후의 세계에서 나는 애초에 아무런 무게감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강시후는 서해원을 품에 안고 그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준 뒤, 이마에 가볍지만 진중한 입맞춤을 남겼다.
“해원아, 넌 상간녀가 아니야. 사랑에도 선착순이 있다면, 네가 훨씬 먼저 왔어. 나랑 심유나는 그저 걔가 내 어머니를 살려준 은혜를 빌미로 억지로 얻어낸 결혼일 뿐이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내가 다 책임질 거고 성대하게 결혼식도 올려줄게.”
서해원의 눈에 기쁨의 미소가 언뜻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불안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유나 언니한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을까? 언니가 날 더 싫어할 텐데. 유나 언니는 대단한 변호사잖아. 만약 언니가 마음먹고 나를 공격하면 난 어쩌지?”
그 말에 강시후는 코웃음을 쳤다.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 여자가 너한테 그딴 짓을 하는데 무슨 놈의 공평을 따져? 감히 너한테 그따위로 굴겠다면 대가는 똑똑히 치르게 만들어 줄 거야. 맨날 정의의 사도인 척하는데, 아예 매장해 버리겠어. 그런 년은 변호사 자격도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서해원의 눈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말로는 짐짓 망설이는 척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하자...”
강시후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절대 네가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서해원을 달래고 난 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눈매가 비쳤다.
[당장 글 내려, 그리고 해원이한테 사과해.]
하지만 이번에도 답장은 없었다.
늘 잘난 맛에 살던 강시후가 이런 무시를 당해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냉소하며 나와는 더 이상 단 한 마디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비서에게 모든 인맥을 동원해 내가 돈에 눈이 멀어 사실을 조작하고, 오직 승소만을 위해 도덕성마저 저버렸다는 증거를 퍼뜨릴 뿐만 아니라 변호사 자격 박탈 신청서까지 완벽하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나를 구름 위에서 진창으로 떨어뜨려서 해원에게 ‘상처를 준’ 가장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떠서 숨길 기색조차 없는 그 잔인한 눈빛을 지켜보며, 심장이 수많은 바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노력해 온 모든 것이 그의 가벼운 지시 한마디에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해원은 드디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부드럽게 강시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시후 씨, 역시 날 사랑하는 건 시후 씨밖에 없어.”
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했다.
휴대폰을 응시하는 강시후의 눈빛 속에 분노와 함께 묘한 허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누구보다 그를 아꼈고 또 변호사라는 직업 역시 그만큼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잠잠했고 내게는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처참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답장할 수 있겠는가?
강시후는 굳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 게시글 IP 추적해. 심유나가 도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나도 내심 궁금해졌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대체 누가 이 일들을 인터넷에 올린 걸까? 서해원의 원수일까? 아니면 강시후의 원수일까?’
강시후의 부하들은 일 처리가 아주 신속했다.
나는 강시후를 따라 어느 허름한 원룸으로 들어갔다.
경호원이 문을 쾅 차고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가녀린 몸이 잘게 떨렸다.
허은채였다.
강시후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째서 너야? 심유나는 어디 있고? 심유나가 네 뒤에 숨어 있다고 무사할 줄 알았나 본데, 당장 나오라고 해!”
“당장 심유나 불러내서 그 일들 해명하라고 해, 안 그러면 가만히 안 둘 테니까.”
허은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벌떡 일어나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강시후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변호사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왜 아직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강시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종이 내용을 확인한 직후에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멈춰버렸다.
허은채는 눈시울이 더욱 붉어진 채 꺽꺽거리며 서럽게 울었다.
“이게 바로 변호사님이 그쪽한테 주려고 했던 서프라이즈라고요!”
나의 시선도 종이로 향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