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죽은 내가 화면에 나타났다

GoodNovel 완결

나는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다. 하늘에 화면이 열린 뒤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아졌다. “공주, 나와 함께 해연국으로 돌아갑시다.” 해연국 왕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든 채 눈꼬리를 붉혔다. “짐의 황금을 실은 배 세 척을 속여서 꿀꺽하셨는데 무엇으로 갚으시겠습니까?” 월진국 왕은 주판을 튕기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공주께서는 죽는 것까지 나를 속이셨습니다...” 청운국 세자 또한 피를 토하면서도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서면서, 방금 비밀 서랍에서 훔친 옥패를 꽉 쥐고 달아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느긋하게 닫아 버렸다. 서령국의 섭정왕이자 대군인 배정호가 나를 서재에 가둔 채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매는 서늘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공주, 다른 사람의 빚을 다 갚으셨으면, 이제 제 물건을 훔친 값을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챕터 (1)

第1章

나는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다. 하늘에 화면이 열린 뒤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아졌다. “공주, 나와 함께 해연국으로 돌아갑시다.” 해연국 왕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든 채 눈꼬리를 붉혔다. “짐의 황금을 실은 배 세 척을 속여서 꿀꺽하셨는데 무엇으로 갚으시겠습니까?” 월진국 왕은 주판을 튕기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공주께서는 죽는 것까지 나를 속이셨습니다...” 청운국 세자 또한 피를 토하면서도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서면서, 방금 비밀 서랍에서 훔친 옥패를 꽉 쥐고 달아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느긋하게 닫아 버렸다. 서령국의 섭정왕이자 대군인 배정호가 나를 서재에 가둔 채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매는 서늘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공주, 다른 사람의 빚을 다 갚으셨으면, 이제 제 물건을 훔친 값을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1화 하늘 댓글창이 열리기 직전에,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인 나는 섭정왕인 대군 사저에서 물건을 훔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배정호의 옥패를 훔치는 중이었다. 어두운 청색의 그 옥패에는 서령국 국고의 비밀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대군 사저와 왕실이 함께 재산과 식량을 관할한다는 증표였다. 배정호는 그것을 책상의 셋째 칸 비밀 서랍에 숨겨 두었다. 배정호가 입궐해서 정사를 논하는 틈을 타서, 나는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자물쇠를 땄다. 자물쇠가 열리자마자 하늘 댓글창이 밝아졌다. 내가 옥패를 제대로 챙기기도 전에 누군가 서재의 문을 밀면서 열었다. 배정호가 문가에 서 있었다. 하얀 옷에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게다가 눈매까지 싸늘해서 저승사자가 강림한 줄 알았다. 배정호의 시선이 먼저 내 손의 옥패에 떨어졌다가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하늘 댓글창은 마침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칸에서는 해연국의 여우가죽 외투를 걸친 내가 해연국 왕 탁수철의 군막에 앉아서, 눈을 내리깐 채 남자를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둘째 칸에서는 흰 비단으로 눈을 가린 내가 월진국 물가의 정자에서 주판 옆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월진국 왕 서강호를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셋째 칸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내가 청운국 세자 조윤헌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면서 목숨으로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넷째 칸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였다. 왼손에는 옥패를 오른손에는 철사를 들고서 서령국 대군의 서재에 쭈그리고 앉은 채, 도둑질하다 들킨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배정호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서 내 목을 베겠구나 싶을 만큼 꽤 긴 정적이었다. 그러다 배정호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공주님께서 정안사에 기도하러 가시더니, 해연국의 왕후, 월진국의 왕실 상인에 청운국의 호위무사까지 되셨습니까?” “게다가 제 사저의 자물쇠를 따는 재주까지 있으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나는 말없이 옥패를 소매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그러나 하늘 댓글창은 이미 댓글로 도배되고 있었다. [해연국 사람: 저건 우리 왕께서 3년을 애타게 기다리신 설화 왕후이잖아? 아직도 안 죽었어?] [월진국 사람: 왕후는 무슨 얼어 죽을 왕후! 저 여자는 우리 왕의 황금을 실은 배 3척을 속여서 꿀꺽한 눈먼 아내야!] [청운국 사람: 다들 비켜! 저분은 우리 세자 저하의 죽은 아내이자 호위무사야! 위패가 아직 동궁에 모셔져 있단 말이야!] [서령국 사람: 잠깐! 그러니까 우리 공주가 요 몇 년 동안 궁에 없었던 게, 밖에 나가서 물건 떼러 다닌 거였어?] 배정호가 손가락 마디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심연화.” 배정호는 좀처럼 내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부를 때면 나는 곧 끝장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변명했다. “대군 자가,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배정호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배정호가 느긋하게 문을 닫았다. “저 화면보다 빠르게 설명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내가 막 입을 떼려는데, 하늘 댓글 창에서 시스템의 달콤하고도 차가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국운 구제 회고를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제1막, 해연국 편.” ‘끝났어.’ 저것이 나보다 빨랐다. 내가 이 책 속으로 들어왔을 때 서령국은 이미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난했다. 궁궐 지붕은 비가 샜고 호부 창고에서는 쥐가 뛰어다닐 정도였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제비를 뽑아서 녹봉을 받아야 했다. 당첨된 자는 묵은 쌀 반 자루를 먼저 받았지만, 당첨되지 못한 자는 관인이 찍힌 차용증 한 장만 받았다. 내가 깨어난 첫날, 시스템창에 임무가 떴다. “숙주님에게 해연국 국운 구제 임무를 부여합니다. 3년 안에 해연국이 망하면 숙주님도 함께 묻힙니다.” “해연국이 흥하면 숙주님은 2조 원의 자산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긴 문장 속에서도 난 2조 원라는 글자만 귀에 들어왔다. 난 그 자리에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네.” 그 시원시원한 태도에 시스템은 아주 흡족했는지 나를 해연국으로 보냈다. 제2화 해연국은 춥고 척박했다. 군사도 강하고 말도 건장했지만 곡식도 약도 모자랐다. 나는 해연국 왕에게 바친 서령국의 벙어리 노비라는 신분으로 탁수철의 군막에 던져졌다. 그때의 탁수철은 내란을 갓 평정했던 때라 두 손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웃는 것조차 칼날을 목에 대는 것처럼 살벌하게 느껴졌다. 시스템이 내게 준 임무는 아주 간단했다. “해연국의 군수 장부를 손에 넣고, 서령국과의 곡식과 말 교역로를 뚫으세요.” 나는 그 자리에서 핵심을 물었다. “어떻게 손에 넣으라는 말입니까?” 시스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한 결과, 나는 반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했다. 탁수철이 군사를 논할 때면 나는 곁에 꿇어앉아서 화로에 숯을 넣었다. 그리고 탁수철이 병사를 점호할 때면 나는 눈보라 속에 서서 등불을 들었다. 탁수철의 장수들이 나를 서령국이 보낸 폐물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장수들이 말한 곡식 창고의 위치, 교대 시각과 마장의 결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 집안 배경이 좋은 해연국의 후궁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여인들은 나를 얼음 창고에 가둔 뒤, 얼어 죽기 전에 책 세 권을 다 베끼라고 핍박했다.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질 무렵 시스템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바이탈이 떨어집니다. 숙주님, 지금 구원을 청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나도 구원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벙어리라는 설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 힘을 짜내서 서릿발 위에 두 글자를 썼다. [곡식] 탁수철이 얼음 창고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자마자 본 건 바로 그 글자였다. 곧 탁수철은 나를 안아 들고 나갔다. 겉옷으로 나를 단단히 감쌌지만 눈빛은 무섭도록 어두웠다. “얼어 죽게 생겼으면서 아직도 곡식 생각입니까?” 말을 할 수 없던 나는, 붉어진 두 눈으로 그저 탁수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늘 댓글창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한순간 잠잠해졌던 해연국의 댓글들이 곧 빽빽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여자, 그때 총애를 받았던 그 여자 아닌가?] [그해에 교역이 열려서 해연국이 목숨 살리는 약재를 받아왔던 게 기억나는데.] [그래도 나중에 왕의 옥패를 들고 튀었잖아! 이것도 감싸 줄 셈이야?] 당연히 감쌀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반년 뒤, 나는 교역이 열린 틈을 타서 해연국이 원하는 군수품, 군수의 결함, 그리고 왕후의 옥패를 모두 챙겨서 서령국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 나는 설원에 거짓 현장을 만들어 다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차 한 대가 얼어붙은 강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내 여우털 외투와 피 묻은 옷, 그리고 부서진 옥비녀가 있었지만 시신은 없었다. 탁수철은 무려 7일 동안 그 강가에서 나를 찾았다. 8일째 되던 날, 탁수철은 강가에서 자기를 막아서는 나무를 전부 자신의 손으로 베어 버렸다. 하늘 댓글창은 이 장면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눈보라가 울부짖는 가운데, 사내의 온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공주, 살아 있다면 내게 한 번만 보여주세요.” 나는 배정호의 서재에 선 채, 한때 무쇠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탁수철의 두 눈이 조금씩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순간 찡했다. 배정호는 곁눈질로 슬쩍 나를 보았다. “그래서 해연국의 그 교역로는 이렇게 얻어진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호의 시선이 내 소맷자락으로 떨어졌다. “왕후의 옥패는요?” 나는 소매를 더 꽉 눌렀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배정호의 눈빛에 싸늘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좋습니다. 계속 보죠.” 제2막은 월진국이었다. 해연국의 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월진국의 돈은 사람을 묻어 버릴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월진국의 왕 서강호는 천하에서 가장 값진 조운 시스템과 전장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서강호가 평생 가장 미워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빚지고 돈을 갚지 않는 자. 둘째, 자기 돈을 속여서 취하는 자. 아주 공교롭게도 나는 두 가지를 다 저질렀다. 내가 월진국에 갔을 때의 신분은 몰락한 상인 집안의 눈먼 딸이었다. 시스템은 내 눈을 가려 주고, 터무니없이 진부한 전개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미행 중인 월진국 왕을 구하고, 왕실 상인의 집안에 시집을 가서 수상운수 금패를 얻으세요.” 시스템의 말을 듣자마자 내 표정이 썩으면서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시집을 안 가면 안 됩니까?” 시스템은 냉혹하고 무정했다. “감정 전환 점수가 모자라면 오늘 밤 서령국의 성 세 곳에서 식량이 끊깁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서강호가 나를 처음 본 것은 임수강 나루터에서였다. 나는 낡은 주판 하나를 안고 사람들 틈에 서서, 늙은 뱃사공이 떼인 품삯을 대신 셈해 주고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는데 주판알은 나는 듯이 튕겼다. 서강호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고 칭찬했고, 나는 서강호가 돈이 많다고 칭찬했다. 그 뒤 서강호는 나를 궁으로 데려가서 장부를 살피게 했다. 나는 횡령 세 건을 찾아내서, 탐관오리들이 빼돌린 은자를 되찾아 주었다. 서강호는 매우 기뻐하며 내게 작은 누각 하나를 하사했다. 나도 무척 기뻤다. 그 누각 아래가 마침 월진국 수운국의 창고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 댓글 창 속의 나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서강호가 밤에 상소를 결재하면 나는 등불 아래 앉아서 남자를 위해 차를 달였다. 이어 서강호가 내 눈 위의 흰 비단을 만지작거렸다. “만월, 그대의 눈이 낫는다면 제일 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찻잔을 받쳐 든 채, 정말로 약간의 설렘이 실린 듯 가벼운 소리로 답했다. “전하의 얼굴을 보고 싶네요.” 제3화 그런 달달한 모습에 댓글에는 비명이 가득했다. 그러나 오직 서재에 서 있던 배정호만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저 사람을 보고 싶다 하셨습니까?” 이에 나는 즉시 말을 바꿨다. “저 사람의 국고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배정호는 말이 없었지만, 하늘 댓글 창은 계속 지나갔다. 월진국 편의 끝은 자객의 습격이었다. 자객들이 강가의 정자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서강호는 나를 감싸며 밖으로 물러났다. 나는 흰옷 차림이었고 눈 위의 흰 비단이 바람에 펄럭이며 소리를 냈다. 서강호는 나를 배에 밀어 올린 뒤 자신은 몸을 돌려 적과 싸웠다. 그렇게 하면 내가 목숨을 부지하러 달아날 걸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뒤편의 선창으로 돌아가서, 서령국에서 진작부터 매복시켜 둔 상단을 데리고 곡식을 가득 실은 배 세척과 황금 한 상자, 그리고 수운 금패 하나를 들고 튀었다. 떠나기 전, 나는 탁자 위에 차용증 한 장을 남겼다. 글씨는 아주 곱게 썼다. [월진국의 돈을 잠시 빌립니다. 3년 안에 갑절로 갚겠습니다.] 그 차용증을 확인한 서강호는 차 한 잔 마시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뒤에 섬뜩하게 웃었다. 곁에 있던 내관들은 일제히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좋아. 짐이 그 여자를 기억하겠습니다.” 영상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월진국의 댓글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갑절? 삼 년이 지났어! 이자는!] [왕께서 그 무렵 날마다 차용증을 보며 웃으시길래 나는 연서인 줄 알았어!] [서령국 공주, 나와서 돈을 갚아라!] 나는 코끝만 만졌다. 돈은 갚을 것이지만 갚는 방식은 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를 뿐이었다. 이때, 배정호가 탁자를 두드렸다. “곡식을 가득 실은 배 세 척은 어찌하였습니까?” “한 척은 백성들의 구휼에, 한 척은 무기와 바꾸는 데, 다른 한 척은 서령국 전장의 밑천으로 썼습니다.” “황금은 어찌했습니까?” “국경에 곡식 창고를 7채 지었습니다.” “수운 금패는요?” 나는 다시 소매를 눌렀다. 그 모습을 본 배정호의 미소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것도 공주께서 가지고 있나 봅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한군데 놔두는 게 편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3막은 청운국 차례였다. 청운국의 세자 조윤헌은 네 채권자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자였다. 탁수철은 성미가 사납고 서강호는 머리를 잘 굴렸다. 그러나 조윤헌은 이 사람들과는 달랐다. 조윤헌은 몸이 성치 않아서 일 년 내내 안색이 창백했다. 기침만 해도 저세상으로 바로 실려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병이 깊어갈수록 마음은 더 모질어졌다. 시스템이 내게 준 신분은 조윤헌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대역이었다. ‘누구의 대역이지?’ 아마 세상을 먼저 뜬 조윤헌의 첫사랑이었을 것이었다. 이 전개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시스템을 향해서 온갖 욕이란 욕을 다 퍼부었다. “아니 당당한 서령국 공주인 내가 남의 대역이나 하라는 말입니까?” 시스템이 안내를 띄웠다. “청운국에는 서령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약의 조제 비법과 군사 지도가 있습니다. 숙주님, 국면을 타개하도록 하세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국면을 타개해 나가야 했다. 나는 그렇게 청운국 동궁에서 가장 말이 없고 충직하면서도, 가장 칼을 잘 막는 호위무사 장형단이 되었다. 조윤헌은 내내 병약했지만, 동궁 안팎에는 온통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들이 가득했다. 나는 조윤헌을 대신해서 화살을 막았고 독을 가려냈다. 그리고 밤에는 담을 넘어 내의원에서 약의 조제 비법을 훔쳤다. 한번은 고열이 내리지 않았던 조윤헌이 내 소매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장형단.” 조윤헌의 목소리는 고열 때문에 잔뜩 쉬어 있었다. “그대도 떠날 겁니까?” 그때 나는 막 청운국 세 곳의 국경지대 군사 지도를 옷깃에 꿰매 넣은 참이었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되었으나, 나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을 닫으려고 해도 쉬이 닫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잘 살아 계신다면 저는 안 떠납니다.” 화면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청운국 쪽은 이미 울음바다였다. [장형단! 장형단!] [세자 저하가 저 여자를 위해 가묘까지 세우셨다고!] [머리가 아주 어질어질하네. 저 여자는 사기꾼이야? 아니면 목숨을 구한 은인이야?] 사실 둘 다였다. 나는 조윤헌을 구하기도 했지만 속이기도 했다. 청운국 편의 결말은 독살이었다. 나는 해독할 수 없는 독에 당한 척하고 숨이 간당간당한 모습으로 동궁 침상에 누워있었다. 조윤헌은 청운국의 비약을 한 병씩 내게 먹였다. 나는 약을 삼키면서 시스템에게 비약의 처방문을 훑게 했다. 처방문이 다 모이고 군사 지도까지 성 밖으로 보낸 뒤, 나는 조윤헌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날 조윤헌은 내 시신을 안은 채 피를 토하느라 손바닥이 피로 가득 물들 정도였다. 화면 속의 젊은 세자는 눈시울을 붉힌 채 섬뜩할 정도로 조용하게 말했다. “명을 내리겠다. 호위무사 장형단은 세자빈의 예로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서재 안은 조용해졌다. 배정호는 물건이 어디 있느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청운국의 처방전은 서령국의 역병을 한 차례 구했고, 군사 지도는 서령국이 세 번이나 포위 학살을 당할 뻔했던 화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화면속의 조윤헌을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의 몸은 지금 어떻습니까?” 배정호가 곁눈질로 슬쩍 쳐다봤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나는 즉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령국으로 빚 독촉을 하러 오다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겁니다.” 배정호의 표정은 평온했다. “안심하십시오. 이미 국경까지 왔다고 합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안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제4화 하늘 댓글창은 밤새도록 훤하게 달아올랐다. 온 천하도 덩달아 밤을 새웠다. 해연국과 청운국과 월진국의 전갈이 거의 동시에 서령국에 닿았다. 탁수철의 서신이 가장 짧고 명료했다. [공주를 내놓으십시오.] 서강호의 서신이 가장 두꺼웠다. 모두 서른일곱 장이나 되었다. 첫 장에는 예전의 정을 적었고, 둘째 장에서는 마음이 아프다고 적었다. 그리고 셋째 장부터는 이자를 계산했다. 서령국 호부상서는 끝까지 계산해 놓은 걸 힐끗 보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조윤헌은 서신을 쓰지 않고, 청운국의 군사를 이끌고 곧장 서령국 국경에 닿았다. 유난히 날이 좋지 않았던 그날, 성루에는 서령국의 신하와 백성이 가득 서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화면에는 여전히 내가 과거에 했던 범행 기록이 송출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사기꾼이라 욕했고, 누군가는 내가 서령국의 위엄을 깎았다고 했다. 그 욕설 사이로 문득 한마디가 비집고 들려왔다. “그래도 공주가 아니었으면, 재작년 흉년에 우리는 벌써 죽지 않았겠어요?” 그 한마디는 마치 마른 건초에 불씨를 떨어뜨린 것만 같았다. 이내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해연국과의 교역이 열린 뒤에야 변방의 성에 말과 소금이 들어왔잖아요.” “월진국에서 온 곡식이 우리 온 식구를 살렸어요.” “청운국에서 얻어 온 처방전으로 역병을 고쳐서 내 아들이 지금도 살아 있어요.” 욕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이해한다는 지지자들도 적지 않게 생겼다. 마지막에는 누구인지 몰라도 한마디가 터져 나다. “공주가 진 빚은 서령국이 함께 갚자!” 나는 성루 뒤에 선 채 가슴이 너무나 시큰했다. 내 곁에 선 배정호의 겉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배정호는 나를 보지 않고 성 밖만 바라보았다. “들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밤을 꼬박 새운 듯 핏발이 가득했다. “그러니 달아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나는 멈칫했다. 배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공주, 서령국은 공주 하나만 내보내서 사기를 치게 하고, 무릎을 꿇게 하고 칼을 막게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주께서 훔쳐 온 것들은 이미 나라의 성벽이 되었고, 곡식 창고가 되었고 처방전이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백성들은 이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서령국이 공주 앞을 막아설 차례입니다.” 목이 멘 내가 막 감동했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시스템의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감정 수치가 한계를 넘었습니다. 채권자 합동 심문을 개시합니다.” “숙주님은 12 시진 안에 만백성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명을 마치도록 하세요.” “해명에 실패하면 서령국은 다시 원래 상태로 초기화됩니다.” 막 차오르던 눈물이 순식간에 쏙하고 들어가 버렸다. 한참이나 내가 말이 없자, 배정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공주의 시스템은 늘 저렇게 재수가 없습니까?” 나는 분노에 가득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늘 저럽니다.” 빚쟁이들의 합동 심문은 서령국 성루에 차려졌다. 화면에는 네 사람이 보였다. 해연국 왕 탁수철, 월진국 왕 서강호, 청운국 세자 조윤헌, 그리고 서령국 섭정왕인 대군 배정호가 내 앞뒤와 양옆으로 나뉘어 앉았다. 그리고 나는 한가운데 앉았다. 사면초가라는 말이 너무나 딱 들어맞는 듯한 상황이었다. 시스템은 아주 친절하게 화면에 큰 글자를 띄웠다. “첫 번째 질문, 숙주님은 고의로 감정을 속인 것을 인정합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절반은 인정해요.” 소란스럽던 댓글이 순간 조용해지면서, 탁수철은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어떤 절반입니까?” “거짓 신분을 이용한 건 사실이에요.” 나는 탁수철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빤히 쳐다봤다. “그렇지만 해연국에 재해가 생겼던 그때, 제가 남기고 간 약재와 곡물 운송로는 진짜였습니다.” 이에 탁수철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시스템이 계속 글자를 띄웠다. “두번째 질문. 월진국의 돈과 곡식을 불법으로 유용한 것을 인정합니까?” 서강호가 부채를 흔들면서 피식 웃었다. “공주, 잘 생각하고 답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나는 품에서 장부 한 권을 꺼내서 탁자에 놓았다. “인정합니다.” 서강호의 웃음이 그 대답에 그대로 굳어졌다. 나는 장부를 펼쳤다. “원금은 곡식을 가득 실은 배 3척과 황금 한 상자, 그리고 수운 금패 하납니다.” “서령국은 이 밑천으로 곡식 창고 12개와 싼 가격에 약을 파는 약방 36곳을 지었고 무역로 7개를 개척했어요.” “배 3척의 이자는 서령국이 앞으로 10년에 걸쳐 갚을게요.” 서강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것은 옛 연인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 철저하게 일을 하는 장사꾼이 장부를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시스템이 다시 3번째 질문을 띄웠다. “죽은 척하고 청운국 세자를 속인 뒤 튄 것을 인정합니까?” 그러자 조윤헌은 한마디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안색은 창백했고 손끝으로 팔걸이를 짚은 채 기침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나는 자기 병 하나를 꺼내서 밀어 보냈다. “인정합니다. 이건 그때 전하께서 주신 비약을 고친 처방입니다. 청운국 내의원이 이대로 약을 조제하면 전하의 심폐를 지킬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전하, 제가 전하를 속인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전하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조윤헌이 마침내 고개를 돌리면서 기침을 한 번 했다. 다시 눈을 들었을 때 눈꼬리는 무섭도록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러면 공주께서는 단 한 순간이라도 나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사방이 조용해졌다. 시스템은 화면의 이 물음을 크게 키웠다. 곧 댓글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아졌다. 사실 나는 듣기 좋은 말 한마디만 하면 청운국 세자의 화가 절반 정도 가라앉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일에 가장 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조윤헌은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윤헌을 보며 진심을 전했다. “떠날 것이냐 물으셨을 때, 저는 남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서령국에는 약을 기다리는 이재민이 십여만 명이나 되었고, 변방에는 지도를 기다리는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전하의 호위무사 장형단도 아닌 서령국의 공주 심연화입니다.” 시스템은 한순간 말이 없었다. 이윽고 화면에는 큰 글자가 떠올랐다. [진심인 것으로 판정. 통과.] 곧 댓글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속인 것도 인정하고 세자를 살린 것도 인정했어.]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것보다 훨씬 나아.] [원래는 욕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욕이 안 나오네.] 막 한숨을 돌리는데 시스템이 다시 네 번째 질문을 띄웠다. [숙주님은 임무 완수를 눈앞에 둔 지금 서령국의 섭정왕인 대군 자가의 옥패를 훔친 까닭을 해명하세요.] 자신과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배정호는 마침내 눈을 들었다. 앞의 셋은 예전의 일이었지만, 배정호의 옥패를 훔친 건 현장에서 직접 잡힌 현행범의 소행이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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